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서지원이 나를 데려간 곳은 학생회실 바로 옆의 작은 상담실이었다. 상담실이라고 해봤자 책상 하나와 의자 두 개, 그리고 누군가 기증했다가 아무도 안 읽는 게 뻔한 진로 서적 몇 권이 꽂힌 책장이 전부인 좁은 공간이었지만, 문을 닫는 순간 공기가 확 달라졌다. 서지원이 팔짱을 풀고 창가에 서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을 때, 나는 반사적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먼저 말해.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지."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학생회장 특유의, 상대를 눌러 앉히는 듣기 좋은데 무서운 그 톤. 나는 잠시 침묵했다. 여기서 거짓말로 대충 넘어갈 수도 있었다. 우연히 들었다고, 누가 소문을 흘렸다고. 하지만 서지원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그 계산이 전부 무너졌다. 저 여자는 지금 내 눈동자 움직임 하나까지 스캔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도 안 믿을 거예요."
"믿을지 안 믿을지는 내가 정해."
말이 짧고 정확했다. 반박할 틈을 주지 않는 화법이었다. 나는 속으로 욕을 한 바가지 퍼부으면서도 결국 절반쯤의 진실을 꺼냈다. 전생이라는 단어는 당연히 쓰지 않았다. 대신 어떤 계기로 인해 이 학교에서 벌어질 일들을 미리 알게 됐다고, 그리고 그 지식 속에서 한다솔이 위험한 상황에 놓인다는 걸 알았다고 얼버무렸다. 말하는 내 목소리가 스스로 듣기에도 헛소리 같았다.
서지원은 한참을 침묵했다. 상담실 안의 벽시계 초침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그러다 그녀가 짧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는 콧방귀에 가까운, 냉소적인 소리였다.
"미친 소리네."
"믿기 힘든 거 알아요."
"근데."
그녀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운동장에서 육상부가 훈련하는 소리, 호루라기 소리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거 말고도 이상한 게 있었어. 다솔이가 요즘 나한테도 뭔가 숨기는 게 있어. 육상부 훈련 끝나고도 계속 늦게 오고, 폰을 손에서 안 놔. 알림이 뜨면 화들짝 놀라서 숨기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서지원이 이미 뭔가를 눈치채고 있었다는 사실, 이건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빠른 전개였다. 게임 원작에서는 이 시점까지 서지원이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었는데. 이 세계는 원작과 완전히 똑같지도, 완전히 다르지도 않았다. 그게 제일 무서운 부분이었다.
"그 선배 이름 알아요?" 내가 물었다.
"육상부 3학년, 이름은... 나도 정확히는 몰라. 근데 걔가 다솔이한테 유독 붙어 있는 건 나도 봤어. 훈련 끝나고 일부러 기다리고 있다가 같이 걸어가는 것도 몇 번 봤고."
목격담이 늘어날수록 상황의 무게가 실감났다. 이건 더 이상 내 머릿속에만 있는 정보가 아니었다. 현실에서 이미 진행 중인 사건이었다.
"협력할래요?" 나는 최대한 담백하게 물었다. 목소리에 힘이 실리지 않게, 최대한 사무적으로. "저도 혼자서는 못 해요. 학교에서 제 평판이 어떤지 아시잖아요."
이 말을 하는 순간 자존심이 살짝 긁혔지만 사실이었다. 이도현이라는 이름 세 글자에는 이미 온갖 부정적인 이미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문제아, 반항아,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는 존재감. 그런 놈이 갑자기 후배 걱정한다고 나서면 누가 곱게 봐줄까.
서지원은 오랫동안 나를 훑어보았다.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마치 이력서를 검증하는 면접관 같은 눈빛이었다. 그 시선에는 여전히 의심이 가득했지만, 그 밑바닥에는 확실히 걱정도 섞여 있었다. 다솔이를 향한 진짜 걱정.
"조건이 있어." 그녀가 말했다. "네가 뭘 알고 있는지 계속 나한테 공유해. 숨기는 거 있으면 바로 손 뗄 거야."
"알겠어요."
"그리고 다솔이한테 손끝 하나 대지 마. 네 평판 알아서, 네가 직접 다가가면 오히려 걔가 더 위축될 거야."
합리적인 조건이었다. 오히려 내가 먼저 제안했어야 할 조건들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나 더." 서지원이 덧붙였다. "만약 이게 다 헛소리였다는 게 밝혀지면, 나 진짜 학생회 이름으로 너 조치 취할 거야. 장난 아니야."
"장난 아닌 거 아는데요."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 여자는 협박도 사무적으로 하는구나.
