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사흘째 되던 날, 집세 마감일이 왔다.
달력에 동그라미를 쳐놓은 그 날짜를 보면서도 나는 여전히 은화 다섯 냥을 마련하지 못했다. 통장 잔고 아니, 이 세계엔 통장도 없으니 그냥 방구석에 굴러다니는 동전 몇 개가 전부였다. 세다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이걸로는 라면 한 봉지도 못 산다.
최 씨 할머니가 문을 두드리며 짐을 빼라고 통보한 그날, 사채업자의 심부름꾼도 함께 찾아왔다. 두 개의 마감이 같은 날 겹친다는 사실이, 그날만큼은 정말로 웃기지도 않았다. 인생이 언제부터 이렇게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맞춰주는지 모르겠다.
"강태오 씨, 오늘까지라고 몇 번을 말했어." 할머니의 목소리는 여전히 카랑카랑했다. 문틈으로 보이는 얼굴은 화가 나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나를 대하는 태도엔 어딘가 미련이 남아 있었다. 호감도 게이지는 가득 차 있었으니까. 문제는 호감도가 집세를 대신 내주진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협상을 시도했다. 존댓말로, 최대한 정중하게. 표정 관리도 나름대로 신경 썼다. "일주일만 더 시간을 주시면, 다음 주엔 꼭..."
"됐고." 할머니가 말을 잘랐다. "일주일 전에도 그 소리 했잖아."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통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호감도는 여전히 가득 차 있었지만, 그 호감이라는 게 결국 안타까움이지 신뢰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옆에 서 있던 심부름꾼은 팔짱을 낀 채 조용히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원래 호감도가 오를 리 없는 대리인이었다. 그의 표정에는 미련도, 안타까움도 없었다. 그냥 일이었다.
"오늘 밤까지야." 할머니가 문을 닫고 나갔다.
쾅.
문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나는 방으로 돌아가 벽에 기댔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다리에서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하윤은 여전히 구석에 앉아 있었다. 게이지는 70퍼센트에서 며칠째 정지되어 있었다. 발작이 있었던 이후, 그녀는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 듯했지만 여전히 텅 빈 표정이 대부분이었다. 밥은 먹었냐고 물어도, 잠은 잤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다만 시선만은 조용히 나를 따라다녔다. 그게 유일한 반응이었다.
밤이 깊어졌다. 나는 짐을 대충 챙겼다. 어차피 챙길 것도 많지 않았다. 낡은 가방 하나, 옷가지 몇 벌, 그리고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 산 잡동사니 몇 개. 그것들을 가방에 쑤셔 넣으면서 생각했다. 갈 곳은 없다. 정말로 없다. 노숙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뭉글뭉글 떠올랐다가, 이 세계에도 노숙이라는 개념이 있는지조차 확신이 안 서서 다시 지워졌다.
가방 끈을 조이는 손이 떨렸다. 춥지도 않은데 손끝이 시렸다.
그때였다.
"강태오 씨, 안에 계십니까." 문밖에서 낮고 위압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사채업자였다. 직접 온 모양이었다.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여태껏 심부름꾼만 보내던 자가 직접 왔다는 건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은행에서도 담당자가 바뀌면 상황이 나빠지는 법인데, 사채업이라고 다를 리 없었다.
문을 열자 덩치 큰 남자 셋이 서 있었다. 그중 하나가 낮에 왔던 심부름꾼이었고, 나머지 둘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하나는 팔뚝에 문신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목이 유난히 짧았다. 셋 다 눈빛이 곱지 않았다.
"돈 준비됐나?" 문신 남자가 물었다. 질문이라기보다 통보에 가까운 어조였다.
"조금만 더..." 나는 말을 꺼내려 했다. 남자는 듣지도 않고 방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나는 뒤로 밀려났다. 어깨가 문틀에 부딪혔다. 아팠지만 아프다는 말을 할 여유는 없었다.
