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회귀공학자

4화

일주일 후 토요일, 어머니가 아버지를 끌고 동네 병원으로 향했다. 나도 따라나섰다. 내가 먼저 얘기를 꺼낸 일이니 결과를 봐야 했다. 토요일 아침 공기는 쌉싸름했다. 골목 어귀 붕어빵 리어카에서 풍기는 단내가 코끝을 스쳤고, 나는 순간 붕어빵 하나 사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니잖아, 강민준. 병원은 허름한 개인 내과였다. 간판은 페인트가 벗겨져서 '내과'의 '내' 자가 반쯤 지워진 채로 매달려 있었고, 유리문에는 오래된 스티커 자국이 얼룩처럼 남아 있었다. 대기실 소파는 낡아서 여기저기 스펀지가 삐져나와 있었고, 벽에는 오래된 건강검진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포스터 속 모델의 얼굴은 색이 바래서 거의 유령처럼 보였다. 옆자리에는 할머니 한 분이 앉아서 연신 부채질을 하고 있었고, 그 옆엔 어린애 손을 잡은 아주머니가 순서를 기다리며 하품을 했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콧속을 찔렀다. 이 냄새, 전생에서도 익숙했다. 마지막 몇 년을 병원 냄새 속에서 살았으니까. "이름 어떻게 되세요?" 간호사가 물었다. "강태호입니다." 아버지가 대답했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그냥 건강검진이요. 애가 자꾸 병원 가라고 해서." 간호사가 나를 힐끗 보고 웃었다. "아드님이 효자시네요." ···효자라기보단 회귀자입니다만. 속으로 삐딱하게 받아쳤지만, 겉으로는 그냥 웃었다. 접수를 마치고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아버지는 다리를 떨었다. 병원이라는 공간 자체가 낯선 사람이었다. 평생 감기 한 번 걸려도 그냥 참고 넘기던 양반이, 열두 살짜리 아들 손에 끌려 여기까지 왔으니 어색할 만도 했다. "태호 씨, 들어오세요." 호명이 되자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와 나도 따라 들어갔다. 진료실에 들어가서 의사가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최근에 물 많이 드세요?" "네, 좀 그런 것 같긴 한데." "소변도 자주 보시고?"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손발이 저리거나 떨리는 느낌은요?" 아버지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거 어떻게 알았어요, 선생님?" 의사가 웃으며 말했다. "전형적인 증상이에요. 혈당 검사 한번 해보시죠." 피를 뽑았다. 간단한 스틱 검사였다. 알코올 솜으로 손끝을 문지르는 소리, 채혈침이 피부를 톡 찌르는 소리. 아버지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는 걸 보고 나는 속으로 조금 웃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저런 건 무서운 모양이다. 몇 분 후 결과가 나왔다. 의사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공복 혈당이 좀 높게 나오네요. 정확한 진단은 추가 검사가 필요하지만, 당뇨 초기 단계로 보입니다." "당뇨요?" 아버지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네. 다행히 초기라서 식습관 관리랑 약물 치료로 충분히 관리할 수 있습니다. 방치하면 나중에 여러 합병증이 올 수 있으니, 지금 잡는 게 중요해요." 합병증. 전생에서 아버지가 결국 세상을 떠난 이유가 바로 그 합병증이었다. 신장 기능 저하, 그다음 심장, 그다음 발끝의 괴사까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병이 진행된 후에야 병원에 갔고, 그때는 이미 늦었다. 병실 침대에 누워 있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잠깐 떠올랐다. 붕대로 감긴 발, 링거 줄, 그리고 힘없이 뜬 눈. 나는 그 기억을 억지로 밀어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초기다. "선생님, 정기적으로 검사받으면 완전히 관리 가능한 거죠?" 내가 물었다. 의사가 나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어, 그렇지. 근데 학생이 이런 것도 관심 있어?" "그냥 아빠 건강이 걱정돼서요." "기특하네." 의사가 볼펜으로 처방전을 쓰면서 덧붙였다. "공복혈당 130 넘어가면 슬슬 조심해야 하고, 식후 두 시간 지나서 180 넘으면 확실히 관리 들어가야 해요. 지금은 그 경계선에 딱 걸려 있는 상태고. 술, 담배 줄이시고 야식 끊으시고. 운동도 좀 하셔야 하고." "운동은 무슨 운동을요?" "걷기만 해도 충분해요. 하루 30분씩."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제일 어려운 건데." 어머니가 옆에서 눈물을 글썽였다. "당신, 그동안 별일 없는 척했잖아. 애가 먼저 알았으니 다행이지." 아버지가 씁쓸하게 웃었다. "나도 몰랐는데 애가 어떻게 알았지." 두 사람이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이거 또 위험한 시선이다.] 속으로 경계했지만, 다행히 이번엔 더 캐묻지 않았다. 아마 "애가 효자라서 관심을 많이 가졌나 보다"는 쪽으로 결론 내린 모양이었다. 병원을 나서면서 처방약을 받았다. 메트포르민이라는 약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전생에서 들어본 익숙한 약이었다. 하얀 봉투에 담긴 약을 아버지가 신기하다는 듯 들여다봤다. "이거 먹으면 되는 거지?" "하루 두 번, 식후에요." 내가 말하자 어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그건 또 어떻게 알아?" "약국 아저씨가 그렇게 말할 거예요, 아마." 억지로 둘러댔지만 속으로는 뜨끔했다. 조심해야지. 