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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민준이 좀 바꿔줘요." 어머니가 나를 향해 손짓했다. "박재현 아저씨야, 전화 받아봐." 수화기를 넘겨받았다. "안녕하세요." "어, 민준이구나. 나 재현 아저씨야. 기억나니?" 목소리가 밝고 가벼웠다. 30대 후반쯤 되는 남자 목소리였는데, 뭔가 애 같은 텐션이 있었다. 어른치고는 지나치게 신난 목소리라, 되레 내가 어색해질 정도였다. "네, 안녕하세요." "이번 주말에 시간 있으면 아저씨 집에 놀러 올래? 컴퓨터 신기한 거 보여줄게." "컴퓨터요?" "어, 요즘 새로 나온 486 컴퓨터 있는데, 아저씨가 인터넷 되는 거 연결해놨거든. 나우누리라고, 통신망 접속하는 거야." 나우누리. 1995년 당시 유명했던 PC통신 서비스 중 하나였다. 이 시기엔 이런 걸 아는 어른도 흔치 않았을 텐데, 목소리만 들어도 신문물에 미친 사람 특유의 흥분이 느껴졌다. "재밌겠네요. 갈게요." "그래, 토요일 오후에 보자." 전화를 끊고 어머니한테 물었다. "박재현 아저씨는 누구예요?" "아빠 사촌 동생. 컴퓨터 회사 다니는데, 좀 특이한 사람이야. 결혼도 안 하고 컴퓨터만 만지고 산다니까." 어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근데 사람은 좋아. 예전에 우리 집 컴퓨터 고쳐준 적도 있고. 왜, 무슨 일 있어?" "아니요, 그냥 어떤 분인가 궁금해서." 방계 친척, 컴퓨터 회사 재직, 결혼도 안 하고 방구석에서 기계만 만지는 남자, 1995년. 이 조합이 뭔가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나는 속으로 몇 가지 이름을 떠올려봤다. 이 나이대에 컴퓨터에 저 정도로 미쳐 있고, 나중에 뭔가 크게 되는 사람이 있었던가. 기억이 애매했다. 하지만 그 애매함이 오히려 마음에 걸렸다. * * * 토요일이 되었다. 박재현 아저씨 집은 걸어서 20분쯤 거리에 있었다. 조그만 원룸이었는데,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방 한가운데 놓인 커다란 본체와 모니터였다. 방 크기에 비해 컴퓨터 책상이 지나치게 컸다. 마치 방의 주인이 사람이 아니라 저 기계인 것처럼. "왔구나, 들어와." 박재현 아저씨가 반갑게 맞았다. 안경을 쓰고, 헝클어진 머리에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며칠 안 씻은 것 같은 냄새가 살짝 코를 찔렀는데, 그게 이상하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뭔가에 몰입해 사는 사람 특유의 방치된 위생 상태였다. 방 안은 각종 컴퓨터 잡지와 케이블, 부품들로 어질러져 있었다. 바닥엔 뜯다 만 라면 봉지도 하나 굴러다녔다. "이게 486이야. DX2, 66메가헤르츠짜리. 요즘 최신형이지." 아저씨가 자랑스럽게 본체를 두드렸다. 애 자랑하듯 손끝이 살짝 떨렸다. 최신형 컴퓨터라니,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전생 기준으로 보면 이건 박물관 유리장 안에 놓여 "1990년대 초기 개인용 컴퓨터"라는 설명판이 붙어야 할 물건이었다. 그런데 이 시대엔 이게 미래 그 자체였다. "이걸로 통신도 되나요?" "어, 모뎀 연결하면 되지. 근데 전화비가 엄청 나와서 조심해야 해. 지난달에 형이 통신비 고지서 보고 놀라서 전화 끊으라고 소리쳤다니까." 아저씨가 웃으며 모뎀 연결하는 걸 보여줬다. 삐이이이익—쿠르르르르— 특유의 접속음이 방 안에 울렸다. 이 소리, 전생에서도 그리 자주 들었던 건 아니지만 어딘가 향수를 자극했다. 마치 오래전 잊고 있던 명절 냄새를 갑자기 맡은 기분이었다. 화면에 초록색 텍스트가 나타났다. 나우누리 접속 화면이었다. "신기하죠? 여기서 다른 사람들이랑 채팅도 하고, 자료도 받고." 아저씨가 이것저것 조작하는 걸 보다가, 나는 자연스럽게 한마디 던졌다. "이거 나중에 인터넷이란 게 대세가 될 것 같아요. 이런 통신망들이 다 하나로 연결되는 거요." 아저씨가 나를 쳐다봤다. "인터넷?" "네, 월드와이드웹이라고, 전 세계 컴퓨터가 다 연결되는 거예요. 지금은 초기지만 몇 년 안에 엄청 커질 거예요. 나우누리 같은 통신망들도 결국 다 밀릴 걸요." 