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빗길이었다. 신호는 분명 파란불이었고, 나는 우산도 없이 편의점 야식을 사러 가는 길이었을 뿐인데, 트럭 헤드라이트가 시야 전체를 하얗게 집어삼키던 그 순간까지도 나는 그게 내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 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빗방울이 우산도 없는 어깨를 두드리던 그 소리, 편의점 삼각김밥이랑 컵라면 하나 사려고 나선 길에서 내가 확인한 건 딱 두 가지였다. 신호등은 파란불. 좌우엔 차 없음. 그것만 확인하고 발을 뗀 게 잘못이었을까. 아니, 잘못이 아니었다. 그냥 재수가 없었다.
쾅.
짧고 건조한 소리 하나로 26년 인생이 요약되는 기분은, 겪어본 사람만 안다. 통증조차 느낄 새가 없었다는 게 더 억울했다. 아프기라도 했으면 마지막으로 뭔가 느꼈다는 위안이라도 있었을 텐데.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낯선 천장을 보고 있었다. 하얀 형광등, 칠판 냄새가 은은하게 섞인 공기, 등 뒤로 딱딱한 나무 의자의 감촉까지. 여기가 병실이 아니라 교실이라는 걸 인지하는 데 나는 정확히 3초가 걸렸고,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확인하는 데는 그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금발.
180은 훌쩍 넘어 보이는 키에, 인상은 흡사 조상신이 인생 초반부터 포기해 버린 사람처럼 험악했다. 눈썹 사이엔 흉터가 하나, 입술 옆엔 또 다른 흉터가 하나. 손등에도 뭔가에 긁힌 흔적이 자잘하게 남아 있었고, 교복 셔츠 단추는 위에서 세 개가 풀려 있었다. 누가 봐도 모범생은 아니었다.
손이 떨렸다. 내 손인데, 내 손이 아니었다.
교복 재킷 안주머니에서 꺼낸 학생증에는 또렷한 글자로 이름이 박혀 있었다.
이도현.
내 이름과 똑같았다. 이 우연에 감탄할 새도 없이, 머릿속으로 낯선 기억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한성고등학교 2학년, 불량 서클의 정점, 담배와 싸움과 삥땅으로 이름을 날리던 놈. 정학 두 번, 근신 세 번, 생활기록부에 적힌 담당 교사의 필체까지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 기억의 파편들 사이에서, 나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단어 하나를 발견했다.
게임.
정확히는, 내가 죽기 전 밤새워 하던 그 성인 게임의 제목이었다. '나의 하렘 히로인들이 어느새 다른 남자에게 NTR당하고 있었다'. 씨발, 이 무슨 저주받은 타이틀이람, 하고 킬킬거리며 스킵하던 그 텍스트들이 지금 이 순간 내 뇌를 관통하고 있었다.
주인공 강민준. 귀가부 소속의 평범한 남학생. 사교성 하나로 어느새 히로인 네 명과 동시에 플래그를 쌓아 올리는, 하렘 게임 특유의 그 뻔뻔한 주인공.
이나은. 강민준의 유년기 친구, 보브머리에 통통한 체형, 가장 안전한 루트로 불리던 히로인. 게임 내에서는 오프닝부터 등장해 매 챕터 존재감을 뿌리는, 소위 정통 소꿉친구 캐릭터였다.
윤채영. 도서실의 오타쿠 소녀, 앞머리로 얼굴을 가린 그 밑에 숨겨진 게 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3챕터에서 앞머리를 넘기는 CG 하나 보려고 몇 시간을 스킵 없이 견뎠던 기억까지 생생했다.
한다솔. 육상부의 태양 같은 존재, 밝고 적극적인 성격의 갈색 피부 소녀. 이 게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히로인이었고, 동시에 배드 엔딩 루트에서 가장 먼저 파국을 맞는 캐릭터였다.
서지원. 학생회장, 3학년, 정의감으로 무장한 장신의 히로인. 원칙과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성격 탓에, 역설적으로 타락 루트에서는 가장 처참하게 무너지는 캐릭터로 유명했다.
그리고 나. 이도현. 이 게임에서 나는 조연도 아니었다. 배드 엔딩의 트리거였다.
각 히로인이 강민준과의 플래그를 일정 수치 이상 쌓지 못하면, 나는 시나리오상 정해진 순서대로 그들에게 접근했다. 위협하고, 회유하고, 약점을 잡아 끝내 침대로 끌어들이는, 게임의 그 유명한 배드 엔딩 - 통칭 '타락 루트'의 실행자.
