3화
‹ ›한서은은 옥상 문 앞에 선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교복 재킷 안으로 넣은 셔츠 깃이 흐트러짐 없이 반듯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옷자락이 짧게 파닥이는 소리만 들렸다. 걸음걸이는 급하지 않았지만, 그 느린 걸음이 오히려 유하와 나윤, 소희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마치 심연에서 걸어 나온 무언가가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걸 아는 것처럼, 발끝이 시멘트 바닥을 딛는 소리마저 정확한 박자로 울렸다.
"한서은?" 소희가 먼저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에 당혹감이 배어 있었고, 손에 쥐고 있던 물병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물병 내려놔." 서은이 짧게 말했다. 존댓말도 반말도 아닌, 딱 그 중간의 단정한 어조였는데, 그 안에 실린 무게가 세 사람의 움직임을 그대로 정지시켰다. 물병 속 물이 찰랑거리며 내는 소리조차 그 순간엔 지나치게 크게 들렸다.
"우리 그냥 장난친 거야." 나윤이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그 장난, 지금부터 학생부에 전달할까." 서은은 휴대폰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화면에는 이미 무언가가 녹화되고 있는 듯한 빨간 표시가 떠 있었고, 그 작은 점 하나가 세 사람의 얼굴에서 핏기를 빠르게 앗아갔다. "어제 옥상 영상, 오늘 이 옥상 영상까지 합치면 꽤 볼만한 자료가 되겠는데."
유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쥐고 있었지만, 그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세 사람은 잠시 서로의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아무 말 없이 옥상을 빠져나갔다. 도망치듯 서두르는 발소리가 계단 쪽으로 멀어졌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그제야 도윤의 귀에 제대로 들려왔다.
***
도윤은 여전히 난간에 등을 붙인 채였다.
서은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가까워지는데도 그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손끝이 아직 차가웠고, 옥상의 시멘트 냉기가 등을 통해 그대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하늘은 낮게 깔려 있었고, 바람이 옥상 난간 사이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철제 구조물이 낮게 울었다.
"괜찮아?" 서은이 물었다. 조금 전과는 다른, 나른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괜찮아 보여?" 도윤이 겨우 대답했다. 자조 섞인 목소리였고, 말끝이 살짝 갈라졌다.
서은은 대답 대신 그의 곁에 나란히 서서 난간에 팔을 기댔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날렸고, 도윤은 그 옆모습을 흘끗 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는 시간이 잠시 흘렀는데, 그 침묵이 이상하게도 불편하지 않았다.
"어제도 봤어." 서은이 말했다. "영상."
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목이 마른 듯 침을 삼켰지만, 그마저도 소리 없이 지나갔다.
"윤소라, 걔 원래 그런 애 아니었을 텐데." 서은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시선은 멀리 학교 운동장 쪽을 향해 있었다. "아니면 원래 그런 애였는데 내가 몰랐던 거거나."
"넌 왜 도와준 거야." 도윤이 물었다. 목소리에 경계심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이런 식으로 아무 대가 없이 나서는 사람을, 그는 오래전부터 믿지 않았다.
서은은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도윤은 불안해졌는데,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바람이 다시 한 번 불었고, 서은의 교복 치마 끝이 살짝 흔들렸다.
"그냥." 서은이 짧게 대답했다. "비슷한 걸 겪어본 적 있어서."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묻기도 전에, 서은은 가방에서 작은 문고본 하나를 꺼내 보였다. 표지에는 검과 마법진이 그려진, 도윤이 몰래 읽던 시리즈와 같은 라노벨이었다. 책등이 이미 여러 번 접혔다 펴진 듯 낡아 있었고, 귀퉁이가 둥글게 닳아 있었다.
"이거, 너도 알지?" 서은이 표지를 살짝 흔들며 물었다.
도윤은 순간 말을 잃었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려 애썼던 취향이, 이 낯선 소녀의 손에 들린 채로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드러나 있었다. 심장이 이상한 속도로 뛰기 시작했는데, 그게 놀라움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너도……?" 도윤이 물었다. 목소리가 처음보다 조금 낮아져 있었다.
"몰랐어? 나 이 학교에서 제일 유명한 오타쿠야, 다만 아무도 모르지." 서은이 처음으로 웃었다. 그 웃음이 지금까지 보였던 냉정한 표정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라, 도윤은 순간 낯선 기분이 들었다. 마치 무대 위에서 다른 배역을 입은 배우를 보는 것 같은, 익숙한 얼굴과 낯선 표정이 겹쳐지는 느낌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반 아이들이 도윤의 안경을 두고 놀리던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넌 그냥 조용히 있어."
담임이 그렇게 말했었다. 교실 뒤편에서 아이들이 웃던 소리, 칠판 지우개 가루가 창으로 들어온 햇빛 속에서 흩날리던 장면까지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때 아무도 그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그 사실을 지금 떠올린다고 해서, 어제 옥상에서의 일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달라지는 건 없었을 것이다.
"내가 왜 널 도와줬는지, 궁금해?" 서은이 물었다. 시선은 여전히 먼 하늘을 향해 있었고, 목소리는 건조했지만 그 안에 어떤 여운이 남아 있었다.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 질문이 오늘 하루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가 왜 대답하지 못했을까.
궁금해서였을까, 아니면 대답을 듣는 게 두려워서였을까. 옥상의 바람은 여전히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고, 서은의 옆얼굴은 아무 표정도 읽을 수 없을 만큼 고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