아저씨 표정이 순간 진지해졌다. 방금까지 애처럼 웃던 눈빛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너 그런 걸 어디서 들었어?" "그냥, 컴퓨터 잡지에서 본 것 같아요." "어떤 잡지? 마이컴? 아니면 컴퓨터월드?" 말이 막혔다. 대충 둘러댈 잡지 이름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뭐라도 하나 지어놨어야 했는데. "…기억이 잘 안 나요." 아저씨가 의자를 돌려 나를 정면으로 봤다. 안경 너머 눈빛이 갑자기 예리해져서, 나는 순간 뭔가 잘못 말했나 싶었다. "민준아, 너 컴퓨터 좀 아는구나?" "조금요." "그럼 이거 한번 봐봐." 아저씨가 화면에 뭔가를 띄웠다. 도스 프롬프트였다. 까만 화면에 하얀 커서만 깜빡이는, 요즘 애들은 보면 무슨 고대 유물인가 할 화면. "이거 배치파일 만들 줄 알아?" "네, 대충은요." "그럼 이거 한번 짜봐. 폴더 안에 있는 파일들 자동으로 정리하는 거." 키보드를 넘겨받았다. 타닥타닥.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몸은 작았지만 손가락 근육에 새겨진 습관은 여전했다. 마치 오랫동안 자전거를 안 탄 사람이 페달을 밟는 순간 몸이 알아서 균형을 잡는 것처럼. 몇 줄 안 되는 배치파일이었지만, 아저씨가 요구한 것보다 훨씬 효율적인 방식으로 짰다. 파일 확장자별로 자동 분류하고, 로그까지 남기는 스크립트였다. 굳이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됐는데, 습관이란 게 참 무섭다는 걸 이럴 때 느꼈다. 실행 결과가 화면에 떴다. "…뭐야 이거." 아저씨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거 완전 프로가 짠 것 같은데." "그냥 대충 짠 거예요." "대충 짰다는 게 이 정도야? 야, 나 이 회사에서 5년 넘게 일했는데 이렇게 짜는 사람 못 봤어." 아저씨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방금까지 늘어져 있던 몸이 순식간에 긴장했다. 분위기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민준아, 너 진짜 열두 살이야?" 뜨거운 침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네, 왜요?" "이거 프로그래머들도 이렇게 짜는 사람 흔치 않아. 이런 걸 어디서 배웠어?" "그냥 스스로 익혔어요." "스스로? 책 보고?" "...뭐, 그런 셈이죠." 아저씨가 팔짱을 끼고 나를 뚫어지게 봤다. 오랜 침묵이 흘렀다. 벽에 걸린 시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째깍, 째깍, 째깍. "…좋아, 안 캐물을게. 근데 하나만 물어보자." "네." "너 나랑 뭐 좀 같이 해볼 생각 없어?" "뭘요?" 아저씨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 순간 방금까지의 진지함은 사라지고, 다시 애 같은 텐션이 돌아왔다. "나 요즘 회사에서 이상한 프로젝트 하나 준비 중인데, 해외에서 투자 받으려고 법인 하나 만들 생각이거든. 근데 기술 쪽에서 사람이 부족해." "제가 뭘 도울 수 있는데요?" "네가 방금 보여준 그 실력, 그거 그냥 재능이 아니야. 뭔가 있어. 나 그거 확신해." 아저씨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의자가 삐걱 소리를 냈다. "해외 계좌, 법인 설립, 이런 거 아저씨가 다 알아서 처리할 수 있어. 서류 작업도, 세무 쪽도, 아저씨 대학 동창 중에 회계사도 있고. 근데 그 안에 넣을 기술, 그건 네가 해줘야 해."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건 예상치 못한 기회였다. 어른의 사회적 신분, 그리고 자본을 움직일 수 있는 통로. 열두 살짜리가 절대 혼자서는 손댈 수 없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위험이기도 했다. 열두 살짜리가 이런 일에 발을 들이면, 그 자체로 이상한 신호가 될 수도 있으니까. 어른들 눈에 너무 튀는 아이는,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주목을 받게 마련이다. 