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여신과 가짜 연애 1일차

3화

점심시간, 급식실로 향하는 아이들의 발소리가 복도를 타고 멀어지고 나면 교실은 텅 빈 것처럼 조용해졌다. 몇몇만이 남아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고, 도현은 그중 하나였다. 자리에 앉아 라이트노벨을 펼쳐 들었지만, 페이지 위의 글자들은 아무 의미 없는 검은 선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태오가 던진 마지막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침 등굣길, 계단을 오르며 무심하게 던진 그 한마디가.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너네 진짜 사귀는 거 맞아?" 그때는 웃어넘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어넘긴 게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그 예감은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야, 이도현." 교실 뒷문에서 태오가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평소보다 목소리가 유독 컸다는 걸, 도현은 그 순간에는 눈치채지 못했다. "어." 도현이 책을 내려놓으며 답했다. 책장이 접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너 진짜 서린이랑 뭐 하는 거냐?" 태오가 웃으며 반 아이들을 둘러봤다. 그 웃음에 몇몇이 자연스럽게 동참했고, 순식간에 교실 안 시선이 도현에게 쏠렸다. 몇 개의 책상이 삐걱,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손도 안 잡고, 밥도 따로 먹고. 그게 무슨 연애야." "그건..." 도현이 입을 열었지만,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혀끝에서 문장이 조립되다가 그대로 흩어졌다. "아니 진짜 신기해서 그래." 태오가 옆에 있던 우진을 슬쩍 돌아봤다. 우진은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보고 있었지만, 그 침묵이 도현에게는 더 크게 느껴졌다. 마치 우진의 등이 이 상황을 방관하는 또 하나의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서린이 같은 애가 왜 너를 골랐을까? 궁금하지 않냐, 다들?" 몇몇이 킥킥거렸다. 누군가는 책상 밑에서 휴대폰을 들어 슬쩍 카메라를 켜는 것 같기도 했다. 도현은 그 시선들의 무게를 하나하나 헤아릴 수 있었다. 등 뒤에서, 옆에서, 앞에서. "그냥 물어보는 거야. 나쁜 뜻 없어." 태오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그 웃음이 나쁜 뜻이 없다는 말과는 정반대로 느껴졌다. 웃음소리가 교실 안에 퍼졌다. 도현은 그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것 같아 귀를 막고 싶었지만, 그런 행동조차 할 수 없었다. 손끝이 차갑게 식었고, 목덜미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들었다가, 이내 서늘하게 말랐다. "그냥, 우연이겠지." 태오가 어깨를 으쓱하며 결정타를 던졌다. "아니면 서린이가 눈이 삐었거나." 반 전체가 웃음을 터뜨렸다. 몇몇은 노골적으로, 몇몇은 애매하게 미소만 지으며. 누군가는 짝의 옆구리를 찌르며 낮게 소리를 삼켰고, 그 소리마저 도현의 귀에는 유난히 선명하게 박혔다. 도현은 그 순간 자신의 존재가 그 웃음 속에서 지워지는 걸 느꼈다.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열이 오르는데도 얼굴은 오히려 창백해지는 이상한 감각이었다. 책상 위에 놓인 손이, 마치 다른 사람의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아무리 머릿속에서 문장을 조합해 봐도,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럴듯한 반박도, 웃으며 넘길 수 있는 가벼운 말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태오의 웃는 얼굴과, 그 뒤로 흐릿하게 번지는 다른 아이들의 얼굴만이 눈에 들어왔다. "야, 대답 좀 해봐. 궁금해서 그런다니까." 태오가 재차 물었다. 목소리에 웃음기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 아래 어딘가에는 다른 결이 섞여 있는 것도 같았다. 확신할 수는 없었다. *** "그만해." 낯익은 목소리가 교실 문 쪽에서 들려왔다. 윤서린이었다. 급식실에서 돌아온 그녀는 문가에 서서 팔짱을 낀 채 태오를 쳐다보고 있었다. 표정에는 짜증도, 화도 아닌, 순수한 냉기만이 감돌았다. 마치 겨울 창문에 낀 서리처럼, 그 안에 어떤 온기도 섞여 있지 않았다. 교실 안의 소음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몇몇은 재빨리 시선을 돌려 각자의 자리로 고개를 숙였고, 몇몇은 여전히 흥미로운 눈빛으로 서린과 태오를 번갈아 쳐다봤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그녀가 천천히 자리로 걸어오며 물었다. 걸음걸이는 서두르지 않았지만, 그 느린 속도 자체가 오히려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아, 서린아, 그냥 궁금해서." 태오가 웃음기를 남긴 채 뒤로 물러섰다. 손바닥을 슬쩍 들어 보이며, 별일 아니라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둘이 진짜 연애하는 거 맞는지." 서린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도현의 옆자리에 앉으며, 그의 팔을 아무렇지 않게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도현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었다. 손끝의 온기가 팔을 타고 스며드는 것 같았다. "연애 맞아." 서린이 태오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근데 그게 너한테 왜 그렇게 중요한지 모르겠네." 교실이 순간적으로 조용해졌다. 태오의 웃음이 서서히 굳어가는 걸, 도현은 옆에서 지켜봤다. 그 웃음이 무너지는 속도가, 방금 전 도현을 향해 쏟아졌던 웃음소리의 속도와는 정반대로 느리게 느껴졌다. "그냐." 태오가 짧게 말하며 시선을 돌렸다. 더 이상 놀림거리를 찾을 수 없다는 듯, 그는 몸을 돌려 자리로 돌아갔다. 그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 우진은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쪽으로는 돌아오지 않았다. 서린은 도현의 팔을 놓지 않은 채 잠시 그대로 있었다. 그 온도가, 그 무게가, 도현에게는 낯설었다. 손가락 하나하나의 위치까지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괜찮아?" 그녀가 물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건조했지만, 그 안에 아주 조금의 다른 결이 섞여 있었다. 도현은 그 결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도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팔을 붙잡은 그녀의 손을 바라볼 뿐이었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빛이 그녀의 손등 위에 얇게 걸쳐 있었고, 그 빛의 경계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교실 안은 다시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몇몇은 급식실 이야기를, 몇몇은 오후 수업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치 방금 전 일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 시간은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도현은 알았다.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걸. 태오의 웃음이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 잠시 접혔을 뿐이라는 걸, 그리고 그 접힌 웃음이 언제 다시 펼쳐질지 아무도 모른다는 걸. 서린이 자리에서 손을 떼며 자신의 가방을 뒤적였다. 그 짧은 순간, 도현은 그녀의 옆얼굴을 몰래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멀리서, 우진이 아주 잠깐 이쪽을 돌아봤다가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현은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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