그때 하윤이 몸을 일으켰다.
느릿하지만 확실한 움직임이었다. 마치 오래 잠들었다가 깨어나는 짐승 같았다. 그녀의 눈이 남자들을 향했다. 텅 비어 있던 그 눈에 처음으로 뭔가가 담겼다. 경계, 혹은 그 비슷한 감정.
"뭐야, 저건." 목이 짧은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하윤을 보았다. "노예 아냐? 왜 저렇게 노려봐."
"신경 쓸 것 없어." 문신 남자가 대답했다. "노예 목걸이 찬 놈이 뭘 하겠어."
나는 순간 불안해졌다. 여기서 하윤이 폭력적으로 움직이면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었다. 목걸이가 있으니 나를 해치지는 못하겠지만, 저들을 공격한다면 그건 다른 문제였다. 사채업자를 폭행한 노예. 그 뒤에 벌어질 일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움직이지 마." 나는 하윤에게 명령했다. 목걸이의 효과 때문인지 그녀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다만 눈빛은 여전히 남자들을 향해 있었다. 마치 목줄에 묶인 개가 그래도 노려보는 것만은 포기하지 않는 것 같은, 그런 눈빛이었다.
"오늘 못 갚으면 방식이 좀 험해질 수 있다는 거 알지?" 남자가 나를 향해 말하며 손을 뻗어 내 옷깃을 잡았다. 손아귀 힘이 예상보다 셌다. 발끝이 살짝 들릴 정도였다.
순간 하윤의 몸이 움찔했다. 명령을 어기려는 조짐이었다. 목걸이가 미세하게 진동하는 게 눈에 보였다.
"괜찮아." 나는 그녀를 향해 짧게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확인할 여유는 없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남자가 내 옷깃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숨이 살짝 막혔다. 목이 조여드는 감각이 낯설고 무서웠다. 이 세계에 온 뒤로 처음 느끼는, 진짜 죽음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그 순간, 하윤이 명령을 무시하고 움직였다.
목걸이가 파랗게 빛나며 경고음을 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삐이이-. 날카로운 전자음이 방 안을 채웠다. 그녀는 순식간에 남자의 팔을 붙잡아 꺾었다.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났다.
우드득.
"으아악!"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나머지 둘이 무기를 꺼내려 했지만, 하윤의 동작이 그보다 빨랐다. 한 명은 벽에 던져졌고, 등이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콰당. 다른 한 명은 목이 붙잡혀 그대로 바닥에 눌렸다. 몇 초 만에 세 남자가 모두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게 S급 모험가의 힘이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것과 몸소 체감하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소름이 돋았다.
하윤은 그들을 완전히 제압한 뒤 나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손목에서 붉은 줄이 다시 번지고 있었다. 목걸이가 명령 위반의 대가로 그녀 자신을 상하게 만든 것이었다. 얇은 상처가 손목을 따라 그어지듯 벌어져 있었다.
"안 돼!" 나는 놀라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손목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멈춰, 그만해!"
"당신이 위험했으니까." 그녀가 처음으로 완전한 문장을 말했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지만, 분명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 말투에 나는 잠깐 멍해졌다. 지금까지 그녀가 내뱉은 단어들은 대부분 짧고 단속적이었는데, 이번엔 문장 전체가 흔들림 없이 완성되어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알았다. 그녀에게 나는 이미 어떤 의미가 된 상태였다. 명령보다 나의 안전을 우선하는, 목걸이의 제약조차 뚫으려 드는 무언가.
남자들이 겨우 일어나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협박도, 빚 이야기도 없이. 문신 남자는 문지방을 넘으면서도 팔을 부여잡고 뭐라 욕설을 뱉었는데, 알아듣지 못했다. 아마 다시는 이 근처에 얼씬도 안 할 것이다. 그건 다행이지만, 문제는 이제 하윤이었다.
