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학교 가는 길, 골목마다 익숙한 간판들이 보였다.
분식집, 문방구,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다음 세대 PC통신 광고가 붙은 전자상가.
1995년의 냄새는 매캐한 매연과 리어카 채소 냄새가 뒤섞인, 이상하게 정겨운 조합이었다.
전봇대에는 비디오 대여점 전단지가 붙어 있었다. 무슨 영화인지는 모르겠지만 표지 그림이 지나치게 리얼했다. 저런 걸 애들이 보고 자랐다니, 참으로 자유로운 시대였다.
문방구 앞에서는 애들이 백원짜리 뽑기 기계를 흔들고 있었다. 나도 저기서 저러고 있었던가. 30년 전 기억인데도 손끝이 근질거리는 걸 보면 몸이 먼저 반응하는 모양이었다.
학교 정문 앞에서 담임 선생님이 학생들을 줄 세우고 있었다.
"강민준, 넌 왜 넥타이가 삐뚤어졌어."
선생님이 다가와 넥타이를 고쳐 매줬다. 손끝이 목덜미를 스치는 순간, 몸이 뻣뻣해졌다.
마흔둘 어른이 열두 살 코스프레하면서 선생님한테 넥타이 매어지는 기분이,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민망함과 그리움이 반쯤 섞인 이상한 감정이었다.
"됐다. 얼른 들어가."
"네, 감사합니다."
교실에 들어서자 30명 넘는 아이들이 떠들고 있었다. 종이비행기가 날아다니고, 누군가는 만화책을 돌려보고 있었다. 뒷자리에서는 딱지치기 하다가 걸려서 혼나는 놈도 있었다.
이 시절 특유의 활기였다.
요즘 애들이 이 광경을 본다면 무슨 원시부족 다큐멘터리 보듯 신기해하겠지. 스마트폰도 없고, 태블릿도 없고, 오직 몸으로 부딪히며 노는 시대.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더 시끄럽고 더 활기찼다.
나는 자리에 앉아 창밖을 봤다. 열두 살짜리 몸으로 앉아 있으니 책상 높이가 어색했다. 팔꿈치가 자꾸 책상 모서리에 부딪혔다.
이 책상, 이 의자, 이 교실 냄새까지 전부 다 기억 속에 있었다. 나무 니스 냄새와 칠판지우개 분필 가루 냄새가 뒤섞인 그 특유의 공기.
1교시는 수학이었다.
선생님이 분수의 나눗셈을 설명하는데, 나는 손 안 대고 다 알고 있는 문제였다. 30년 넘게 회계 업무를 하면서 숫자와 씨름한 몸이다. 분수 나눗셈이면 눈 감고도 풀겠다.
문제집을 펴놓고 앞에 몇 문제만 빠르게 풀었다. 습관이었다. 무의식이 손을 움직였고, 손이 펜을 움직였다.
선생님이 순시하다가 내 노트를 봤다.
"어, 이거 벌써 다 풀었어?"
"네."
"…응용문제까지?"
노트에는 선생님이 아직 설명 안 한 부분까지 풀이가 적혀 있었다. 심지어 검산까지 옆에 작게 적어놨다. 아, 이거 좀 심했나.
선생님 눈빛이 묘하게 바뀌었다. 호기심과 의심이 반씩 섞인 눈이었다.
"너 학원 다니니?"
"아니요."
"그런데 이걸 어떻게 알아?"
말문이 막혔다. 답은 간단했다. 30년 넘게 산 어른이니까요, 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병원행 급행열차 티켓이나 다름없다.
"그, 그냥 예습했어요."
"예습을 어디서? 참고서 봤어?"
"...네, 그냥, 집에 있는 거요."
선생님이 고개를 갸웃하며 지나갔지만, 뒤통수에 시선이 계속 남아있는 게 느껴졌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하루 만에 벌써 두 번째 위기였다. 아니, 하루도 안 됐는데 벌써 이 지경이면 앞으로 6년을 이 학교에서 어떻게 버티나.
쉬는 시간, 짝꿍이 다가왔다.
"민준아, 너 뭔가 좀 변했다?"
"어떻게?"
"몰라, 말투가 좀 애 같지 않아. 무슨 뉴스 앵커 같아."
···그야 애가 아니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어제 텔레비전에서 어른들 나오는 프로그램 봐서 그런가 보다."
"무슨 프로그램?"
"...아침마당."
짝꿍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그런 것도 봐?"
"어, 어. 할머니가 보길래 같이."
적당히 둘러댔지만, 짝꿍은 여전히 갸웃거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거짓말도 재능이 필요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지금까지 회사에서 상사한테 핑계 댈 때는 이보다 훨씬 능숙했는데, 열두 살 몸에 갇혀 있으니 그마저도 어색했다.
점심시간에는 급식이 아니라 도시락이었다. 반찬으로 계란말이가 나왔는데, 문득 아버지 손이 떨리던 장면이 떠올라 입맛이 사라졌다.
옆자리 짝꿍은 소시지 반찬을 자랑하며 신나게 먹었다. 나는 젓가락으로 계란말이를 뒤적거리기만 했다.
"안 먹어?"
"...먹을 거야."
억지로 한 입 삼켰다. 맛은 있었다. 그런데도 목이 메었다.
오후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왔다.
마루에는 여동생 강서연이 앉아서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아직 유치원생이었다. 볼이 통통하고, 그림 실력은 유치원생 수준이지만 색 배치가 묘하게 대담했다.
"오빠!"
