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호감도 폭주 노예

4화

다음 날 아침, 나는 밤새 한숨도 못 잤다. 창밖으로 희끄무레한 빛이 스며들 때까지 눈을 감았다 뜨는 걸 반복했다. 천장에 금 간 자국을 세다가, 그것도 지겨워지면 벽에 붙은 곰팡이 얼룩의 모양을 살폈다. 저건 토끼 같고, 저건 개구리 같고.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어야 하는 게 지금 내 처지였다. 하윤은 구석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자세도, 위치도, 어제와 똑같았다. 자지도 않은 것 같았다. 아니, 잔다는 개념 자체가 지금 그녀에게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나는 조심스레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숨은 쉬고 있었다. 가슴이 아주 미세하게 오르내렸다. 다행이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는 상황이 서글펐다. "밥 먹어." 나는 어제 남은 빵을 다시 내밀었다. 봉지가 조금 눌려 있었다. 반응이 없었다. 눈동자는 여전히 초점이 잡히지 않은 채로 허공의 어느 지점을 보고 있었다. 나는 결국 빵을 그녀 손에 쥐어주었다. 손이 차가웠다. 사람 손이라기보다는 방금 냉장고에서 꺼낸 반찬 그릇 같았다. 그녀는 잠시 그것을 쥐고 있다가, 아주 천천히 한 입을 베어 물었다. 명령에는 반응한다. 감정은 없다. 이 두 문장을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되새겼다. 마치 상태창의 문구를 외우듯이. 나는 그날부터 스킬 실험을 시작했다. 집세 문제도, 빚 문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통장 잔고는 자릿수가 줄어들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아슬아슬했고, 최 씨 할머니는 벌써 두 번이나 문을 두드리며 "더는 진짜 어렵습니다" 소리를 하고 갔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앉은 이 소녀에게 뭔가 변화가 생긴다면, 어쩌면 상황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S급 모험가의 힘. 그게 조금이라도 되살아난다면, 흑시장에서 몬스터 토벌 의뢰라도 대신 뛰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계산은 뻔뻔했지만, 지금 내게 뻔뻔함 말고 남은 게 없었다. 나는 그녀 앞에 앉아 눈을 맞추려 했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다른 곳에 있었다. 창밖 어딘가, 아니면 그보다 더 먼 곳. 스킬 발동 조건이 채워지지 않았다. "하윤." 나는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처음 있는 반응이었다. 나는 순간 숨을 멈추고 그 미세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내 눈 봐봐." 나는 명령조로 말했다. 목걸이의 효과였는지,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나를 보았다. 마치 무거운 추를 매단 눈꺼풀을 억지로 끌어올리는 것 같았다. 눈이 마주쳤다. 호감도 조작. 정신력이 소모되는 느낌. 뒤통수 어딘가에서부터 뭔가 빠져나가는 감각이었다. 게이지가 떠올랐다. 놀랍게도, 그것은 이전과 다르게 움직였다. 최 씨 할머니에게 걸었을 때는 미미하게 움직이던 바가, 이번에는 아주 조금이지만 눈에 띄게 상승했다. '뭐지, 이거.' 나는 다시 눈을 맞추고 스킬을 걸었다. 또 상승했다. 이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나는 그 이유를 짐작해보았다. 최 씨 할머니는 이미 나에 대한 판단과 감정이 자리 잡혀 있는 사람이었다. 옆집 사는 젊은 놈, 인사는 잘하는데 좀 수상한 놈, 그런 식으로 이미 형성된 감정에 스킬을 얹으려니 저항이 컸던 것이다. 반면 하윤은 지금 아무 감정도, 아무 판단도 없는 상태였다. 텅 빈 그릇이었다. 텅 빈 그릇에 물을 부으면, 가득 찰 때까지 저항 없이 채워진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닫고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건 좋은 발견인가, 나쁜 발견인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상대가 텅 비어 있을수록 내 스킬이 더 잘 먹힌다는 것. 그것은 효율적인 발견이면서 동시에 굉장히 꺼림칙한 발견이었다. 어린애 손목을 잡고 다니면서 사탕을 쥐어주는 낯선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일단 실험을 계속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하루 종일 그녀와 눈을 맞추고 스킬을 걸었다. 삼십 분에 한 번씩, 쉬는 시간을 두고. 정신력이 소모될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게이지는 조금씩 차올랐다. 저항이 없는 대신, 내 쪽 소모량이 컸다. 마치 마개 없는 수도꼭지를 계속 틀어놓고 손으로 물줄기를 조절하는 느낌이었다. 절반쯤 채웠을 때 나는 이미 두통으로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눌러도 소용이 없었다. 편의점에 나가 두통약을 사 올까 잠깐 고민했지만, 그럴 돈도 시간도 아까웠다. 점심으로는 다시 빵이었다. 나도 반쪽을 씹으며, 하윤에게 나머지 반쪽을 쥐어주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명령에는 반응했다. 씹는 속도가 조금 빨라진 것 같기도 했다. 착각인지 진짜인지 구분이 안 갔다.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상태창을 다시 열어보았다. [호감도 조작 (F급) - 대상과 시선을 마주친 상태에서 정신력을 소모해 호감도 게이지를 상승시킨다. 대상의 정신적 저항이 낮을수록 상승 폭이 커진다. 지속시간 짧음.] 문구가 조금 바뀌어 있었다. 대상의 정신적 저항이 낮을수록 상승 폭이 커진다는 문장이 새로 추가되어 있었다. 스킬 자체가 진화한 게 아니라, 조건을 이해하게 된 것이었다. 