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하렘엔딩만은 막기로 했다

5화

윤채영의 SNS 팔로워 문제는 일단 서지원이 조용히 지켜보기로 하고, 우리는 더 급한 불부터 끄기로 했다. 한다솔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게임 - 아니, 이제는 게임이 아니라 내 현실이 되어버린 이 세계 - 에서 한다솔이라는 캐릭터의 서브 시나리오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서브 히로인 취급도 못 받는, 이름도 없이 지나가는 조연 중 하나였을 거다. 그런데 그 조연의 삶에 지금 내가 발을 들이밀고 있었다. 인과율이 억까를 부린다는 게 이런 걸까. 서지원이 파악한 정보는 이랬다. 그 육상부 선배 - 3학년, 이름은 나중에야 확인했지만 여기선 그냥 '선배'라고만 부르기로 하자 - 는 최근 몇 주간 훈련이 끝난 뒤 한다솔을 개인적으로 붙잡아 두는 일이 잦아졌고, 강수아를 통해 흘러나온 얘기로는 다솔이 최근 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알림에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이었다. 강수아는 강민준의 동생이자 한다솔의 친한 친구였는데, 우리 정보망에 은근슬쩍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강수아 본인은 자신이 정보원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전혀 몰랐다. 그냥 오빠 친구인 서지원한테 이런저런 얘기를 흘리다가, 그게 나한테까지 전달되는 구조였을 뿐. "수아가 그러는데," 서지원이 급식실 구석 자리에서 식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솔이가 요즘 카톡 알림만 와도 화들짝 놀란대. 그리고 폰 화면 절대 안 보여준다고." "전형적인 증상이네." "뭐가." "뭔가 감추고 있다는 거." 서지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나는 젓가락으로 반찬을 뒤적이며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첫 번째, 선배가 훈련 후 다솔을 붙잡는다. 두 번째, 다솔이 폰에 예민해졌다. 세 번째, 다솔은 이 상황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세 가지를 합치면 답은 하나였다. "직접 부딪혀보는 게 어때." 나는 서지원에게 말했다. "부딪혀서 뭐. 증거도 없이 시비 걸면 오히려 다솔이가 더 힘들어져." 서지원이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네가 나서면 오히려 걔한테 불똥 튈 수도 있어." "그럼 견제만." 나는 게임 속 이도현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처음으로 제대로 이용해보고 싶어진 그 위협적인 평판을 떠올렸다. "제가 그 선배 앞에 얼쩡거리기만 해도 충분할 거예요. 이 학교에서 제 얼굴이 어떤 의미인지 아시잖아요." 서지원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한 번만이야. 괜히 일 크게 만들지 말고." "압니다, 선배." 다음 날 방과 후, 운동장 트랙 옆 벤치. 하늘은 이상하게 맑았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랬는데, 그 파란색이 자꾸 눈에 들어와서 짜증이 났다. 이런 날씨에 이런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게 우습기도 했고. 육상부 훈련이 끝나갈 무렵, 나는 일부러 눈에 띄게 서서 담배 - 사실은 피우지도 않는 그냥 문 담배 하나 - 를 들고 그쪽을 응시했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이 담배를 무는 습관이 있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학교 애들 사이에서 이도현이 이렇게 서 있으면 무슨 의미인지는 다들 알았다. 트랙을 도는 애들이 하나둘 나를 발견하고 흠칫하는 게 눈에 보였다. 몇몇은 눈을 피하며 속도를 올렸고, 몇몇은 아예 다른 방향으로 돌았다. 효과는 확실했다. 씨발, 이 얼굴이 이런 데 쓸모가 있을 줄이야. 선배는 훈련이 끝나자 늘 그렇듯 한다솔을 붙잡으려 했다. 손을 뻗어 다솔의 어깨를 잡으려던 그 순간, 내 시선을 느낀 듯 그가 움찔하며 걸음을 멈췄다. 체격은 나보다 컸다. 어깨도 넓고 팔뚝도 단단했다. 하지만 이 학교에서 '이도현'이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는 체격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게 억울하다면 억울했지만, 지금은 그 억울함이 다솔에게 도움이 되고 있었다. "뭐야, 저 새끼." 선배가 작게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한다솔이 이 틈을 타 서지원 쪽으로 걸어왔다. 걸음이 빨랐다. 도망치듯. 서지원은 자연스럽게 다솔의 팔을 잡고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다솔의 어깨가 살짝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작은 승리였다. 겨우 그 정도로 뭐가 해결되겠냐고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날 처음으로 이 몸에 심어진 '위협적인 존재감'이라는 저주 같은 설정이 쓸모 있다는 걸 느꼈다. 데뷔 이래 처음으로 이 얼굴에 감사한 순간이었다. 그날 밤, 서지원에게 메시지가 왔다. [서지원] 오늘 고마워. [서지원] 다솔이 표정이 좀 편해졌더라. [나] 이 정도로 끝나면 좋겠는데요. [서지원] 그러게. 근데 이게 근본적인 해결은 아니잖아. [나] 알아요. 알고 있었다. 이건 임시방편이었다. 상처에 밴드 하나 붙인 정도. 진짜 문제는 여전히 그 선배의 손에, 그리고 다솔의 폰 안에 있었다. 정말 이걸로 끝날까? 끝날 리 없었다. 다음 날, 나는 복도에서 그 선배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3층 복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 햇살이 바닥에 긴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다음 수업 교재를 챙기러 가는 길이었고, 그는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거리가 좁혀지자 그가 먼저 멈춰 섰다. "야, 이도현." 그가 먼저 말을 걸었다. 목소리에 웃음기가 있었는데, 그 웃음이 유독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웃지 않는, 딱 그런 얼굴이었다. "요즘 왜 이렇게 얼쩡거려?" "신경 쓰지 마세요." 나는 최대한 무심하게 답했다.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도록 신경 써야 했다. 상대는 나보다 한 학년 위였고, 체격도 컸고, 무엇보다 나는 지금 이 세계의 규칙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다솔이한테 관심 있냐? 어울리지도 않는데 웬 착한 척." 그가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가려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뒤돌았다. 그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직감이었다. "근데 말이야." 그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아주 천천히, 확신에 찬 표정으로. "내가 이미 뭘 갖고 있는지 알면, 너도 함부로 못 나설걸."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슨 소리예요." 내 목소리가 예상보다 낮게 나왔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글쎄, 나중에 알게 될 거야." 그는 낮게 웃으며 손끝으로 자신의 폰을 툭툭 두드렸다. 딱, 딱, 두 번. 그 동작 하나에 담긴 의미를 나는 온몸으로 직감했다. 사진. 그 새끼는 이미 뭔가를 손에 쥐고 있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가, 곧바로 온갖 최악의 상상들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그 뭔가가 무엇인지, 나는 게임 시나리오 어디에도 없던 그 정보를 그제야 몸으로 깨달았다. 이건 게임의 배드 엔딩 트리거가 아니었다.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의 범죄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선배는 이미 자리를 떠나고 있었지만, 나는 손끝이 떨리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복도를 지나가는 애들의 웅성거림도, 수업 종이 울리는 소리도 전부 멀게만 들렸다. 서지원에게 당장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하지만 그전에, 나는 한다솔의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옥상 계단 아래에서 봤던, 웃음기가 사라진 그 얼굴. 어깨를 움츠리고,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그 표정. 그 애는 이미,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못한 채, 얼마나 오랫동안 그 공포를 혼자 견디고 있었던 걸까.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아직 몰랐다. 그 선배의 폰 안에 있는 것이 사진 한 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이 이미 다른 누군가의 손에까지 넘어가 있다는 사실을.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