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여신과 가짜 연애 1일차

1화

교실 뒷문 쪽 창가,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그 자리에서 이도현은 손끝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리며 방금 도착한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발신인은 윤서린이었고, 내용은 짧았다. '내일부터 그렇게 하자.' 문장 끝에 마침표가 찍혀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그 어떤 감정 표현보다 더 냉정하게 느껴졌다. 이모티콘 하나 없이, 느낌표 하나 없이, 딱 필요한 말만 골라 담은 그 문장을 도현은 세 번이나 다시 읽었다. 세 번을 읽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화면 밝기를 낮추고 액정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창밖으로 운동장의 흙먼지가 바람에 실려 낮게 흩어지고 있었고, 그 먼지 사이로 아직 체육복을 입은 아이들 몇이 공을 주고받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제의 일이 벌써 아득한 것처럼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방금 벌어진 일처럼 선명했다. 벌칙은 이한나가 제안한 것이었다. 반 대항 피구 시합에서 진 팀의 대표 두 사람이 일주일간 커플처럼 지내야 한다는, 누가 봐도 즉흥적이고 유치한 규칙. 이한나는 그 규칙을 발표하면서 눈을 반짝였고, 반 아이들은 웃음을 터뜨렸으며, 뽑기 통에서 나온 이름 두 개는 윤서린과 이도현이었다. 이한나가 종이를 펼쳐 보이며 "짜잔" 하고 외쳤을 때, 반 전체가 순간 숨을 멈췄다가 곧 폭소를 터뜨렸다. 도현은 그 순간 자신의 이름이 불렸을 때, 세상이 잠깐 멈췄다고 생각했다. 상상 속에서는 늘 라이트노벨 주인공이 겪는 일이었는데, 실제로 겪게 되니 MP가 순식간에 바닥나는 기분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 그 압박 자체가 그에게는 이미 던전 최심층의 보스전이나 다름없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오고, 목덜미가 뜨거워졌으며, 시야 한쪽이 좁아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진짜 하는 거야?" 오상혁이 체육복 소매를 걷어 올리며 물었을 때, 도현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목소리를 낼 자신이 없었다. "야, 부럽다 진짜." 오상혁은 팔꿈치로 도현의 옆구리를 슬쩍 찌르며 웃었다. "윤서린이랑 일주일이면, 나였으면 아마 심장마비로 죽었을걸."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웃는 시늉만 했다. 웃음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웠는지는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 윤서린은 벌칙에 대해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무심함이 반 아이들 사이에서 더 화제가 되었는데, 반의 여신이라 불리는 그녀가 이렇게 순순히 벌칙을 받아들이다니, 다들 그 안에 무언가 있으리라 짐작했다. 몇몇은 두 사람이 원래부터 아는 사이였을 거라 추측했고, 몇몇은 서린이 도현을 놀리려는 속셈일 거라 수군거렸다. 도현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서린이 자신을 특별하게 여겨서일 거라고, 아니 그럴 리는 없다고, 두 생각이 번갈아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밤이 되어 침대에 누워도 그 생각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천장의 얼룩진 조명을 바라보며 도현은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왜 나였을까. 왜 하필.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되풀이하다가, 결국 잠들지 못한 채 아침을 맞았다. 진실을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체육관 뒤편, 물품 창고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에서 도현은 우산을 가지러 갔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벽 너머에서 남하늬와 윤서린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형광등이 깜빡이며 낮게 웅웅거렸고, 창고 안 특유의 먼지와 습기 섞인 냄새가 통로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도현은 발끝을 세운 채로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근데 진짜 왜 도현이야?" 남하늬의 목소리엔 순수한 궁금함이 묻어 있었다. "상혁이도 있었잖아, 뽑기 후보에." "소거법이야." 서린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억양의 굴곡이 거의 없어서, 마치 준비해둔 대본을 읽는 것처럼 들렸다. "우진이는 부담스럽고, 태오는 시끄럽고, 상혁이는 너 보는 눈빛이 너무 뻔해서 부담스럽고. 남은 게 도현이었어." "그게 무슨 이유야, 그건." 남하늬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일 안 거슬리는 사람." 서린이 짧게 웃었다. 웃음소리마저도 서늘하게 들렸다. "딱 좋잖아. 조용하고, 눈에 안 띄고, 나한테 뭘 바라지도 않을 것 같고." "그래도 걔 나쁜 애는 아니잖아." "나쁘다는 게 아니라." 서린이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냥,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거지. 일주일만 지나면 끝날 일이니까." 도현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우산 손잡이를 쥔 손끝이 차갑게 식어갔고, 창고 안의 먼지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형광등 불빛이 한 번 더 깜빡였다가 다시 안정되었을 때, 도현은 자신의 숨소리마저 조심스럽게 눌러 삼켰다. 그가 여태 상상해온 어떤 서사, 어떤 특별한 이유, 그런 것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았더라면 좀 더 마음이 편했을까. 아니, 오히려 이렇게 직접 듣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헛된 기대는 품지 않게 되었으니까. 달라지는 건 없었을 것이다. 도현은 조용히 몸을 돌려 통로를 빠져나왔다. 우산은 결국 챙기지 못했다. 비가 오면 어쩔 수 없이 젖으면 될 일이었다. 체육관을 나서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고, 바람이 한 번 크게 불어와 그의 옷깃을 흔들었다. 그 바람 속에서도 방금 들은 말들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조용하고, 눈에 안 띄고,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사람. 그것이 그를 향한 윤서린의 평가였다. *** 다음 날 아침,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미 반 전체의 시선이 도현과 서린 쪽으로 쏠려 있었다. 누군가는 휴대폰을 슬쩍 들어 몰래 사진을 찍으려는 듯한 자세를 취했고, 누군가는 팔짱을 낀 채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서린은 평소와 다름없이 자리에 앉아 손거울로 앞머리를 정리하고 있었고, 도현이 다가오자 시선만 슬쩍 들어 그를 확인했다. "왔어." 그녀의 말투는 남자친구를 맞이하는 사람의 그것이 아니라, 거래 상대를 확인하는 사람의 그것이었다. 손거울을 접어 파우치에 넣는 손짓조차 사무적이었다. "어, 그래." 도현은 자리에 앉으며 애써 시선을 피했다. 어제 들은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되었지만, 그걸 알고 있다는 사실을 서린에게 들킬 생각은 없었다. 책상 위에 가방을 내려놓는 손끝이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는 것을, 도현 자신도 뒤늦게 알아차렸다. "오늘부터 뭐, 딱히 할 건 없어." 서린이 앞을 보며 말했다. "그냥 애들 보는 데서 몇 번 같이 다니는 척만 하면 돼. 점심시간에 같이 밥 먹고, 하교할 때 같이 나가고. 그거면 충분해." "어, 그래." 도현은 또다시 같은 대답을 되풀이했다.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불편하면 말해." 서린이 덧붙였다. 배려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억양에는 어떤 온기도 섞여 있지 않았다. "괜히 티 나게 어색해하면 더 이상하니까." 교실 뒤편에서 강태오가 팔짱을 낀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갈색 머리 아래로 드리운 눈빛이, 웃고 있는 입가와는 다르게 서늘했다. 그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낮게 웃음을 흘렸고, 옆자리의 친구가 무언가 묻자 고개를 저으며 대답을 피했다.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현은 아직 알지 못했다. 다만 그 시선이 자신에게 오래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만은, 등 뒤로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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