게다가 이 사람, 박재현이라는 사람에 대해 나는 아직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사람은 좋다고 어머니가 말했지만, 사람 좋은 것과 사업 파트너로서 신뢰할 수 있는 건 전혀 다른 얘기였다. "…생각해볼게요." "그래, 천천히 생각해. 근데 너무 오래 끌지는 마. 요즘 시장이 빠르게 변하니까." 아저씨가 웃으며 말했지만, 그 웃음 속엔 뭔가 절박함이 섞여 있었다. 마치 이 기회를 놓치면 큰일 날 것 같다는, 조급함 같은 것. 그 조급함이 오히려 마음에 걸렸다. 확신이 있는 사람은 저렇게 조급해하지 않는다. 확신이 없거나, 아니면 시간에 쫓기고 있거나. * * *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계속 그 제안을 생각했다. 박재현이라는 사람, 방계 친척이자 컴퓨터 마니아. 이 사람이 만들려는 법인이 어떤 성격인지, 그 프로젝트가 정확히 뭔지 아직은 하나도 모른다. 그냥 흥분한 눈빛과 절박한 웃음만 봤을 뿐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게 내가 가진 미래 지식을 실제 자본으로 바꿀 수 있는 첫 번째 통로라는 것. 지금 내 나이로는 은행 계좌 하나 마음대로 못 만든다. 주식도, 부동산도, 사업자등록도 전부 어른의 이름을 빌려야만 가능한 일들이었다. 그런데 박재현이라는 사람이 그 다리를 자처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병은 관리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회사의 몰락은 아직 시간이 남았다. 이제 필요한 건 그 시간 동안 쓸 수 있는 실탄이었다. 정보만으로는 아무것도 못 산다. 정보를 돈으로 바꿀 통로가 필요했고, 지금 그 통로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문제는, 이 통로가 얼마나 튼튼한지 아직 모른다는 것뿐이었다. 골목 어귀에 다다랐을 때, 전봇대 아래 누군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작은 체구의 여자아이였다.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있었다. 빗줄기가 그리 굵지는 않았지만, 아이의 어깨와 머리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저러고 얼마나 서 있었던 걸까. 지나가는 사람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낯익은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 아이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이상하게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빛이, 어딘가 낯설지 않았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마치 오래전에 어디선가 마주친 것 같은, 설명할 수 없는 기시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아이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잠깐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골목 안쪽으로 걸어갔다. 걸음걸이도 이상했다. 서두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느긋하지도 않은, 딱 그 중간의 속도. ···누구지. 왠지 모르게, 다시 마주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아이가 사라진 골목 안쪽을 바라봤다. 빗소리만 골목을 채우고 있었다. 철퍽, 철퍽.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등 뒤에서 서늘한 바람이 스쳤다. 마치 누군가 내 뒷목을 손가락으로 스치고 지나간 것처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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