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토요일 오후 두 시. 김도준은 방문 앞에서 세 번째로 옷매무새를 고쳤다.
검은 후드에 청바지.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차림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거울 앞에 서서 후드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렸다가, 다시 반쯤 내렸다가, 결국 중간 어디쯤으로 어정쩡하게 놔둔 채 돌아섰다. 1년 넘게 게임 속에서만 알고 지낸 사람을, 오늘 처음으로 실제로 만나는 날이었다.
'짱형.'
도준의 게임 아이디는 '설야'였다. 길드 랭킹 3위, 만년 야행성 유저. 그리고 짱형은 늘 그 옆자리를 지키던 길드원이었다. 새벽 두 시, 세 시까지도 접속해 있던 사람. 도준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을 때마다, 대인관계에 서툴다고 자책할 때마다, 짱형은 늘 무뚝뚝하지만 다정한 조언을 건네주었다.
— 그런 애들은 신경 쓸 필요 없어. 니가 잘못한 거 하나도 없다.
음성 채팅으로 들려오던 그 말투. 낮고 담담했지만, 그 안에 묘한 온기가 있었다. 도준은 그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마흔 줄 넘은 억센 아저씨일 거라고 도준은 확신했다. 말투도 그렇고, 게임 실력도 그렇고, 어딘가 연륜이 느껴지는 사람이었으니까. 사냥터에서 도준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순식간에 나타나 몹을 정리해주던 손놀림도 그랬다. 그래서 '짱형'이라는 이름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짱 센 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오늘 그 짱형이 먼저 제안했다. 동네에 카페를 새로 냈다고, 한번 놀러 오라고. 도준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설렜다. 실제로 만나면 뭘 물어볼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밤새 상상했을 정도였다. 어쩌면 게임 얘기만 하다가 서먹해질까 봐, 미리 할 말도 몇 개 정리해뒀다. 그중 하나는 '실물로 뵈니까 더 짱형 같으시네요' 같은,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인사말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골목을 두 번 꺾어 들어가는 동안, 도준의 심장은 계속 이상한 박자로 뛰었다. 마치 시험 결과를 보러 가는 사람처럼.
달빛카페.
간판을 확인하고 도준은 문 앞에 섰다. 유리문에 붙은 조명이 노란빛으로 은은하게 번져 있었다. 간판 옆에 작게 그려진 초승달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었다.
딸랑.
문을 밀자 종소리가 울렸다. 공기는 원두 향으로 가득했다. 낮은 재즈 음악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도준은 두리번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손님은 몇 명 없었다. 창가 자리 커플, 구석에서 노트북을 보는 사람. 그리고 카운터.
카운터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본 순간, 도준의 발이 멈췄다.
서른 즈음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앞머리를 가볍게 넘긴 단발, 하얀 셔츠에 커피색 앞치마. 화장은 옅었지만 눈매가 또렷했다. 웃는 얼굴이 이상하게 낯익었다. 손목에 걸린 얇은 은색 시계가 조명에 반짝였다.
'예쁘다...'
생각이 먼저 튀어나왔다. 도준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여긴 짱형을 만나러 온 곳이었다. 이 여자는 그냥 카페 주인이겠지. 도준은 어색하게 카운터로 다가갔다. 발걸음이 괜히 조심스러워졌다. 손바닥이 벌써부터 미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 어서 오세요.
여자가 웃으며 인사했다. 도준은 목소리를 가늠하다가 문득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들어본 적 있는 억양이었다. 게임 속에서, 음성 채팅으로. 낮게 깔리는 그 톤. 어미를 짧게 끊는 습관까지도.
'설마.'
도준은 자기 생각을 스스로 밀어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목소리가 비슷한 사람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으니까.
— 저, 사람을 좀 기다리고 있는데요. 여기서 만나기로 했어서...
말을 하면서도 도준의 시선은 자꾸 여자의 얼굴을 훔쳐보고 있었다. 어딘가 낯익은데, 정확히 어디서 봤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여자의 눈이 스마트폰 화면으로 향했다. 카운터 밑에 놓인 태블릿에 익숙한 아이콘이 떠 있었다. 도준이 매일 밤 들어가는 그 게임의 로고였다.
도준의 눈동자가 그 아이콘에 못 박혔다.
— 설야 님?
순간 도준의 숨이 멎었다.
— ...예?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심장이 갑자기 빨리 뛰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뛰다가 잠깐 멈춘 것 같기도 했다. 여자가 앞치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을 돌려 보여주었다. 그 게임의 채팅창. 어제 밤 도준이 보낸 메시지가 그대로 떠 있었다. '오늘 3시에 달빛카페요. 못 알아보실까 봐 후드 입고 갈게요.'
도준은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분명 자기가 보낸 메시지였다. 오타까지 그대로였다. 잘못 볼 여지가 없었다.
여자가 손을 내밀며 웃었다.
— 안녕하세요. 짱형이에요.
도준의 손끝이 떨렸다. 머릿속이 텅 비었다. 손을 내밀어야 하는데, 그것조차 잊고 그저 여자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짱형이라니. 짱형은 아저씨였다. 억세고, 게임 잘하고, 밤새도록 사냥터를 뛰어다니던 그 사람. 도준이 학교에서 시비 붙었던 얘기를 하면 "그 새끼 이름 뭐냐, 확인해봐"라고 웃으면서 넘겨주던 사람. 그런데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말도 안 돼.'
도준은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온갖 기억들이 뒤섞였다. 짱형의 말투, 짱형이 쓰던 스킬 콤보, 짱형이 새벽마다 보내던 시답잖은 농담들. 그 모든 것이 지금 이 사람의 얼굴 위로 겹쳐지지가 않았다. 아니, 겹쳐지긴 하는데, 도준의 이성이 그걸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있었다.
— 왜, 실망했어요?
여자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 말투. 짱형이 자주 쓰던, 살짝 심드렁하면서도 다정한 그 어투였다. 도준은 겨우 입을 열었다.
— 당신이... 짱형이라고요?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카페 안의 소음이 갑자기 멀게 느껴졌다. 재즈 음악도, 커플의 소곤거림도, 원두 향도 전부 배경 밖으로 밀려난 것 같았다. 오직 카운터 너머의 저 얼굴만이 도준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여자의 웃음이 짧게 흔들렸다.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고, 손끝이 카운터 위에서 살짝 떠올랐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그 흔들림 안에, 도준은 뭔가 더 큰 것이 숨어 있다는 걸 아직 알지 못했다.
— 놀라긴 했나 보네.
여자가 낮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곤 카운터 서랍을 슬쩍 열어 뭔가를 확인하듯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도준을 마주 봤다. 그 순간 도준은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지금 이 사람의 눈빛이, 방금 전 웃던 얼굴과는 조금 다른 무게를 담고 있다는 것을. 마치 이 만남을 도준보다 훨씬 오래 준비해온 사람의 눈빛처럼.
— 앉아요. 얘기 좀 하죠, 설야 님.
도준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끼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천천히 기어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