그녀는 자리에 주저앉아 손목의 피를 손으로 닦아내고 있었다.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계속 방치하면 위험할 정도였다. 나는 다급히 서랍을 뒤져 천 조각을 찾아냈다. 깨끗한 걸 찾을 여유는 없었다. 그나마 덜 낡은 셔츠 하나를 찢어 그녀의 손목을 감쌌다.
"왜 그렇게까지 한 거야." 나는 손을 움직이며 물었다. 붕대를 감는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익숙지 않은 일이라 더 그랬다.
"당신이 다칠까봐." 그녀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이번엔 다른 종류의 말이 이어졌다. "또 사라질까봐."
또, 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가 겪은 배신의 기억이 그 단어 안에 있었다. 동료였던 자들, 강철의 방패라 불렸던 그 힘, 그리고 그 끝에 남은 무너짐. 아무리 강해도 마음은 유리처럼 부서질 수 있다는 걸, 그녀는 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안 사라져." 나는 그렇게 말했다. 별생각 없이 나온 말이었지만, 그 말이 그녀에게 어떤 무게로 닿을지는 그때는 알지 못했다.
손목을 감싸는 도중, 나는 게이지를 확인했다. 놀랍게도 90퍼센트까지 차올라 있었다. 발작과 극단적인 감정이 그녀의 저항을 다시 낮춘 모양이었다. 이런 식으로 오를 줄은 몰랐다. 애초에 이게 정상적인 방식으로 오르는 게이지인지도 의문이었다.
'조금만 더면 100퍼센트다.'
순간 유혹이 들었다. 최대치까지 채우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녀의 힘이 완전히 나를 향한 충성으로 바뀔까. 그러면 사채업자든, 집주인이든, 이 지긋지긋한 마감들이든 전부 해결될 수도 있지 않을까.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럴 때만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게 스스로도 우스웠다.
나는 그녀의 눈을 다시 마주 보았다. 여전히 붕대를 감고 있는 손 아래로, 그녀의 손목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고마워, 하윤아." 나는 말했다. 그리고 시선을 유지한 채 스킬을 걸었다.
호감도 조작.
게이지가 순식간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90에서 95, 98, 99... 숫자가 넘어가는 속도가 이상할 정도로 빨랐다. 나는 그 속도에 놀라 스킬을 멈추려 했다. 손끝에 힘을 주고 스킬을 회수하려 했지만, 이미 어떤 관성이 붙은 듯, 게이지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계속 상승했다.
이게 아닌데. 멈춰야 하는데.
100퍼센트.
게이지 바가 새하얗게 빛났다. 그리고 하윤의 눈동자가 완전히 다른 색으로 변했다. 텅 비어 있던 눈에 강렬한 빛이 차올랐다. 애정이라고 부르기엔 지나치게 강렬한, 광기와 맞닿은 무언가였다.
"태오님." 그녀가 처음으로 나를 그렇게 불렀다. 목소리에 떨림이 없었다. 오히려 확신에 가까웠다. "이제 알겠어요. 당신이 제 전부예요."
나는 순간 몸이 굳었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올라왔다.
'이거, 뭔가 잘못됐다.'
집세도 못 내고, 사채 이자도 못 갚는 판에 이제는 S급 모험가의 광기 어린 애정까지 상대해야 하는 건가. 이 인생 대체 어디까지 꼬이려고 이러는 건지, 웃음이 나오려다 말고 목구멍에 걸렸다.
그녀가 나를 향해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붕대를 감던 내 손을 붙잡는 그녀의 손에서,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힘이 느껴졌다. 놓아주지 않겠다는 힘. 손가락 하나하나가 마치 사슬처럼 내 손목을 감아왔다. 뿌리치려 해도 뿌리쳐지지 않을 것 같은, 그런 확신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방금까지 세 남자를 순식간에 제압하던 그 힘이었다. 이제 그 힘이 전부 나 하나를 향해 있었다.
좋아해야 할 상황인지, 도망쳐야 할 상황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