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짝사랑 사각지대

2화

체육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교실 안이 부산스러워졌다. 다들 체육복 가방을 챙겨 우르르 몰려나가는 통에 탈의실로 향하는 좁은 복도부터 이미 아이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나는 그 틈에서 민호의 뒷모습을 발견하고는 괜히 걸음을 늦췄다. 민호는 늘 그렇듯 가장 구석진 자리를 골라 서서는 등을 돌린 채 재빠르게 셔츠 단추를 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다른 애들은 아무렇지 않게 웃고 떠들며 옷을 갈아입는데, 민호만은 늘 그 짧은 순간을 마치 무언가를 견뎌내는 사람처럼 서둘러 넘기려 했으니까. 그날은 유독 반 애들이 몰려 있어서 좁은 탈의실 안이 북적였는데, 사물함 문을 열고 닫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뒤섞여 시끄러웠다. 나는 내 사물함 앞에 도착해 문을 열려다가 누군가 벗어둔 운동화에 발이 걸려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어어, 하는 소리가 절로 새어 나왔고, 넘어지지 않으려 팔을 허우적대다가 그 바람에 옆에 있던 민호의 어깨를 툭 치며 그대로 균형을 잃고 말았다. "어어, 미안!" 사과하며 손을 뻗어 붙잡으려는데, 그 손끝에 민호의 안경다리가 걸려 툭 떨어져버렸다. 안경은 바닥에 떨어지기 전 잠깐 허공에서 반짝였는데, 그 짧은 순간이 이상하게도 느리게 느껴졌다. 그리고 안경이 사라진 순간, 민호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안경 없는 민호의 얼굴은 내가 알던 그 무표정한 남학생의 얼굴이 아니었다. 눈매는 훨씬 선명했고, 속눈썹은 길었으며, 피부는 뭐라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매끈했는데, 순간 나는 그게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낯설게 느껴졌다. 안경 하나로 이렇게까지 인상이 달라질 수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런 생각도 오래 붙잡고 있을 틈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 순간 반쯤 벌어진 셔츠 사이로 드러난 상체에 감긴 붕대 같은 것이 눈에 들어오면서 나는 숨을 삼켰다. 도대체 왜… 라는 물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굳어 있었다. 주변에서는 여전히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에게는 그 모든 소음이 갑자기 아득하게 멀어진 것 같았다. 민호는 그런 나를 향해 재빠르게 안경을 주워 다시 쓰며 셔츠를 매만졌는데, 그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런 순간을 대비해온 사람처럼 동작은 빨랐지만, 그 빠름 속에 숨길 수 없는 당황이 배어 있었다. "뭘 봐." 민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 낮게 깔리며 냉랭하게 뱉어졌다. "안경 떨어진 것뿐이잖아." 그렇게 말하는 얼굴은 이미 무언가를 들켰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의 것이었는데, 그럼에도 눈빛만은 결코 흔들리지 않으려는 듯 나를 똑바로 마주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오히려 나를 더 얼어붙게 만들었다. "너… 방금 그거…" 내가 겨우 입을 열자 민호는 한 발 다가서며 낮게 잘라 말했다. "헛소리하지 마. 네가 잘못 본 거야." 그러니까, 안 돼, 라는 듯한 그 단정적인 어조에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민호의 목소리에는 평소와 다른 종류의 긴장이 서려 있었는데, 그건 단순히 짜증이나 귀찮음이 아니라, 무언가를 지키려는 사람의 절박함에 가까웠다. 그럴리가. 방금 분명히 봤는데. 하지만 민호는 이미 몸을 돌려 탈의실을 빠져나가고 있었고, 나는 그 뒷모습을 향해 뭐라 더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어야 했다. 손끝이 저릿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는데, 그건 놀라움 때문인지 아니면 뭔가 미안한 감정 때문인지 스스로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옆에 서 있던 다른 애가 "뭐야, 둘이 싸웠어?" 하고 물었지만 나는 그저 고개를 저으며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저렇게까지 완강하게 부정하는 걸까. 그리고 저 붕대는… 설마. 체육 시간 내내 나는 운동장 한쪽에서 멀찍이 서 있는 민호를 자꾸 힐끔거렸다. 체육 선생님이 뭐라 지시를 내리는 소리도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공이 내 쪽으로 날아오는 것도 뒤늦게 알아채 허둥지둥 피하는 통에 몇 번이나 애들의 웃음을 사기도 했다. 민호는 여전히 저 멀리서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지만, 그 무표정 안에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다는 걸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체육 시간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오는 길, 나는 몇 번이나 민호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그때마다 민호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시선을 피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복도에서 나란히 걷게 된 순간에도 민호는 마치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앞만 보고 걸었는데, 그 단호한 뒷모습이 오히려 더 많은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중 문득 중학교 시절의 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 진짜 너 아니면 아무도 못 믿어.' 그때 민호가 웃으며 했던 말이 떠올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웃음이 어딘가 애틋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는 느낌이 새삼 낯설게 다가왔다. 그 시절의 민호는 지금보다 훨씬 편안하게 웃던 아이였는데, 언제부터 저렇게 안경 뒤에, 그리고 무표정 뒤에 자신을 숨기게 된 걸까. 나는 그 답을 알 수 없었고, 알 수 없다는 사실이 갑자기 낯설게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겨우 마주친 민호는 여전히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나를 힐끗 바라보는 그 눈빛에는 분명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마치 내가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낼까 봐 미리 방어벽을 세워둔 사람처럼, 시선이 스치는 순간에도 곧바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필이면 그 순간, 복도 창문 너머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지아의 시선이 내 눈에 들어왔다. 지아는 아무렇지 않은 듯 얼른 시선을 돌렸지만, 그 짧은 순간 스쳐 간 표정이 평소의 온화함과는 사뭇 다른, 뭔가를 알아챈 사람의 얼굴이었다는 걸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지아가 언제부터 저기 서 있었던 건지, 저 창문 너머에서 얼마나 오래 이쪽을 보고 있었던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도대체 얼마나 오래 저기서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그리고 지아는 대체 뭘 본 걸까. 나는 그 의문을 품은 채로도 어쩐지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자리로 돌아갔는데, 자리에 앉으면서도 손끝이 여전히 차갑게 굳어 있는 게 느껴졌다. 책상 위에 놓인 교과서를 펼쳤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자꾸만 시선이 민호의 등과 창문 쪽 지아의 자리 사이를 오갔다. 등 뒤로 느껴지는 시선들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하루였다. 그리고 그 무게 한가운데에, 아직 아무것도 확인하지 못한 물음표만이 점점 더 크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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