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다음 날 아침, 도현은 평소보다 삼십 분 일찍 집을 나섰다. 골목길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가로등이 아직 꺼지지 않은 채로 희미하게 빛을 흘리고 있었으며, 새벽 공기는 옷깃 사이로 스며들어 목덜미를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운동화 밑창이 아스팔트에 닿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는데, 그 소리가 마치 누군가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신호처럼 느껴져서, 도현은 자기도 모르게 걸음의 속도를 줄였다.
교문 근처 벤치에는 서린이 먼저 앉아 있었다. 교복 재킷을 단정히 걸친 채,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앉은 그 모습은 언제나처럼 흠 잡을 데 없었지만, 오늘은 어딘가 평소와 다른 긴장이 어깨선에 배어 있었다. 그녀의 손끝이 무릎 위에서 몇 번이고 접혔다가 펴지는 걸 보고서야, 도현은 그 긴장의 실체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일찍 왔네." 도현이 다가가며 말을 건넸다.
"앉아." 서린은 벤치 옆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명령형이었지만, 그 안에 강압적인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그 손짓에는 평소보다 힘이 덜 들어가 있어서, 도현은 그녀가 무언가를 오래 고민하다가 이제 막 입을 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도현이 자리에 앉자, 서린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면을 바라봤다. 운동장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고, 아침 이슬이 잔디 위에서 옅게 빛나고 있었다. 바람이 한 번 불어와 서린의 앞머리를 살짝 흩트렸는데, 그녀는 그것을 넘기지도 않고 그대로 두었다.
"태오가 왜 저러는지 알아?"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글쎄. 모르겠어." 도현이 짧게 답했다. 반쯤은 사실이었다. 태오의 행동에 어떤 의도가 있다는 건 짐작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짚어내지 못했다. 며칠 전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태오는 도현을 보고도 인사조차 없이 지나쳤고, 그 뒷모습에서 느껴진 냉기가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우진이 때문일 거야." 서린이 말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건조했지만, 그 안에 미묘한 피곤함이 섞여 있었다. "태오랑 우진이 친하잖아. 아마 우진이가 뭔가 부탁했겠지."
"부탁?" 도현이 되물었다.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 박동이 목덜미까지 올라오는 걸 느끼며, 도현은 애써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으려 애썼다.
"모르겠어, 확신은 없어." 서린은 고개를 저었다. "근데 이상하지 않아? 벌칙 게임 규칙, 그날 유독 이한나가 이상하게 밀어붙였잖아. 누가 뒤에서 부탁한 것처럼."
도현은 그 말을 곱씹었다. 벌칙이 우연이 아니라 누군가의 설계였다면, 그리고 그 설계의 배후가 정우진이었다면, 지금까지 그가 이해하고 있던 모든 상황의 전제가 흔들리는 셈이었다. 도현의 머릿속에서 며칠 전 교실 뒤편, 이한나가 규칙판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웃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는 그저 장난이라 여겼는데, 지금 다시 떠올리니 그 웃음의 결이 조금은 다르게 느껴졌다.
"근데 왜 우진이가 그런 걸 부탁했을까." 도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시선을 운동장 저편, 정문 쪽으로 옮겼다. 그 방향에서, 마치 예정된 것처럼 정우진이 걸어오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등 뒤에서 비쳐 그의 실루엣만 먼저 눈에 들어왔는데, 그 그림자가 유난히 길게 늘어져 벤치 앞까지 닿아 있는 것을 도현은 무심결에 바라보았다.
***
우진은 두 사람을 발견하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아침 햇살이 그의 옆얼굴을 비추었는데, 그 표정에서 어떤 동요도 읽을 수 없었다. 손을 교복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걸음의 속도를 그대로 유지하며 다가오는 그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나른했다.
"일찍들 왔네." 그가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며 다가왔다.
"우진아." 서린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물어볼 게 있어."
"뭔데." 우진의 목소리는 나른했지만, 그 나른함 아래 미세한 경직이 스며 있었다. 그가 멈춰 선 자리는 벤치에서 정확히 두 걸음 떨어진 거리였는데, 그 거리감이 마치 계산된 것처럼 도현의 눈에 걸렸다.
"태오한테 벌칙 게임, 너가 부탁한 거야?"
순간 침묵이 흘렀다. 도현은 그 침묵의 길이를 세고 있었다. 하나, 둘, 셋. 우진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지만, 그 눈빛에서 무언가 흔들리는 기색이 스쳤다. 바람이 다시 한 번 불어와 그의 셔츠 자락을 흔들었고, 그 흔들림이 잦아들 때까지도 우진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게 왜 궁금한데." 우진이 되물었다. 대답을 피하는 듯한 어조였다.
"대답이나 해." 서린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날카로워졌다.
우진은 잠시 서린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도현 쪽으로 돌렸다. 그 시선이 스치는 순간, 도현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그 눈빛 안에 담긴 것이 단순한 우정이나 호기심이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눈동자의 색은 여전히 평소와 같은 짙은 갈색이었는데, 그 색 안쪽에서 무언가가 미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태오 좋아하잖아, 너." 언젠가 우진이 아무렇지 않게 던졌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근데 걘 몰라, 그렇지." 그때는 그저 지나가는 농담이라 여겼는데, 지금 이 순간과 겹쳐지자 그 말의 무게가 새롭게 다가왔다. 그 사실을 그때 더 깊이 캐물었더라면, 지금 이 상황이 조금은 달랐을까. 달라지는 건 없었을 것이다.
"그건." 우진이 입을 열었다가, 말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서린에게서 도현에게로, 그리고 다시 서린에게로 옮겨갔다. 그 짧은 순간에도 그는 어떤 계산을 하고 있는 듯 보였고, 그 계산이 끝나지 않았다는 걸 도현은 그의 다물린 입술에서 읽을 수 있었다.
등교하는 학생들의 발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운동화 소리, 웃음소리, 가방끈이 어깨에 부딪히는 소리들이 뒤섞이며 점점 가까워졌고, 곧 정문 앞은 아이들로 가득 찰 것이었다. 이 셋만의 대화는 더 이어질 수 없을 것이다.
"수업 끝나고 얘기하자." 우진이 결국 말을 삼키며 몸을 돌렸다. "지금은 아니야."
그가 등을 돌려 걸어가는 뒷모습을, 서린과 도현은 아무 말 없이 지켜봤다. 그의 등은 평소보다 조금 굽어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것이 단순한 착각인지 아닌지 도현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 뒷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둘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무슨 대답을 들으려던 걸까. 그리고 그 대답이 나오면, 지금 이 불안정한 관계는 또 어떻게 흔들리게 될까.
서린은 다시 벤치에 앉지 않고, 가방끈을 고쳐 메며 조용히 서 있었다. 그녀의 옆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지만, 그 무표정함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는 듯했다.
"수업 끝나고." 서린이 낮게 되뇌었다. "그 말, 믿어?"
도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믿는다고 말하기에는 우진의 눈빛이 너무 많은 것을 숨기고 있었고, 믿지 않는다고 말하기에는 그와 쌓아온 시간이 너무 길었다.
멀리서 등교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맞춰 아이들이 하나둘 정문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벤치 주변은 순식간에 시끌벅적한 아침의 풍경으로 뒤덮였다. 그 소음 속에서도 도현의 귓가에는, 우진이 남기고 간 마지막 말 한마디만이 계속해서 되풀이되고 있었다. 지금은 아니야.
도현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한 채, 다가오는 아이들의 발소리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업이 끝나면, 정말로 모든 것이 밝혀질까. 아니면 오늘도 그저 또 하나의 침묵이 쌓이게 될까. 그 답은,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