서연이가 뛰어와서 내 다리를 안았다. 이 조그만 체온이, 이 몸짓이 갑자기 너무 사무쳤다.
30년 후, 이 아이는 어떻게 됐을까. 결혼은 했을까, 애는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곧 멈췄다. 지금 이 순간의 서연이는 아직 그런 미래를 하나도 겪지 않은, 그냥 유치원생일 뿐이었다.
"오빠 이거 봐, 이거 오빠 그린 거야."
서연이가 크레파스 그림을 들었다. 삐뚤빼뚤한 사람 형태였는데, 자세히 보니 안경을 쓴 나였다. 심지어 옆에 별사탕처럼 작은 점들도 그려놨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름의 디테일인 모양이었다.
"잘 그렸네."
"헤헤."
"이건 뭐야?"
"오빠 옆에 있는 거? 그거 오빠가 좋아하는 로봇!"
내가 로봇을 좋아했었나. 기억이 안 났다. 아니, 기억이 안 나는 게 당연했다. 이건 30년 전의 취향이니까.
어머니가 부엌에서 나오며 말했다.
"민준아, 오늘 학교에서 별일 없었어?"
"없었어요."
"선생님한테 전화 왔는데."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뭐라고요?"
"네가 오늘 수업 진도보다 더 앞서서 풀었다고, 혹시 무슨 학원이라도 다니냐고 물으시더라고."
어머니가 팔짱을 끼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어디 학원 다니면 나한테 말해야지, 왜 몰래 다녀?"
"안 다녀요. 그냥 텔레비전 보면서 배운 거예요."
"텔레비전으로 응용문제를 배운다고?"
어머니 눈빛이 아까 아버지 손 떨림을 물어봤을 때와 비슷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느낀 눈이었다.
"진짜예요. 요즘 그런 프로그램 많이 하잖아요."
"무슨 프로그램인데."
"...교육방송이요."
거짓말이 자꾸 늘어났다. 하나를 막으면 또 하나가 튀어나오는 형국이었다.
[아무래도 좀 더 자연스러워야 할 것 같은데.]
속으로 나에게 경고를 던졌다.
너무 조급하게 능력을 드러냈다. 마흔둘의 뇌를 열두 살 몸에 넣고 살려면, 티가 안 나게 살아야 하는데. 첫날부터 이렇게 삐끗대면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얼마나 더 실수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문제는 하나였다. 30년 치 지식을 머릿속에 담고 열두 살짜리처럼 굴어야 하는데, 습관이란 게 그렇게 쉽게 죽질 않는다는 것.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가는 나를 계속 쳐다봤다. 뒷목이 따가웠다.
아버지가 퇴근하고 돌아왔을 때, 저녁상에서 다시 그 이야기가 나왔다.
"당신 아까 선생님 전화 왔었다며?"
"네, 민준이가 좀 이상해요."
"이상하다니?"
"애가 갑자기 너무 어른스러워졌어요. 말투도 그렇고."
아버지가 나를 흘긋 봤다.
"인마, 너 뭔 일 있어?"
"아무 일도 없어요."
웃으며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계산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정신과 상담이라도 받으러 갈지도 모른다. 1995년 이 시절에 조숙한 아이는 그냥 특이한 아이지만, 너무 특이하면 오히려 관심의 대상이 된다. 게다가 이 시대엔 조기교육이란 개념도 희박해서, 갑자기 애가 응용문제를 다 풀면 그게 신동이 아니라 이상 신호로 읽히는 모양이었다.
숨기는 것과 드러내는 것 사이의 균형을 잡아야 했다. 앞으로 시험 볼 때는 일부러 틀린 답을 몇 개 섞어야 하나. 아니, 그것도 너무 작위적이면 오히려 더 의심받을 텐데.
밥을 먹다가 아버지 손이 또 한 번 살짝 떨렸다. 이번엔 물컵을 놓칠 뻔했다.
"어어, 이거 왜 이래."
컵이 상 위로 미끄러지다가 겨우 멈췄다. 물이 조금 흘러 상보를 적셨다.
어머니는 그저 아버지가 요즘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넘겼지만, 나는 알았다.
이건 시작이었다. 몇 년 후 더 심해질 병의 아주 초기 신호. 손끝의 미세한 떨림, 가끔 물건을 놓치는 것. 30년 후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는 병원 침대에 누워 손을 떨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 병의 씨앗이 벌써 자리를 잡고 있는 거였다.
숨겨야 할 정체성과 지켜야 할 가족의 목숨. 둘 다 놓칠 수 없는 문제였다.
저녁밥을 씹으면서도 머릿속은 복잡했다. 지금 당장 병원에 데려가야 하나. 아니, 이 시기엔 이 증상 하나로는 병명도 못 잡을 텐데. 서두르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일 거고, 늦으면 병이 진행될 거고.
시간이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겠다. 30년이란 세월이 있지만, 그 30년 안에서 몇 년째부터 병이 시작됐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방으로 들어와 창밖을 봤다. 골목 가로등 아래로 자전거 탄 사람이 지나갔다. 딸랑딸랑, 자전거 벨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오늘 하루, 두 번이나 정체를 들킬 뻔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선생님 눈치, 어머니 눈치, 짝꿍 눈치까지 봐야 하는 삶이라니. 마흔둘까지 살면서 이렇게 눈치를 많이 봤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그때 방문 밖에서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민준아, 잠깐 얘기 좀 할까?"
심장이 다시 쿵, 내려앉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어머니가 심각한 표정으로 방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