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짱형, 알고보니 딸 가진 엄마

4화

카페 안의 정적이 길게 이어졌다.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잔에서 김이 가늘게 올라오다가 사라졌다. 손님들이 앉아 있던 자리마다 낮은 숨소리만 오갔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도준은 다은의 눈을 마주 본 채로 굳어 있었다. 심장이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목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손끝이 저릿했다. 방금 다은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하지만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냉정한 판단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이건 진심이 아니다.' 도준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다은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눈 속에는 애정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절박함. 그리고 그 절박함의 방향은 도준이 아니었다. 방금 다은의 말은 애정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엄마의 관심을 되찾기 위한, 순간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도준은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카페 안의 시계가 초침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게 유난히 크게 들렸다. 도준은 마른침을 삼켰다. — 미안해. 도준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떨렸지만, 말을 멈추지 않았다. — 나는... 받아줄 수 없어. 말을 내뱉는 순간에도 도준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게 맞는 대답인가. 하지만 다른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다은의 손을 잡아주는 건, 진짜 다은을 도와주는 게 아니었다. 다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눈동자가 흔들리다가, 곧 차갑게 식었다. — 뭐? 짧은 반문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결코 짧지 않았다. 다은의 손이 테이블 끝을 꽉 움켜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했다. — 이건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니잖아. 너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을... 나한테 하고 있어. 도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분노인지 수치심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둘 다였을 것이다. —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해. 다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다은은 그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살짝 돌렸다. — 넌 아무것도 몰라.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마나... 말이 끝맺어지지 않았다. 다은은 입술을 깨물었다.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다는 듯, 숨을 짧게 몰아쉬었다. — 됐어. 신경 꺼. 다은은 앞치마를 벗어 카운터에 내던졌다. 탁. 앞치마가 카운터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다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 문을 향해 걸어갔다. 걸음걸이가 평소보다 빠르고 거칠었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딸랑. 종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문이 닫히며 다은의 모습이 사라졌다. 문밖 골목으로 다은의 뒷모습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도준은 자리에서 일어설 뻔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문이 닫히는 유리 너머로 다은의 그림자가 사라지는 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카페 안에는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손님들의 시선이 서서히 흩어졌다. 누군가는 다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았고, 누군가는 낮은 목소리로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어떤 소리도 방금 있었던 장면의 여파를 지우지는 못했다. 소영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미안해요, 도준 씨. 소영이 낮게 사과했다. 목소리에는 미안함과 함께 짙은 피로가 섞여 있었다. 도준은 고개를 저었다. —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솔직한 말이었다. 도준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아직도 심장이 진정되지 않고 있었다. 소영은 도준의 맞은편에 다시 앉았다.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게 도준의 눈에 들어왔다. — 다은이 원래 저래요. 겉으로는 밀어내면서, 속으로는 늘 사람을 시험해요. 소영의 목소리는 낮고 느렸다. 마치 오랫동안 참아왔던 말을 이제야 꺼내는 사람처럼. —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제가 조금이라도 다른 데 신경을 쓰면, 꼭 뭔가 일을 벌였어요. 학교에서 사고를 치거나, 갑자기 아프다고 하거나... 지금은 그게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도준은 소영의 표정을 살폈다. 걱정과 미안함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오랜 시간 반복되어 온 패턴에 대한 지겨움, 혹은 자책. — 그래서... 도준 씨한테 하나만 더 부탁하고 싶어요. 도준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 다은이한테 차갑게 대해줄 수 있어요? 예상 밖의 말이었다. 도준은 되물었다. — 차갑게요? 그건 정반대잖아요. 방금 자신이 다은을 밀어낸 것도 이미 충분히 차가운 행동이었다. 그런데 소영은 그 이상을 요구하고 있었다. — 다은이는 다정하게 다가오는 사람일수록 더 밀어내요. 자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바로 도망가요. 근데 무심하게 대하는 사람한테는... 오히려 신경을 써요. 소영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 확신 뒤로, 어딘가 씁쓸한 그늘이 보였다. — 이상하게 들리는 거 알아요. 하지만 그동안 제가 겪어본 바로는, 이게 유일하게 통했던 방식이었어요. 걔 아빠도 그랬고, 예전에 사귀었던 사람들도... 다 걔가 먼저 매달리다가, 상대가 신경도 안 쓰면 그때야 겨우 마음을 열더라고요. — 저도 오랫동안 봐온 애예요. 이상한 방법인 거 아는데, 이게 유일하게 통했던 방식이었어요. 소영은 두 손을 테이블 위에 가만히 얹었다. 손등에는 옅은 주름이 보였다. 얼마나 오랜 시간 이런 순간들을 견뎌왔는지 짐작이 갔다. 도준은 소영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 담긴 건 단순한 부탁이 아니라, 오랜 시간 딸을 지켜본 엄마의 절박함이었다.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도준은 대답을 미룬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은이 사라진 골목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로등 불빛이 젖은 아스팔트 위로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방금 있었던 일이 다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다은의 흔들리던 눈동자, 갈라진 목소리, 앞치마를 내던지고 떠나던 뒷모습. 그 모든 장면이 도준의 마음 한구석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다은이 정말 그런 방식으로만 사람을 받아들인다면...' 도준은 생각을 끝맺지 못했다. 소영의 부탁을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이 다은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는 게 아닐지 두려웠다. 하지만 동시에,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답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소영은 도준의 대답을 기다리며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미안함과 기대가 동시에 담겨 있었다. 도준은 왜인지 이 부탁이, 자신을 훨씬 더 복잡한 상황으로 밀어넣을 것 같다는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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