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그날 옥상 계단 아래에서 목격한 장면은 하루가 지나도록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한다솔의 표정. 밝고 적극적이라던, 게임 설정 그대로의 그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지던 순간. 눈동자가 흔들리고, 입꼬리가 아래로 처지고, 목덜미까지 핏기가 가시던 그 몇 초. 그건 단순한 놀람이나 부끄러움이 아니었다. 나는 심리학자도 아니었지만, 그 얼굴이 뭘 뜻하는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공포였다.
밤새 뒤척이며 나는 그 장면을 몇 번이고 되짚었다. 계단 아래 그늘, 육상부 선배의 등, 그 등에 반쯤 가려진 한다솔의 어깨. 아무리 각도를 바꿔서 떠올려봐도 결론은 같았다. 저건 연애 서사의 시작 같은 게 아니었다.
게임 텍스트를 뒤져봐도 이런 장면은 없었다. 회귀 전, 아니, 정확히는 이 몸에 들어오기 전에 수백 번은 돌려봤던 시나리오 파일을 머릿속으로 다시 펼쳤다. 한다솔 루트의 배드 엔딩은 내가 - 정확히는 이 몸의 원래 주인이었던 이도현이 - 직접 그녀에게 접근해서 트리거되는 것이었고, 그건 아직 시나리오상 한참 뒤의 이벤트였다. 스틸컷 하나, 대사 한 줄까지 외우고 있는 나였다. 없었다. 그런 장면은 정말로,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눈앞에서 벌어지는 건 그것과 무관한, 전혀 다른 종류의 위협이었다.
정말 우연일까?
나는 사흘 내내 한다솔의 동선을 관찰했다. 수업이 끝나면 운동장 구석에서 스트레칭하는 그녀를 먼 곳에서 지켜보고, 육상부 훈련 시간이 다가오면 체육관 뒤편 벤치에 앉아 스마트폰을 보는 척하며 곁눈질했다. 스토커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첫째 날. 훈련이 끝나고도 그녀는 남았다. 육상부 선배 - 3학년, 이름은 아직 모른다 - 와 함께. 다른 부원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둘 자리를 떴다. 그 타이밍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부자연스러웠다.
둘째 날. 똑같았다. 훈련장 조명이 꺼지고 남은 두 사람의 그림자만 길게 늘어졌다. 한다솔의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그 웃음소리에는 미묘한 균열이 있었다. 진짜 웃음과 가짜 웃음을 구분하는 데는 재능이 필요 없었다. 그냥 들으면 알았다.
셋째 날. 옥상 계단 아래에서 그 장면을 목격했다.
한다솔의 웃음은 여전히 밝았지만, 그 웃음 뒤에 숨은 미세한 떨림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 시선이 자꾸만 바닥을 향하는 것, 그 선배가 다가오면 어깨가 눈에 띄게 움츠러드는 것. 마치 몸이 먼저 반응하고 머리가 그걸 억지로 웃음으로 덮어씌우는 것 같았다.
이건 게임의 문제가 아니다. 현실의 문제였다.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계속 울렸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과, 내가 나설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동시에 부딪혔다. 하지만 나는 이 세계에서 아직 아무런 신뢰도, 관계도 쌓지 못한 이방인이었다. 게다가 '이도현'이라는 이름은 이 학교 전체에서 이미 위험 인물로 낙인 찍혀 있었다. 복도에서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아이들이 슬쩍 시선을 피하는 이름. 선생들조차 내 이름이 나오면 미묘하게 표정을 굳히는 이름.
내가 나선다고 해서 누가 내 말을 들어줄까.
만약 내가 직접 그 선배 앞에 가서 "그거 그만두세요"라고 말한다면? 상상만 해도 결과가 뻔했다. 오히려 내가 이상한 놈으로 몰리고, 한다솔은 더 조심스러워지고, 상황은 더 나빠질 게 분명했다. 이도현이라는 이름값이 여기서는 마이너스 백만 포인트짜리 신용도였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서지원. 학생회장, 정의감으로 무장한 3학년. 강민준을 돕던 히로인이자, 이 학교에서 가장 신뢰받는 인물. 게임 속에서도 부조리를 보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는 캐릭터였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라면, 지금 내가 가진 카드 중 이보다 나은 패는 없었다.
방과 후, 나는 학생회실 문을 두드렸다. 손끝이 살짝 떨렸다. 문을 두드리는 그 짧은 순간에도 오만 가지 시나리오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문전박대당하는 그림, 경찰에 신고당하는 그림, "네가 뭔데" 소리를 듣는 그림.
"누구..." 문을 연 서지원의 눈이 순간 커졌다. 포니테일로 넘긴 머리, 170센티가 훌쩍 넘는 키, 나를 내려다보는 것도 아닌데 묘하게 압도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교복 위에 걸친 학생회 조끼조차 그녀에게는 갑옷처럼 보였다. "이도현? 네가 여긴 왜."
목소리에 놀람과 경계가 반쯤씩 섞여 있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도현이 학생회실에 제 발로 찾아온다는 건, 이 학교 기준으로는 태양이 서쪽에서 뜨는 것과 비슷한 사건일 테니까.
"할 말이 있어서요." 나는 최대한 진지하게 말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배에 힘을 줬다.
"네가 나한테 할 말이 있다는 게 더 이상한데."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문틀에 기대섰다. 눈매가 가늘어졌다. 상대를 위아래로 재는 듯한, 정확히는 상대의 진심을 재는 듯한 시선이었다. "용건만 말해."
나는 잠시 고민했다. 진실을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전생, 게임, 시나리오, 전부 말하면 미친놈으로 취급받고 끝날 게 뻔했다. 정신병원에 실려가는 엔딩까지도 상상이 됐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압축해서 말했다.
"저...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말을 고르느라 잠깐 멈췄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저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요. 정확히 어떻게 아는지는 저도 설명이 안 되는데, 한다솔이 위험해요."
서지원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그건 의심도 아니고 놀람도 아니었다. 뭔가 훨씬 더 무거운, 뭔가 훨씬 더 날카로운 감정이 그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 표정을 정확히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랐지만, 확실한 건 그녀가 이미 뭔가를 알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뭘 알고 있는데." 목소리가 낮아졌다. 팔짱을 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한다솔이 최근에 이상해요. 육상부 선배랑 있을 때마다 겁먹은 표정을 지어요." 나는 사흘간 관찰한 것들을 최대한 담담하게 나열했다. "훈련 끝나고 항상 그 선배랑 늦게까지 남고, 그때마다 다른 부원들은 이상하게 자리를 비워요. 손끝이 떨리고, 시선을 못 맞추고, 선배가 다가오면 몸이 움츠러들어요."
한 마디씩 던질 때마다 서지원의 얼굴에서 핏기가 조금씩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마치 내가 하는 말이 이미 알고 있던 어떤 그림에 조각조각 들어맞고 있는 것처럼.
서지원은 한동안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얼마나 오래 이어졌는지, 나는 등에 식은땀이 흥건히 배는 걸 느꼈다. 몇 초였는지, 몇십 초였는지, 시간 감각이 뭉개질 정도의 침묵이었다.
"...따라와." 그녀가 문을 열고 나서며 말했다. 그 짧은 한마디에 담긴 무게가 심상치 않았다. "둘이 얘기할 곳이 필요해."
학생회실을 나서는 그녀의 등을 보며,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다. 등을 보이며 걷는 그녀의 발걸음은 지나치게 빨랐고, 지나치게 단호했다. 저건 단순히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걸음이 아니었다.
이 여자는 이미 뭔가를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게 뭔지 아직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