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다정한 거짓말

5화

이듬해 초봄, 산부인과 진료실. 하얀 벽지와 은은한 소독약 냄새가 뒤섞인 공간 안에서, 하윤은 진료대에 누운 채 배 위로 미끄러지는 차가운 젤의 감촉에 몸을 살짝 움츠렸는데, 그 서늘함이 오히려 그녀의 신경을 곤두세우며 지금 이 순간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임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초음파 프로브가 배 위를 천천히 움직이는 동안, 화면 위로 흐릿한 형상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고, 그 안에서 작은 심장이 규칙적으로 팔딱이며 뛰는 것이 보였는데, 그 미세한 움직임 하나에 진료실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다른 밀도로 바뀌는 듯했다. "들려? 심장 소리." 민준이 벅찬 목소리로 물으며 화면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이 화면 모서리를 스치듯 가리키는 동안, 옆에 앉은 그의 손이 어느새 하윤의 손을 찾아 꽉 움켜쥐었는데, 그 손의 떨림 속에서 순수한 기쁨이 그대로 전해져왔고, 하윤은 그 진동을 손바닥으로 받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들려." 그녀가 애써 눈물을 삼키며 대답했는데, 그 눈물의 절반은 기쁨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그녀만이 아는 무거운 죄책감이었으며, 그 두 감정이 뒤섞여 그녀의 목을 조여왔다. 의사가 태아의 심박수를 확인하며 건강 상태를 짧게 설명해주는 동안, 민준은 연신 화면을 들여다보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고, 하윤은 그런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문득 이 순수한 행복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가늠해보았지만, 그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임신 기간 동안 하윤은 태호와의 만남을 자연스럽게 줄여나갔는데, 그것이 도덕적 결단이라기보다는 몸이 허락하지 않는 물리적 제약에 가까웠고, 배가 불러오면서 예전처럼 몸을 움직이기가 버거워지자 그녀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태호로부터 오는 연락도 자연스럽게 줄었는데, 가끔 도착하는 짧은 안부 문자에 그녀는 짧게 답장을 보내는 것으로 대신했고, 그 건조한 문장들이 예전의 뜨겁던 관계와는 전혀 다른 온도로 오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그 사실이 오히려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는 것을 스스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자연스럽게 끝날 수도 있겠다.' 그녀는 늘어난 배를 두 손으로 감싸며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생각이 얼마나 얕은 바람인지는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 그해 겨울, 이도윤이 태어났다. 산부인과 병상 위에서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물러나기를 반복하는 동안, 하윤은 이를 악물고 간호사의 지시에 따라 숨을 몰아쉬었는데, 그 고통의 정점에서 작고 붉은 얼굴이 첫 울음을 터뜨렸다. 높고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병실 안을 가득 채우는 순간, 하윤의 눈에서는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흐릿한 시야 속에서 민준이 아이를 조심스럽게 받아 안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는데, 그 장면이 그녀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각인처럼 새겨졌다. 민준의 두 팔이 아이의 작은 몸을 감싸안는 순간,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하윤은 보았고, 그 떨림 속에서 그가 느끼는 경이로움과 사랑이 그대로 전해져와, 그녀는 그 순간만큼은 자신의 고통조차 잊어버렸다. "고마워, 여보. 정말 고마워." 민준이 아이를 품에 안은 채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을 때, 그의 입술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그녀의 이마를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는데, 하윤은 그 순간만큼은 자신의 이중생활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듯한 착각에 빠졌고, 그 착각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간호사가 아이를 데려가 몸을 씻기고 데려오는 동안, 민준은 병상 옆에 서서 하윤의 손을 놓지 않았는데, 그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그녀의 차갑게 식어가는 손끝을 조금씩 데워주었고, 그 온도의 차이가 그녀에게는 이상하게도 아프게 느껴졌다. *** 산후조리를 마치고 다시 회사로 복귀할 무렵, 태호로부터 짧은 문자가 도착했다. [아기는 건강해?]