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다정한 거짓말

1화

오전 일곱 시, 서울 마포구의 한 아파트. 창문 틈으로 스며든 햇살이 거실 바닥을 가로지르며 길게 늘어졌고, 그 빛의 궤적을 따라 먼지 알갱이들이 천천히 부유하는 모습을 서하윤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아들 이도윤의 옷가지를 정리하는 손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작은 배냇저고리와 아직 접힌 자국이 채 펴지지 않은 우주복 하나를 서랍장 안에 차곡차곡 밀어 넣으면서, 그녀는 노트북 화면 위로 어제 돌잔치 때 찍은 사진들을 하나씩 넘겨보고 있었는데, 마우스 휠을 돌리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유난히 느렸다. 하얀 한복을 입고 상 앞에 앉아 실타래를 잡던 도윤의 통통한 손가락이, 화면 속에서 몇 번이고 반복 재생되는 짧은 영상 안에서 꼼지락거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는 그녀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렸지만 마음 한쪽은 이상하게 텅 빈 채로 가라앉아 있었다. 동영상 속 아이가 실타래 대신 돈을 집어 드는 순간마다 하객들이 웃음을 터뜨렸고, 그 왁자한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거실로 흘러나올 때에도 하윤의 표정은 어딘가 반박자쯤 늦게 따라가는 느낌이었다. "여보, 도윤이 우유 먹일 시간이야." 부엌에서 걸어 나온 이민준이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다정하게 말을 건네자, 하윤은 노트북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준은 서른일곱, 가구 디자이너로 자신의 작업실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손끝이 거칠어도 아이를 안는 팔의 각도만큼은 언제나 조심스러웠고, 그 조심스러움이 하윤의 가슴 한 켠을 매번 찌르듯 파고들었다. 목재를 다루는 사람 특유의, 손등 위로 굳게 자리 잡은 흉터 자국이 아이의 뺨을 스칠 때마다 그는 숨을 죽이듯 조심스럽게 손의 방향을 바꾸었고, 그 사소한 배려가 하윤에게는 언제나 미안함으로 되돌아왔다. "오늘 회사 몇 시에 나가?" 그가 아이를 흔들며 묻자, 하윤은 젖병을 데우려 물을 올리며 짧게 대답했다. "열 시쯤. 오후에 저자 미팅이 있어서." 거짓은 아니었다. 다만 그 미팅 뒤에 예정된 다른 약속에 대해서는, 그녀는 굳이 입을 열지 않았을 뿐이었다. 민준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도윤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고, 그 무해한 신뢰의 표정이 하윤의 손끝에 미세한 떨림을 남겼는데, 그녀는 그 떨림을 애써 물이 끓는 소리 속으로 흩어 보냈다. "오늘 저녁엔 뭐 먹을까." 민준이 아무 일 없다는 듯 묻는 목소리가 부엌 타일 벽에 부드럽게 부딪혔고, 하윤은 냄비 속 물방울이 표면 위로 하나둘 올라오는 것을 지켜보며 "당신 좋아하는 거."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이 너무 손쉽게 나왔다는 사실을, 그녀는 뒤늦게 깨달았다. 젖병을 흔들어 온도를 확인하며 손목에 살짝 대어보는 순간, 물의 미온함이 오래전 어느 겨울밤 마셨던 뜨거운 술의 온기를 불러왔고, 그 감각의 실마리를 따라 그녀의 기억은 순식간에 오 년 전 그날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 그 시절 하윤은 스물세 살, 작은 출판사의 계약직 편집자였다. 야근이 끝난 밤이면 팀원들과 어울려 회사 근처 술집에 자주 들렀는데, 낡은 목조 인테리어에 늘 담배 냄새가 조금씩 배어 있던 그 좁은 술집은 그들에게 두 번째 사무실 같은 곳이었다. 그날은 유독 사람이 많았고, 오랜만에 얼굴을 비춘 선배 강태호가 테이블 끝에 앉아 있었다. 강태호. 서른다섯이던 그는 몇 해 전 다른 출판사로 이직한 뒤였는데, 세월이 그의 얼굴에서 앳된 티를 걷어내고 대신 침착한 그늘을 심어놓았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놓은 채 술잔을 돌리는 손가락의 움직임 하나에도 여유가 배어 있었다. 그가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테이블의 공기가 미묘하게 가라앉는 느낌이었고, 후배들은 저마다 말투를 조금씩 가다듬으며 그의 잔에 술을 채우기 바빴다. "하윤아, 오랜만이다." 그가 낮게 웃으며 이름을 부르자, 하윤은 순간 목덜미가 뜨거워지는 느낌에 술잔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주변에서 누군가 그의 안부를 묻고, 옛 회사 시절 이야기가 이어지고, 웃음소리가 몇 차례 오갔지만, 하윤의 귀에는 그 모든 소리가 유리 너머의 웅웅거림처럼 멀게만 들렸다. 그 시절 그녀에게 태호는 회사에서 가장 다정했던 선배였고, 서투른 원고를 붙잡고 밤을 새우던 그녀에게 커피를 사다 놓아주던 사람이었으며, 동시에 손이 닿을 수 없는 어른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었는데, 그 거리감이 지금 이 순간 눈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좁혀지고 있었다. 한때는 그가 건네는 캔커피 하나에도 하루 종일 마음이 들뜨던 시절이 있었고, 야근으로 지친 눈을 비비다가 그가 조용히 책상 위에 올려두고 간 초콜릿을 발견했을 때의 그 작은 설렘을, 그녀는 잊었다고 생각했었다. "결혼하셨다고 들었는데." 하윤이 조심스레 운을 떼자, 태호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어깨를 살짝 으쓱했다. "애가 벌써 둘이야. 