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교문을 나서자마자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잔뜩 흐린 하늘이 종일 심상치 않더니 결국 터진 모양이었다. 나는 우산도 없이 가방을 머리 위로 뒤집어쓴 채 뛰기 시작했는데, 마침 눈에 들어온 편의점으로 무작정 몸을 던졌다. 삼각김밥이라도 사서 저녁 전에 배를 채울 생각이었다. 오늘은 야간자율학습이 없는 날이라 집에 가서 저녁을 챙겨 먹을 여유가 없었으니까.
딸랑, 문이 열리는 소리에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무심하게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형광등 불빛 아래로 몸을 밀어 넣으니 젖은 교복 소매가 서늘하게 팔뚝에 감겨왔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느끼며 나는 삼각김밥 코너로 걸음을 옮겼다.
참치마요와 불고기, 둘 중 뭘 고를지 진지하게 고민하던 참이었다. 별것 아닌 일에도 괜히 오래 서서 고민하는 게 습관이었다. 그러다 무심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우산 없이 서 있는 누군가의 실루엣이 눈에 걸렸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고 있었는데도 그 사람은 처마 밑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이상하다 싶어 다시 눈을 가늘게 뜨고 살폈다. 흑발 울프컷, 익숙한 교복 색깔. 심장이 쿵,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다.
한이슬이었다.
삼각김밥을 계산대에 그냥 내려놓고 나는 편의점 문을 밀치고 나갔다. 빗물이 얼굴에 튀는 것도 신경 쓰지 못한 채 그녀에게 다가갔다. 신발이 순식간에 젖어드는 게 느껴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저기, 한이슬……?"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는데, 그 표정이 순간 얼어붙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들켜서는 안 될 걸 들킨 사람처럼, 자주색 눈동자가 흔들리며 나를 응시했다. 빗물에 젖은 앞머리가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고, 그 사이로 보이는 눈매가 평소 학교에서 보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강민준." 그녀가 내 이름을 낮게 뇌듯 말했다. 목소리에 물기가 서려 있었다. 비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우산도 없이 뭐 해. 감기 걸려." 나는 별생각 없이 말을 던졌는데, 그 말이 나오자마자 후회했다. 너무 뻔한 소리였으니까. 그녀는 대답 없이 시선을 떨궜다. 어깨에 걸친 가방끈을 꽉 움켜쥔 손가락이 하얗게 질려 있는 게 보였다. 관절이 도드라질 정도로 힘을 준 손이었다.
"집에 안 가?" 다시 물었다. 그녀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빗줄기가 점점 그녀의 교복을 적셔갔고, 나는 어쩔 줄 몰라 편의점 처마 밑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일단 여기서 비라도 피해." 손목을 잡아끄는데, 그녀가 순간 몸을 움찔하며 뒤로 빼는 게 느껴졌다. 놀란 짐승처럼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마치 손이 닿는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사람처럼, 그녀의 몸 전체가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미안." 나는 얼른 손을 놓았다. 괜히 무례했나 싶어 마음이 무거워졌다. 왜 저렇게까지 놀라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아서 더 신경이 쓰였다.
처마 밑에 서서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빗소리만 요란하게 아스팔트를 두드렸다. 근처 가로수 잎사귀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 편의점 안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가 뒤섞여 묘하게 어색한 정적을 채웠다. 나는 옆에서 그녀의 얼굴을 살짝 살폈는데, 물에 젖은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눈가가 붉었다. 울었던 걸까.
평소 학교 복도에서 스쳐 지나갈 때 보던 한이슬은 늘 도도하고 차가운 인상이었다. 모델 일을 병행한다는 소문 때문인지 다른 애들과 어울리는 법도 없었고, 누가 말을 걸어도 짧게 대답하고 자리를 뜨는 편이었다. 그런 애가 지금 이렇게 비를 맞으며 서 있는 모습을 보니, 뭔가 낯설고도 마음이 쓰였다.
"오늘 집에 안 가려고?"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그녀는 한참 침묵하다가, 시선을 발끝으로 떨어뜨린 채 작게 입을 열었다.
"……갈 곳이 없어서."
그 한마디가 가슴을 훅 찔렀다. 심장이 갓 잡은 활어처럼 팔딱거리는 걸 느끼며,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마치 방금 흘린 말을 후회하는 사람처럼,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빠랑, 좀. 문제가 있어서." 그녀가 다시 낮게 덧붙였다. 그게 다였다. 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그 짧은 말속에 얼마나 많은 것이 눌려 있는지 어렴풋이 느껴졌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애써 눌러 참는 듯한 느낌이었다.
편의점 유리창에 비친 그녀의 모습이 물 밖으로 던져진 물고기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화려한 모델이라는 타이틀 뒤에 이런 얼굴이 숨어 있었다는 게, 이상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늘 카메라 앞에서 보던 화보 속 자신감 있는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작고 여린 얼굴이었다.
"저녁은 먹었어?" 다른 걸 물어봤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먹은 얼굴이었다. 입술이 살짝 마르고 갈라진 게 보였다. 나는 아까 계산대에 두고 온 삼각김밥이 떠올라 다시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만 기다려."
급하게 삼각김밥 두 개와 캔음료를 사서 나왔는데,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도망치지 않고. 그 사실이 왜인지 안심이 됐다.
"먹어." 삼각김밥을 건네자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받았다. 손끝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포장을 뜯는 것조차 서툴러서, 결국 내가 대신 뜯어줬다. 포장지 끝을 손톱으로 걸어 조심스레 벗겨내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고마워." 작은 목소리였다. 삼각김밥을 베어 물던 그녀의 눈가가 다시 붉어지는 게 보였다. 씹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입에 물고 있는 것 같았는데, 억지로 삼키려는 듯 목이 움직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애써 못 본 척, 빗줄기가 조금 약해진 하늘을 바라봤다.
"어디서 잘 거야?"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캔음료를 쥔 손이 무릎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고, 시선은 계속 바닥의 젖은 아스팔트만을 향해 있었다.
빗물이 그녀의 발끝을 적시며 흘러내렸고, 나는 그 순간 뭔가 결심 같은 게 가슴 안에서 단단하게 자리 잡는 걸 느꼈다. 이 애를 그냥 이대로 두고 갈 수는 없다는, 이상한 확신이었다. 머릿속으로 온갖 계산이 스쳐 지나갔다. 부모님이 뭐라고 할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런 것들이 순식간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나랑 갈래?" 말이 먼저 튀어나갔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 역시도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뒤늦게 정정하려 했지만, 이미 뱉어진 말은 되돌릴 수 없었다.
"……진심이야?"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주색 눈동자에 처음으로 뭔가 다른 빛이 스쳤다. 경계와 기대가 뒤섞인, 복잡한 눈빛이었다. 손끝으로 캔음료를 꾹 쥐는 게 보였는데, 그 힘이 어찌나 센지 캔 표면이 살짝 움푹 들어갈 정도였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후회는 없었다. 빗소리가 점점 잦아드는 가운데, 그녀의 시선이 오래도록 내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마치 이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몇 번이고 확인하려는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