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는 순간, 하윤의 심장은 여전히 미세하게 반응했는데, 그 반응의 정체가 애정인지 익숙함인지 그녀는 더 이상 구분할 자신이 없었고, 그저 짧게 [응, 건강해.]라고 답장을 보낸 뒤 휴대폰을 서랍 깊숙이 밀어넣었다. 돌잔치를 치르기까지의 일 년여 동안, 하윤과 태호의 관계는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채 미묘하게 이어졌는데, 만남의 횟수는 눈에 띄게 줄었지만 그 대신 서로의 안부를 묻는 문자와 짧은 통화가 그 자리를 대신했고, 그것이 오히려 관계를 더 질기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가끔 야근이 늦어지는 날이면, 태호가 회사 근처 카페에서 잠깐 얼굴이라도 보자며 연락을 해왔고, 하윤은 그럴 때마다 몇 번이고 거절의 말을 준비했다가도 결국 발걸음을 그쪽으로 옮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는데, 그 습관 같은 끌림이 그녀를 매번 좌절하게 만들었다. 민준은 아이가 태어난 뒤로 더욱 자상해졌는데, 밤중 수유를 자청하며 새벽에도 조용히 일어나 아이를 안고 거실을 서성였고, 주말이면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공원을 산책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여유까지 보였다. 하윤이 조금이라도 피곤한 기색을 보이면 곧바로 대신 나서서 집안일을 챙겼고, 설거지를 하다 말고 아이 우는 소리가 들리면 손에 묻은 물기를 대충 닦아내며 방으로 뛰어가는 그 모습이, 그 헌신적인 모습이 하윤에게는 감사함과 동시에 참을 수 없는 무게로 다가왔다. *** "오늘 회사 힘들었지." 어느 저녁, 민준이 도윤을 재우고 나와 그녀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물었다. 그의 두 손이 그녀의 굳은 어깨를 부드럽게 눌러오는 동안, 하윤은 그 손길의 따뜻함 속에서 문득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는데, 그것은 사랑에서 오는 감정이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그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견딜 수 없는 회한이기도 했다. "응, 괜찮아." 그녀가 짧게 대답하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민준은 아무 의심 없이 그녀를 감싸 안았고, 그 넓은 품 안에서 느껴지는 규칙적인 심장 박동이 그녀의 귓가에 낮게 울렸는데, 그 무조건적인 신뢰가 오늘따라 그녀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거실 창밖으로 늦은 봄바람이 커튼을 살짝 흔들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고, 도윤이 자고 있는 방문 틈으로 새어나오는 야간등의 희미한 빛이 두 사람의 발끝에 닿아 있었는데, 그 평온한 풍경이 오히려 하윤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언제까지 이럴 수 있을까.' 그녀는 속으로 물었지만,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스스로 내릴 용기는 없었고, 그저 민준의 어깨에 얼굴을 더 깊이 파묻으며 그 온기 속에 잠시라도 숨고 싶었다. *** 도윤의 돌잔치를 며칠 앞둔 어느 밤, 하윤이 아이를 재우고 거실로 나오자 휴대폰이 조용히 진동했다. 식탁 위에 엎어놓았던 휴대폰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발견한 순간, 그녀는 잠시 손을 뻗기를 주저했는데, 그 짧은 망설임 속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스며 있었고, 결국 그녀는 천천히 휴대폰을 들어 화면을 확인했다. 화면에 뜬 문장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집사람이 알아챈 것 같아. 우리 얘기 좀 해야 할 것 같다.] 그 짧은 문장 하나가 그녀의 손에서 휴대폰을 놓칠 뻔하게 만들었는데, 심장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내려앉는 듯한 감각과 함께, 그녀의 머릿속에는 지난 일 년간 애써 눌러두었던 불안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거실의 시계가 낮게 똑딱거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채우는 가운데, 하윤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선 채로 화면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고, 그 문장의 무게가 서서히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며 앞으로 다가올 파국의 그림자를 예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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