큰애는 벌써 고등학생이고." 그가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그 담담함 속에는 뭔가 지친 기색이 스쳐 지나갔고, 하윤은 그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행복해 보이세요." 그녀가 웃으며 건넨 말에 태호는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 침묵의 길이가 하윤에게는 어떤 대답보다도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듯했다. 술자리가 길어지고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면서, 어느새 테이블에는 그와 그녀 둘만 남게 되었는데, 창밖으로 지나가는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술집 유리창에 부딪혀 흔들릴 때마다 하윤의 심장도 함께 흔들리는 듯했다. 빈 술병들이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늘어서 있었고, 얼음이 다 녹아버린 잔 속에서 위스키의 색깔만 흐릿하게 남아 있었으며, 종업원이 마감을 알리는 눈치를 몇 번이나 보냈지만 둘 다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많이 컸네, 너." 태호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하자, 하윤은 그 시선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며 숨을 짧게 삼켰다. 그의 눈빛이 예전과는 다른 온도를 담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애써 모른 척하려 했지만, 목덜미를 타고 오르는 열기는 이미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번져가고 있었다. *** 젖병 속 물의 온도가 손목을 지나 어깨까지 번지는 느낌에, 하윤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현재로 돌아왔다. 부엌의 흰 타일과 창문 밖으로 보이는 낮은 담장, 그리고 아이의 옹알이 소리가 그녀를 다시 현실로 끌어당겼고,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며 스스로에게 지금이 몇 시인지, 여기가 어디인지를 다시 일깨웠다. "여보, 도윤이 배고픈가 봐." 민준의 목소리가 다시 그녀를 불렀고, 그녀는 젖병을 들고 그에게 다가가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이를 넘겨받아 안는 순간, 도윤의 작은 손이 그녀의 옷깃을 움켜쥐었는데, 그 무구한 손짓이 그녀의 가슴 한복판을 서늘하게 찔러왔다. 품 안에서 꼴깍꼴깍 젖병을 빠는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이어지는 동안, 하윤은 아이의 정수리에 코를 묻고 냄새를 맡았는데, 우유 비린내와 섞인 아기 특유의 달큰한 살냄새가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이건 다 지나간 일이야.' 그녀는 속으로 되뇌었지만, 그 말이 스스로에게조차 완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민준은 그런 그녀의 표정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도윤의 볼을 살짝 만지며 웃음을 지었고, 그 순박한 다정함이 오늘따라 하윤에게는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우리 도윤이, 엄마 힘든 거 아빠가 다 알아줄까?" 민준이 아이의 뺨을 어루만지며 장난스레 건넨 말에, 하윤은 짧게 웃어 보였지만 그 웃음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그녀 자신도 알지 못한 채였다. 식탁 위에 놓인 시계가 어느새 여덟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고, 그녀는 아이를 다시 민준에게 넘긴 뒤 방으로 들어가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옷장 앞에 서서 오늘 입을 옷을 고르는 손끝이 평소보다 유난히 느렸는데, 결국 그녀는 가장 무난한 회색 재킷을 꺼내 입으며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거울 속 여자는 평범한 출근 복장을 한 채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 속에는 무언가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현관을 나서기 전, 하윤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는데, 화면에 뜬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어버렸다. [강태호] 현관 앞 신발장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순간 낯설게 느껴졌고, 도윤을 안은 채 배웅을 나온 민준이 "왜, 무슨 일 있어?" 하고 묻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아니, 아무것도." 그녀는 휴대폰을 가방 안으로 서둘러 밀어 넣으며 대답했지만, 그 목소리가 스스로 듣기에도 어딘가 어색하게 갈라져 있었다. 오 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그 이름이 다시 그녀의 아침을 갈라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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