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우리 집, 별로 크진 않은데." 나는 우산을 나눠 쓴 채 앞장서서 걸으며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이슬은 대답 없이 반보 뒤에서 조심스럽게 따라왔는데, 우산 밖으로 삐져나온 어깨가 자꾸 비에 젖었다. 빗방울이 그녀의 옷깃을 타고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이쪽으로 붙어." 내가 우산을 살짝 그녀 쪽으로 기울이자, 그녀가 흠칫 놀라며 거리를 좁혔다. 그러다가도 다시 슬그머니 반보쯔 떨어지는 걸 보고, 나는 굳이 더 말하지 않았다. 억지로 붙잡을 필요는 없었다.
걸으면서도 나는 자꾸만 궁금한 게 많아졌다. 빗소리 사이로 우산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빠랑 무슨 일 있었어?"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그녀가 잠시 침묵하다가 낮게 입을 열었다.
"……재혼하셨어. 새엄마가." 짧은 문장이었다. 그 이상은 없었지만, 나는 그 안에 숨겨진 무게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이랑 같이 사는 게, 좀 힘들어서." 그녀가 덧붙였다. 목소리에 감정이 없는 듯 건조했지만, 그 건조함이 오히려 더 아프게 느껴졌다.
"오늘로 며칠째야?" "오늘이 처음." 그녀가 짧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오늘 처음으로 집을 나온 거구나. 나는 괜히 마음이 무거워져서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대신 걸음을 조금 늦춰서 그녀가 따라오기 편하게 맞췄다.
골목을 몇 번 돌아 우리 집 앞에 도착했다. 이슬이 잠시 멈춰 서서 대문을 올려다봤다. 낡은 초록색 대문 위로 빗물이 흘러내리는 걸 그녀는 한참 바라보았다. "……괜찮을까." 그녀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들렸다. 나는 그 말을 못 들은 척, 먼저 현관문을 열었다.
"오빠 왔어?" 안에서 서윤이 목소리가 들리더니, 곧 현관으로 나온 여동생이 나를 반겼다. 검은 롱헤어를 하나로 묶은 서윤은 나를 보다가 뒤에 서 있는 이슬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손님이야?" 서윤이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 나는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는데, 이슬이 먼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실례합니다."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우와, 예쁘다……" 서윤이 감탄하듯 이슬을 훑어보더니, 금세 반가운 얼굴로 다가갔다. "저 강서윤이에요! 오빠 동생! 근데 왜 다 젖었어요? 우산 없었어요?"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이슬이 살짝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어깨가 움츠러들고, 시선이 갈 곳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사정이 있어서 잠깐 있다 갈 거야." 내가 대신 대답하며 상황을 정리하려 했지만, 서윤은 이미 이슬의 손을 붙잡고 안으로 이끌고 있었다. "일단 옷 갈아입어요!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그 당당한 태도에 이슬도 얼떨결에 끌려 들어갔다. 나는 신발을 벗으며 그 뒷모습을 보다가, 괜히 웃음이 나왔다. 서윤은 언제나 저런 식이었다. 낯선 사람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일단 마음이 가면 몸이 먼저 움직이는 애였다.
서윤은 자기 방에서 여벌 옷을 꺼내 이슬에게 건네줬고, 이슬은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감싼 그녀의 모습이 평소와는 다르게 훨씬 부드러워 보였다. 화려한 모델의 이미지보다는, 그냥 또래 여자애 같은 얼굴. 서윤이 빌려준 헐렁한 티셔츠 밑으로 손목이 유난히 가늘어 보였다.
"딱 맞네요! 다행이다." 서윤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이슬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이슬은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어색하게 서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시선을 피했다.
저녁을 준비하며 나는 냉장고를 뒤적였다. 부모님은 늦게 오신다고 미리 문자를 보내놓으셨으니, 저녁은 알아서 챙겨야 했다. 계란과 김치, 남은 밥으로 볶음밥을 만들기로 했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계란을 풀어 넣는 동안, 서윤이 옆에서 재잘거리며 이슬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다. "언니 모델이라면서요! 진짜예요?" 이슬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신기하다…… 저 나중에 언니 화보 나오면 저 사인해 주세요!"