그날부터 서지원과 나는 은밀한 정보 공유를 시작했다. 메신저로 매일 다솔이의 동태를 주고받았고, 나는 최소한의 정보만 흘리면서 최대한 많은 걸 캐내려 했다. 서지원은 그런 내 계산을 눈치채면서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아마 자기도 나를 이용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일 거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이나은 루트에서 작게나마 손을 쓸 기회를 발견했다.
게임 기억 속, 이나은은 조만간 도서실에서 실수로 강민준의 노트를 잃어버리는 이벤트를 겪는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급하게 책을 빌리러 갔다가 사물함을 헷갈려서, 강민준이 맡겨둔 노트를 자기 것인 줄 알고 가져가는 실수. 그 사건으로 강민준과 다투게 되고, 그 틀어짐이 나중에 채영 루트로 강민준의 마음이 기우는 트리거가 된다는 걸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원작 공략집에서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른다. 이 지점이 바로 강민준 루트의 최대 분기점이었으니까.
나는 도서실 사물함 관리를 맡은 후배에게 슬쩍 부탁했다. 별거 아닌 척, 지나가는 말투로.
"야, 거기 사물함 번호 좀 정리해줄 수 있냐? 헷갈리는 애들 많더라."
후배는 별 의심 없이 그러겠다고 했다. 나는 그 틈에 이나은의 노트가 사라지기 전 미리 안전한 곳에 옮겨두게 했다. 대단한 개입은 아니었다. 그저 사물함 자물쇠 번호를 하나 알려주는 정도. 이 정도로 미래가 바뀔까 반신반의했지만, 안 해서 손해 볼 건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 노트 분실 이벤트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도서실을 지나가다 우연히 강민준과 이나은이 나란히 앉아 웃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 나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걸 느꼈다. 이나은과 강민준의 관계는 예전 그대로 평온했다.
내 지식이 이 세계에서 유효하다는 첫 확인이었다.
조상신이 완전히 나를 버린 건 아니었나 보다.
그 순간의 기분은 뭐라 설명하기 힘들었다. 마치 오랫동안 고장 났다고 생각했던 리모컨의 배터리를 갈았더니 갑자기 작동하는 걸 본 느낌. 내가 진짜로 뭔가를 바꿀 수 있다는 확신, 그 확신이 주는 묘한 흥분과 안도.
하지만 안도의 여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날 오후, 수업이 끝나고 가방을 챙기고 있는데 서지원이 급하게 나를 찾아왔다. 복도를 뛰어온 게 분명한 걸음걸이, 숨이 살짝 가빠 있었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도현. 채영이 쪽에서 이상한 일이 생겼어."
"뭔데요?"
나는 가방을 어깨에 걸치던 손을 멈췄다.
"어젯밤에 걔 SNS 계정에 이상한 팔로워가 붙었대. 근데 그 계정이..."
서지원이 잠시 말을 멈췄다. 마치 그 다음 문장을 뱉는 것 자체가 두려운 것처럼.
"얼마 전 다솔이한테 이상하게 붙어있던 그 선배 계정이랑 팔로우 목록이 겹쳐."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그 말을 곱씹는 데 몇 초가 걸렸다. 팔로우 목록이 겹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머릿속에서 계산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육상부 선배 하나가 한다솔한테 붙어 있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선배가 채영이한테도 접근하고 있다면, 이건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나은 쪽 위험을 하나 지웠다고 안심하는 사이, 다른 히로인 쪽에서 새로운 그림자가 슬며시 다가오고 있었다.
"그 계정, 진짜 그 선배 맞아요?"
"확실하진 않아. 근데 프로필 사진이 육상부 단체사진에서 크롭한 거였어. 얼굴 반쪽만 나오게."
일부러 신원을 숨기려는 계정이었다. 그런 짓을 왜 굳이 하는가. 정상적인 관계라면 그럴 이유가 없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서늘한 감각이 점점 확신으로 굳어갔다.
원작 게임에는 없던 전개였다.
나는 분명 이 학교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대부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처음 보는 그림자였다. 한다솔과 관련된 위험 요소가 채영이 쪽까지 뻗어 있다는 건, 내가 알던 시나리오 밖의 변수가 이미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서지원."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그 계정 팔로우 목록에, 다른 애들도 있어요?"
서지원의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렸다.
"그게... 지금 확인하는 중인데."
그녀가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세 명 더 있어."
세 명.
나는 그 숫자를 듣는 순간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조상신은 나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을지 몰라도, 확실히 여유를 주고 있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