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천장이 낮았다.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든 생각이 그거였다. 우리 집 안방 천장은 이것보다 훨씬 높았는데. 아니, 안방이 아니라 이건 어디지.
몸을 일으키려다 팔이 짧다는 걸 깨달았다.
···뭐?
손등을 들어 눈앞에 가져다 댔다. 잔주름 하나 없이 매끈한 살갗, 손목은 앙상할 정도로 가늘었다. 마흔둘 먹은 엔지니어의 손이 아니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봤다. 관절이 부드럽게, 아주 부드럽게 움직였다. 삼십 년 넘게 키보드를 두들기며 굳어 있던 마디의 뻐근함이 없었다. 손가락 끝에 박여 있던 굳은살도, 왼쪽 무릎의 오래된 통증도, 허리를 펼 때마다 나던 뚜둑 소리도 없었다.
몸이 완전히 다른 몸이었다.
방을 둘러봤다. 책상 위에 놓인 삼성 노트, 벽에 붙은 서태지와 아이들 포스터, 창문 밖에서 들리는 확성기 소리 — "두부 사려어, 콩나물도 있어요" — 그리고 낡은 브라운관 텔레비전.
1995년이다.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저절로 돌아갔다. IMF가 터지려면 아직 2년 남았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려면 석 달도 안 남았다. 나는 이 시기를 뉴스로만 봤던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그 뉴스 안에 서 있었다.
어젯밤, 아니 어젯밤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한강대교 위에서 손목에 찬 금시계를 붙잡고 있었다. 이혼서류에 서명한 손으로, 회사에서 정리해고 통지서를 받은 손으로. 다리 위에서 강물을 내려다보던 그 십오 분이 아직도 생생했다. 물비린내, 차가운 강바람, 그리고 손목시계가 유난히 뜨거웠던 감각까지.
시계가 갑자기 뜨거워졌고, 세상이 빛으로 뒤덮였고.
그리고 여기다.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걸음걸이가 어색했다. 다리가 이렇게 짧았나. 보폭을 재는 것도 아닌데 자꾸 발이 엉켰다.
거울 속에는 열두 살짜리 남자애가 서 있었다. 눈만 퀭한 게 나랑 좀 비슷하긴 한데, 이건 명백히 어린 강민준이었다.
···돌아왔다.
말이 안 되는 상황인데, 이상하게 담담했다. 마흔둘 먹은 인생을 스물네 시간 안에 다 잃어본 사람은, 어쩌면 이런 일에도 놀라지 않는 근육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회사도 잃고 아내도 잃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어봤는데, 다시 어린애 몸에 들어온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싶기도 했다.
그래도 손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부엌에서 도마 소리가 들렸다. 탁, 탁, 탁.
익숙한 리듬이었다. 어머니가 마늘을 다질 때 내는 그 특유의 박자.
어머니 목소리.
"민준아, 밥 먹어야지!"
목이 메었다. 대답이 안 나왔다.
한참을 문 앞에 서서 숨을 골랐다. 목구멍이 좁아지는 느낌, 눈두덩이 뜨거워지는 느낌. 이런 몸으로도 감정이 이렇게 그대로 전해지는구나 싶었다.
방문을 열고 나갔다. 좁은 복도, 낡은 벽지, 그리고 부엌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계란말이를 뒤집던 여자.
이정숙.
돌아가신 지 이십 년도 더 된, 아니 전생에서는 그렇게 됐던 어머니가, 지금 여기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앞치마 끈이 허리에 두 번 감겨 있었고,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어 올려져 있었다. 손목에 찬 낡은 시계, 목에 얇게 남은 흉터까지도 전부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엄마."
목소리가 갈라졌다.
"왜 그렇게 봐, 얼굴에 뭐 묻었어?"
어머니가 웃으며 프라이팬을 흔들었다. 그 손짓, 그 웃음, 그 미세한 눈가 주름까지 전부 기억나는 그대로였다.
울컥했지만 참았다. 지금은 감정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시간이 별로 없다는 걸, 이 몸의 주인은 아직 모르고 있었으니까.
식탁 앞에 앉아있던 남자가 신문을 넘기며 말했다.
"민준이 오늘도 지각할라. 서둘러 먹어."
강태호.
아버지였다.
건강한 모습이었다. 살집이 좀 있고, 얼굴에 생기가 있었다. 전생 마지막 몇 년, 병상에서 뼈만 남은 채 누워 있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목소리도 지금은 저렇게 우렁찬데, 나중엔 겨우 숨소리만 남았었다.
식탁에 앉으며 아버지 얼굴을 다시 훑었다. 눈 밑이 살짝 거뭇했다. 그것도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초기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그냥 피곤해 보이는 얼굴.
그 순간 아버지가 젓가락을 놓치며 손을 부르르 떨었다.