첫 번째, 한다솔. 두 번째, 윤채영. 세 번째, 이나은. 네 번째, 서지원.
스킵하던 텍스트 하나하나가 이제는 내 심장을 후벼 파는 예언서였다.
손끝이 떨렸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마른침을 삼켰는데 목구멍이 바짝 말라 있어서 침조차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지금 그 파국의 시나리오 안에, 그 시나리오를 실행할 몸으로 던져진 것이었다.
미친놈, 이게 무슨 인과율의 억까야.
죽어서 벌 받는다는 게 이런 건가. 트럭에 치여 죽은 것도 억울한데, 하필 던져진 몸이 성인 게임 배드 엔딩 담당 빌런이라니. 백과사전 한 권을 써도 설명 안 될 불운의 계보였다.
나는 교실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운동장에서 육상부가 훈련하고 있었고, 그 무리 중 갈색 피부의 여학생 하나가 유난히 밝게 웃고 있었다. 트랙을 도는 그 애의 걸음걸이는 가볍다 못해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였고, 웃음소리는 3층 교실까지 은근하게 들려올 정도였다.
한다솔. 게임 속 CG로만 보던 얼굴이 실제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CG에서는 배경 처리된 조연들 웃음소리조차 없었는데, 실제로 보니 저 애 주변엔 늘 사람이 몰려 있었다. 옆에서 물병을 던져주는 동기, 코치의 잔소리에도 웃으며 손 흔드는 여유까지, 화면 밖에서는 이렇게나 생생한 사람이었구나 싶어서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저 웃음이 언젠가 사라질 걸 알고 있었다. 시나리오대로면, 저 애는 3화 즈음에서 이미 벼랑 끝에 서 있어야 했다. 육상부 활동 정지, 집안 사정 악화, 그리고 그 틈을 타 접근하는 나. 이도현.
속이 뒤틀렸다. 게임을 할 때는 그저 텍스트였다. 스킵 버튼 하나로 넘어가던 몇 줄의 대화였다. 그런데 지금은, 저 웃음소리가 실제로 내 고막을 때리고 있었다.
막아야 한다.
결심은 쉬웠다. 문제는 방법이었다. 게임 지식만으로 현실의 인간을, 그것도 나 같은 놈이 어떻게 구원한단 말인가. 나는 심지어 이 게임의 '가해자 역할'로 캐스팅된 몸이었다. 얼굴만 봐도 사람들이 지갑을 움켜쥐고 도망갈 것 같은 인상에, 뒤로는 정학과 근신 기록이 줄줄이 붙어 있는 놈.
조상신도 참, 하필 이딴 배역을.
내가 강민준이었다면 좀 나았을까. 사교성 만렙, 인기 만렙, 히로인들이 알아서 다가오는 그 편한 주인공 자리였다면. 아니, 그건 또 재미없었겠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최소한 저 애들이 파국을 맞는 것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나.
머릿속으로 시나리오 순서를 다시 곱씹었다. 한다솔이 가장 먼저. 그다음 윤채영. 그다음 이나은. 그다음 서지원. 순서를 아는 것만으로도 뭔가는 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근거 없는 확신을 다졌다.
그때 교실 문이 벌컥 열렸다. 담임인지 뭔지 하는 남자가 출석부를 든 채 들어오며 소리쳤다.
"이도현, 오늘도 지각 직전이었다며? 정신 좀 차려라 임마."
목소리가 우렁차다 못해 교실 전체를 뒤흔들 정도였다. 남자는 출석부로 교탁을 두어 번 탁탁 내려치며 나를 쏘아보았고, 반 아이들 몇몇이 킥킥거리며 내 쪽을 힐끔거렸다. 그 시선들 속에서 나는 뭐라도 대답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침묵을 지켜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도현이라면, 원래의 이도현이라면 이 상황에서 뭐라고 했을까.
"…네."
간신히 짜낸 대답은 짧고 무뚝뚝했는데, 담임은 그마저도 익숙한 듯 별다른 반응 없이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사이 다시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한다솔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나는 아직 이 세계의 '이도현'이 어떤 놈이었는지 절반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내 뒷자리에 앉은 여학생이, 창백한 얼굴로 나를 힐끔거리며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는 사실도, 그때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담임의 목소리가 다음 이름을 불렀고, 교실 안 공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하게 흘러갔다. 나만 몰랐다. 이 평온함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지, 그리고 내 뒤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던 그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