이렇게 자꾸 티 내다가는 언젠가 정체가 발각될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머니가 아버지 팔짱을 끼고 걸었다. "이제부터 술도 줄이고, 밥도 골고루 먹고." "알았어, 알았어." 아버지가 귀찮다는 듯 대답했지만, 표정은 안심한 기색이었다. 나는 뒤에서 두 사람을 따라 걸으며 속으로 시간을 계산했다. 지금 잡은 초기 당뇨. 이대로 관리하면 5년, 10년 뒤에도 아버지는 건강할 거다. 전생과는 완전히 다른 길이었다. 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다. 아버지 회사, 동양전자의 구조조정. 이건 병보다 더 급한 문제일 수도 있었다. 시기를 정확히 알아야 대응할 수 있는데, 지금은 정보가 부족했다. 집에 도착하자 서연이가 뛰어나와 아버지 다리를 잡았다. "아빠, 병원 갔다 왔어?" "응, 아빠 이제 건강해질 거야." 서연이가 까르르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 작은 승리가 얼마나 큰 의미인지 새삼 느꼈다. 전생에서 지키지 못했던 것을 이번엔 지켰다. 하지만 시계는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1995년 3월, 6월엔 삼풍백화점, 1997년엔 외환위기, 그리고 언젠가는 동양전자의 몰락. 지켜야 할 게 너무 많았다. * * * 그날 밤, 저녁 식사 후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러 마당으로 나갔다. 나도 따라 나갔다. 마당에는 어스름이 깔려 있었고, 옆집 개가 멀리서 몇 번 짖다가 조용해졌다. 아버지가 라이터를 딸깍거리는 소리, 담배 끝이 붉게 타오르는 냄새. "아빠." "응?" "회사 요즘 많이 힘들어요?" 아버지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어, 뭐 조금. 근데 넌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알았어?" "엄마가 말해줬어요." "쳇, 그 얘기까지 애한테 하다니." 아버지가 씁쓸하게 웃었다. "요즘 시장 상황이 안 좋아서 그래. 우리 회사만 그런 게 아니고, 전자업계 전체가 좀 흔들려. 반도체값이 떨어져서 다들 죽는소리 하고 있다." "반도체값이 왜 떨어져요?" "글쎠, 그건 아빠도 잘 몰라. 위에서 그렇다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아버지가 담뱃재를 털며 덧붙였다. "근데 너 요즘 뉴스도 보냐? 중학교 1학년짜리가 반도체값 얘기를 하고." "학교에서 배웠어요." 거짓말이었다. 학교에서 그런 걸 가르칠 리가 없다. 다만 전생의 기억 속엔 1995년 하반기부터 반도체 가격이 폭락하면서 전자업계 전체가 휘청였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만약에요, 만약에 회사가 어려워지면 아빠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글쎄, 그런 일은 없어야지." 아버지가 담배를 끄며 나를 바라봤다. "인마, 넌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공부만 해. 애가 무슨 회사 걱정을 다 해." 웃으며 넘겼지만, 나는 알았다. 동양전자는 결국 못 버틸 거다.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지만, 늦어도 몇 년 안에 무너질 거다. 그때가 오기 전에, 아버지에게 다른 선택지를 만들어줘야 했다. 돈이 필요했다. 그것도 지금 당장 벌 수 있는 방법이. 1995년의 대한민국. 곧 인터넷과 PC통신의 시대가 열리고, 몇 년 후엔 IMF가 터지고, 그 폐허 속에서 새로운 부자들이 탄생할 것이었다. 나는 그 미래를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 지식을 열두 살 몸으로 어떻게 현실화하느냐였다. 방으로 돌아와 노트를 펼쳤다. 낡은 스프링 노트에 나는 조심스럽게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검색엔진, 전자상거래, 그리고 몇 년 후 코스닥에 상장할 회사들의 이름. 연필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만 방 안에 가득했다. 창밖에서는 옆집 라디오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뭔가를 담담하게 읊고 있었는데, 무슨 내용인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자본이 없었다. 열두 살 아이가 무슨 돈이 있겠는가. 저축한 용돈이라고 해봤자 만 원짜리 몇 장이 전부였다. 그걸로는 뭘 시작하기도 전에 끝날 판이었다. 부모님한테 사업 자금을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은행에서 대출을 해줄 리도 없다. 답이 안 나오는 계산을 몇 번이나 반복하다가 노트를 덮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따르르릉. 거실에서 어머니가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어, 재현 씨? 오랜만이네요." 박재현. 어렴풋이 기억나는 이름이었다. 방계 친척 중에 컴퓨터를 좋아하던 아저씨가 있었던 것 같은데. 명절 때 몇 번 본 게 전부라서 얼굴도 가물가물했다. "민준이요? 잘 지내죠. 왜요?" 어머니 목소리가 이어졌다. "컴퓨터를 좋아한다고요? 그런가 봐요, 요즘 좀 이상하게 똑똑해졌어요." 나는 방문을 열고 거실을 내다봤다. 어머니가 수화기를 어깨에 걸치고 통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표정이 뭔가 흥미로운 얘기를 듣는 것처럼 밝아져 있었다. "어, 잠깐만요, 얘 좀 바꿔줄까요?" 수화기가 나를 향해 흔들렸다. 뭔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실마리가 걸려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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