달그락.
"어, 왜 이러지."
아버지가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했다. 순간적인 마비, 그리고 곧 회복.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그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손끝의 일시적 저림, 아침 기상 시 어지럼증, 최근 들어 부쩍 심해진 갈증. 어머니가 아까 언급했던 "요즘 물을 많이 마신다"는 말도 겹쳤다.
전생에서 아버지가 앓았던 그 병의 초기 징후들이, 지금 이 식탁 위에서 하나둘 맞춰지고 있었다.
체크리스트가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펼쳐졌다. 다뇨, 다갈, 손발 저림, 체중 변화, 시야 흐림. 하나씩 대조해봤다. 어머니가 요즘 물을 많이 마신다고 했으니 다갈은 확인. 방금 손이 떨렸으니 저림도 확인. 나머지는 며칠 지켜보면 될 일이었다.
그때는 너무 늦게 알았다. 증상이 심해지고서야 병원에 갔고, 진단받고서야 그게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알았다. 그리고 손쓸 수 없을 때에서야 겨우 손을 썼다. 병상에서 발가락 하나를 잃고, 그다음엔 시력을 잃고, 마지막엔 신장까지 망가졌던 그 순서를 나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이번엔 아니다.
"아빠."
내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12살짜리 목소리치고는 너무 진지했는지, 아버지가 신문에서 눈을 뗐다.
"왜 그래, 인마. 얼굴이 왜 그렇게 심각해."
"요즘 밤에 화장실 자주 가세요?"
식탁이 순간 조용해졌다.
어머니가 프라이팬을 든 채로 나를 쳐다봤다.
"어머, 너 그걸 어떻게 알아?"
···망했다.
너무 서둘렀다. 열두 살짜리가 갈증, 다뇨, 손발 저림을 순서대로 물어보면 누가 봐도 이상하지. 마흔둘 먹은 사람의 조급함이 열두 살짜리 입으로 그대로 튀어나온 꼴이었다.
"그, 그냥 물어본 거예요. 아빠 요즘 물 많이 드시는 것 같아서."
말을 더듬었다. 사실 안 더듬어도 되는데, 그림자를 조금 만들어놓는 게 나았다. 애매하게 어리숙해 보이는 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차라리 안전했다.
아버지가 껄껄 웃었다.
"우리 아들이 다 컸다고 아빠 걱정도 하네."
웃음으로 넘어가는가 싶었지만 어머니 눈빛은 아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이 남아있었다. 어머니는 원래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전생에서도 내가 뭔가 숨기면 제일 먼저 알아채던 사람.
나는 젓가락을 집어 들며 속으로 계획을 세웠다.
아버지가 병원에 가야 한다. 지금은 초기다. 지금은 늦지 않았다.
하지만 이걸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열두 살 아들이 "당뇨 초기 증상 같으니 내분비내과 가보세요"라고 하면 미친놈 취급받는다. 정신병원부터 가자고 할지도 모른다.
밥을 먹으면서도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이 계속 돌아갔다. 이건 마치 오래된 서버 로그를 뒤지는 느낌이었다. 증상, 시기, 진단, 치료 시점 — 전부 다 알고 있는데, 그걸 지금 이 몸으로는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가 문제였다.
계란말이를 한 점 집어 입에 넣었다. 달고 짠 맛이 입안에 확 번졌다. 조미료 맛이 조금 강했다. 이십 년도 더 지나서 다시 먹어보는 어머니의 계란말이. 맛은 그대로인데, 이걸 먹는 내가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게 이상했다.
밥그릇을 다 비웠을 때, 창밖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부아앙.
신문 배달원이었다. 오늘 날짜가 신문 1면에 박혀 있었다.
1995년 3월.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삼풍백화점 근처 도로공사 이야기가 나왔다. 6월이 되면 저 백화점이 무너진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몇 명이 죽었는지, 몇 명이 살았는지, 어떤 매장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갇혔는지까지도.
하지만 지금 내 눈앞의 위기는 그것보다 더 가까이 있었다.
아버지의 손이 다시 한번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그 손을 조용히 바라보며, 이 몸으로 앞으로 몇 년을 어떻게 버텨야 할지 계산을 시작했다. 삼풍은 나중 문제고, 일단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했다. 아버지 병원, 그것도 이번 주 안에.
···일단은 학교부터 가야겠지.
가방을 챙기며 문을 나섰다. 신발을 신다가 발 크기가 낯설어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12살짜리 발에 맞는 운동화 끈을 묶는 것조차 서툴렀다.
등 뒤에서 어머니가 소리쳤다.
"민준아, 오늘 좀 이상하다? 학교 가서도 그렇게 어른스럽게 굴면 애들이 이상하게 봐!"
그 말이, 앞으로 벌어질 일들의 예고편이라는 걸 나는 아직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