기름이 지글거리는 소리와 서윤의 웃음소리가 뒤섞여 부엌을 채웠다. 이슬은 식탁 앞에 앉아서 그 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가끔 시선을 들어 나를 보다가, 다시 얼른 고개를 숙이곤 했다. 나는 볶음밥을 뒤적이며 괜히 그 시선이 신경 쓰였다.
밥이 다 되고 셋이 식탁에 앉았을 때, 이슬은 젓가락을 든 채 한참 머뭇거렸다. 배가 많이 고팠을 텐데도 선뜻 먹지 못하는 그 모습에 나는 다시 마음이 쓰였다. 젓가락 끝이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많이 먹어." 툭 던지듯 말했더니, 그녀가 조심스레 한 숟갈을 떴다.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는 소리, 서윤이 재잘대는 소리, 창밖에서 여전히 내리는 빗소리. 그 평범한 소음들 속에서 이슬은 천천히, 조금씩 밥을 먹어나갔다. 처음엔 한 숟갈 뜨고 멈추더니, 어느새 속도가 붙어서 정말 배가 고팠다는 걸 그제야 드러냈다.
저녁을 먹는 동안 이슬은 별말이 없었지만, 서윤의 쉼 없는 이야기에 가끔 짧게 웃음을 보이기도 했다. 그 웃음이 처음 봤을 때의 서늘한 인상과는 전혀 다른, 옅고 여린 미소였다. 나는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콧잔등이 시큰거리는 걸 느꼈다.
"언니 몇 살이에요?" 서윤이 물었다. "……열일곱." "저랑 한 살 차이네요!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이슬이 잠시 멍한 얼굴로 서윤을 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식사가 끝날 무렵, 서윤이 그릇을 정리하며 물었다. "언니 오늘 여기서 자는 거예요?" 순수한 질문이었는데, 이슬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나는 얼른 끼어들었다. "그래, 오늘만. 내일은 생각해보고." 이슬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내렸다.
식사를 마치고 서윤이 방으로 들어간 뒤, 나는 이슬에게 손님방을 안내했다. 복도를 지나며 낡은 마루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오늘은 여기서 자. 이불 새 거 깔아놨어." 그녀는 방문 앞에서 잠시 서성이다가, 나를 돌아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도와주는 거야?"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나는 순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렸다. 사실 나도 잘 몰랐다. 그냥, 그녀를 그대로 두고 갈 수 없었을 뿐이었다.
이슬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대답에 따라 뭔가가 결정될 것처럼, 그 눈빛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
"몰라.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솔직한 대답이었다.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피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그 말을 남기고 방문이 조용히 닫혔다.
나는 방문 앞에 잠시 서 있다가, 문 너머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서야 발을 돌렸다. 내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던졌다. 심장이 아직도 이상하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벽 너머 저편에서 낯선 존재가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천장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를 되짚어봤다. 우연히 마주친 그녀, 비를 맞고 서 있던 뒷모습, 젓가락을 들고 머뭇거리던 손끝, 그리고 옅게 웃던 얼굴. 하나하나가 낯설고도 이상하게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밤,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벽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 때문이었다. 처음엔 빗소리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들으니 그건 흐느끼는 소리였다. 낮고 조용하게, 참으려 애쓰는 듯한 울음소리.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이며 나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녀가 울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내 가슴을 답답하게 조여왔다. 방음이 잘 안 되는 낡은 벽이 오늘만큼 얇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나는 이불을 움켜쥔 채 그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방문을 열고 가서 뭐라도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못 들은 척해야 하나.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흐느낌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가 다시 눕기를 반복했다. 손잡이를 잡는 상상만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시계가 새벽을 향해 가는 동안에도, 벽 너머의 울음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지며 내 잠을 완전히 몰아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