게임으로 치면 히든 조건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공략집도 없이 혼자 던전을 파다가 우연히 숨겨진 통로를 찾은 기분이랄까. '이거, 잘 쓰면 상당한 힘이 될 수도 있겠는데.' 동시에 다른 생각도 들었다. 이런 식으로 판단력도, 저항력도 없는 상대에게만 잘 먹히는 스킬이라면, 이건 힘이 아니라 그냥 사기 수법에 가까운 게 아닐까. 사람 마음을 훔치는 소매치기. 나는 그 생각을 애써 밀어냈다.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다음 날, 나는 다시 실험을 이어갔다. 눈을 맞추고, 스킬을 걸고, 머리가 아파오면 잠깐 물을 마시고, 다시 눈을 맞추고. 이 단순한 반복을 몇 시간이나 계속했다. 게이지는 거의 70퍼센트까지 차올랐다. 하윤의 눈빛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완전한 무기력은 아니었다. 가끔 나를 먼저 쳐다보기도 했고, 이름을 부르면 반응이 빨라졌다. 한번은 내가 물병을 떨어뜨렸을 때, 그녀의 시선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확실하게 움직였다. 작은 일이었지만 나는 그게 그렇게 반가웠다. '되고 있어. 확실히 되고 있어.' 하지만 여전히 위험한 조짐도 함께 있었다. 낮 동안 그녀는 몇 번이나 갑자기 몸을 떨었다. 이유도 없이 숨을 몰아쉬다가 다시 잠잠해지는 일이 반복됐다. 나는 그걸 부작용이라고 생각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그게 얼마나 큰 실수였는지는 그날 저녁에야 알았다. 그날 저녁, 나는 방 밖에서 옆집 사람과 잠깐 얘기를 나누고 돌아왔다. 관리비 고지서 얘기였다. 별거 아닌 대화였다. "요즘 전기세가 왜 이렇게 올랐대요" 같은, 이 세상 어디서든 나눌 수 있는 시시한 잡담. 오 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 문을 열자 하윤이 몸을 웅크리고 벽 구석에서 손톱으로 자기 팔을 긁고 있었다. 이미 몇 개의 붉은 줄이 생겨 있었다. 소매가 걷어 올려진 팔뚝에 손톱자국이 세로로 길게 나 있었고, 그중 하나는 이미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나는 놀라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저항했다. 힘이 상상 이상이었다. 손목을 잡은 내 팔이 그대로 밀려날 정도였다. 이게 S급 모험가의 힘이구나. 순간 실감이 났다. 문 하나 부수는 건 일도 아니겠다는 생각이 그 짧은 순간에도 스쳤다. "놓지 마." 그녀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갈라진, 오랫동안 쓰지 않은 목소리였다. 성대 자체가 오래 잠겨 있다가 억지로 열린 느낌의, 거칠고 낮은 소리였다. "놓으면... 또 사라져..." "사라진다니? 누가?" 대답은 없었다. 그녀의 눈에서 물기가 배어 나왔다. 눈물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그냥 흘러넘치는 물이었다. 표정에 변화가 없는데도 눈에서 물만 계속 흘러나오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고 무서웠다. 나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은 채로 어찌해야 할지 몰라 잠깐 굳어 있었다. "당신, 여기 있는 거지?" 그녀가 나를 처음으로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눈이 마주쳤다. 호감도 조작을 걸 기회였지만, 나는 순간 걸지 않았다. 걸어도 되는 상황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지금 그녀는 명백히 불안정한 상태였다. 여기서 스킬을 더 밀어붙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게이지 숫자를 올리는 데 정신이 팔려서, 이 애가 뭘 견디고 있는지는 제대로 보지 못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뒤늦게 머리를 때렸다. "응, 여기 있어." 나는 그렇게만 대답했다. 다른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나를 보다가, 다시 시선을 떨구고 팔을 긁던 손을 멈췄다. 발작이 서서히 잦아드는 듯했다. 팔뚝의 붉은 줄들을 보며 나는 서둘러 상비약을 찾았다. 소독약이 어디 있었더라. 이런 상황에서도 손에 잡히는 게 없어서 서랍을 세 번이나 열었다 닫았다. 상처는 깊지 않았다. 다행히도. 나는 그녀의 팔에 연고를 발라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도 아무 말이 없었다. 방 안에는 연고 뚜껑을 여닫는 소리만 작게 울렸다. 딸깍. 그날 밤, 나는 그녀 옆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게이지를 다시 확인했다. 70퍼센트에서 정지된 채였다. 발작 이후 더 이상 오르지 않았다. 몇 번을 다시 눈을 맞춰봐도 바는 미동조차 없었다. '조건이 하나 더 있는 건가.' 나는 그녀의 상태창을 다시 살펴보았다. 특이한 문구는 없었다. 다만 감이 왔다. 지금 이 이상으로 밀어붙이면 뭔가 터질 것 같은 그런 감. 실험용 쥐를 다루듯 게이지 숫자만 좇다가는 정말로 큰일을 낼 것 같았다. 나는 다음 날, 최대로 밀어붙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했다. 100퍼센트가 되면 뭐가 달라질까. 예전의 그 S급 모험가로 완전히 돌아올까, 아니면 전혀 다른 무언가가 튀어나올까. 하지만 동시에 그게 두려웠다. 저항 없이 채워진다는 건, 반대로 한계까지 몰아붙이면 무슨 일이 생길지 예측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텅 빈 그릇에 물을 계속 부으면, 어느 순간 그릇 자체가 넘쳐서 깨질 수도 있다. 나는 그 궁금증을 미뤄두기로 했다.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미룸이 얼마나 짧은 시간밖에 허락받지 못할지는, 그때는 몰랐다. 창밖에서 누군가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하나, 둘, 셋. 익숙한 박자가 아니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발소리는 우리 집 앞에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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