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월요일 아침, 한빛고 2학년 3반 교실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초겨울 공기가 차가웠고, 아이들은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 주말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도준은 자리에 앉아 창밖을 보는 척했지만, 신경은 온통 뒷문 쪽으로 향해 있었다.
주말 내내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면 카페의 조명, 소영의 얼굴, 다은의 목소리가 뒤섞여 떠올랐다. 짱형이 소영이었다는 것. 그 딸이 다은이라는 것. 그리고 갑작스러운 고백과, 그보다 더 갑작스러웠던 거절.
'왜 자꾸 생각나는 거지.'
도준은 손끝으로 책상 모서리를 톡톡 두드렸다. 규칙적인 소리가 자신의 심장 소리와 겹쳐지는 것 같아서, 이내 손을 멈췄다.
종이 울리기 직전, 다은이 교실로 들어왔다.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가방을 어깨에 걸친 채 느릿한 걸음으로 들어서는 모습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하지만 도준을 발견한 순간, 눈빛이 순간적으로 날카로워졌다.
그 짧은 순간을 도준은 놓치지 않았다. 다은의 눈동자가 스치듯 도준을 훑고 지나갔고, 그 뒤로는 다시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다은은 도준의 옆자리를 지나쳐 자기 자리로 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스치듯 지나갔을 뿐인데, 그 짧은 순간의 냉기가 도준의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역시 어색하네.'
도준은 애써 시선을 돌렸다. 창밖의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보면서도, 눈에 들어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소영의 조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냉정하게 대하세요. 그게 오히려 다은이한테는 편할 거예요.'
하지만 이미 서먹한 사이인데 어떻게 더 냉정해질 수 있을까. 도준은 속으로 되물었다. 냉정이라는 게, 원래도 별로 뜨겁지 않았던 관계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수업이 시작되고, 도준은 노트를 펴는 대신 힐끗 다은의 뒷모습을 살폈다. 다은은 창밖을 보며 턱을 괴고 있었다. 그 옆얼굴에서 지난 토요일의 분노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손가락으로 펜을 빙글빙글 돌리는 버릇이 나온 걸 보면, 무언가에 몰두해 있는 게 분명했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교실을 채웠지만, 도준의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칠판에 적힌 글씨도, 옆자리 친구가 슬쩍 건네는 필기 노트도, 전부 흐릿하게 지나갈 뿐이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 반 아이들 몇 명이 도준의 자리로 다가왔다. 책상에 걸터앉은 남학생 하나가 팔짱을 끼며 씩 웃었다.
— 야, 김도준. 너 이다은이랑 뭔 일 있었냐?
한 남학생이 짓궂게 물었다. 도준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 아니, 왜?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나와서, 도준은 스스로도 흠칫했다.
— 아까부터 너 계속 째려보던데. 뭐 사귀다가 헤어졌냐?
주변에 있던 다른 아이들이 낄낄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도준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 헤어지고 말고 할 게 있었어야 사귀지.
— 오, 그럼 뭔데. 짝사랑?
도준은 대답 대신 어색하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속으로는 뭔가 이미 학교 안에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게 아닐까 하는 불안이 스쳤다. 다은이 자신을 쳐다본 걸 눈치챈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괜히 눈에 띄면 안 되는데.'
수업이 끝날 때마다 도준은 다은의 자리를 슬쩍 확인했다. 다은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책을 펼치거나 창밖을 보고 있었다. 서로 눈이 마주치는 일은 없었지만, 어딘가 팽팽하게 당겨진 실 같은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점심시간, 도준은 급식실로 향하는 길에 우연히 다은과 복도에서 마주쳤다. 복도는 붐볐고, 아이들이 삼삼오오 지나다니는 사이로 다은의 얼굴이 유독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다은이 걸음을 멈추고 도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 너, 우리 엄마 카페 계속 다닐 거야?
다은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마치 남에게 묻는 것처럼 담담했지만, 그 안에 실린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도준은 순간 멈칫했다가, 소영의 말을 떠올리며 최대한 무심하게 대답했다.
— 딱히 그럴 이유 없는데.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애를 썼다. 손끝이 살짝 저려오는 걸 느끼면서도, 표정만은 무너지지 않게 붙잡았다.
다은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도준의 무심한 태도가 예상 밖이었던 모양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나가는 아이들의 발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그 침묵을 채웠다.
— ...그래.
다은은 짧게 대답하고 지나쳐 갔다. 하지만 몇 걸음 가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 눈빛에는 아까와는 다른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도준은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 이미 반대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급식실에 앉아 밥을 뒤적이면서도 도준은 자꾸 다은의 마지막 표정을 떠올렸다. 흔들리던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으면서도 확신할 수 없었다.
'괜히 상처 준 건 아니겠지.'
숟가락을 든 손이 잠시 멈췄다. 옆자리 친구가 뭐라고 말을 걸었지만, 도준은 제대로 듣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그날 오후,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하나둘 가방을 챙기는 소란 속에서, 도준의 휴대폰에 게임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짱형, 아니 소영이었다.
'오늘 카페 잠깐 들를 수 있어요? 알바 하나 구하는데, 도준 씨 생각나서요.'
도준은 메시지를 몇 번이나 읽었다. 화면 속 글자가 눈에 익을 만큼 반복해서 훑어봤지만, 이상하게도 읽을수록 더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심장이 다시 이상하게 뛰기 시작했다.
소영의 카페에서 일한다는 건, 다은과 더 자주 마주친다는 뜻이었다. 지금처럼 복도에서 우연히 스치는 정도가 아니라, 매일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거리감이었다.
'괜히 일이 커지는 거 아닐까.'
도준은 답장을 쓰려다 손을 멈췄다. 자음 몇 개를 눌렀다가 지우고, 다시 눌렀다가 지웠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때, 교실 뒷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 김도준.
다은이 문가에 서 있었다. 표정이 평소와 조금 달랐다. 화난 것도, 슬픈 것도 아닌, 뭔가를 결심한 듯한 눈빛이었다. 교복 재킷을 여전히 단정하게 입고 있었지만, 서 있는 자세에는 미묘한 긴장이 배어 있었다.
주변 아이들이 하나둘 흥미로운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옆 친구를 툭 치며 귀엣말을 나눴다.
— 잠깐 얘기 좀 해.
다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했다. 거절을 허락하지 않는 어조였다.
도준은 휴대폰을 든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안의 화면에는 여전히 소영의 메시지가 떠 있었고, 눈앞에는 다은이 서 있었다. 소영의 메시지와 다은의 부름이 동시에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가방을 챙기던 손이 잠시 허공에서 멈췄다. 교실을 채운 소음이 순간 아득하게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이 둘 사이에서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도준은 아직 아무런 답도 갖고 있지 않았다.
다은의 시선이 도준의 휴대폰 화면을 슬쩍 훑고 지나갔다. 그 짧은 순간, 다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굳는 걸 도준은 놓치지 않았다.
'설마, 본 건가.'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도준은 휴대폰을 황급히 주머니에 넣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