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네게만은 안 들키기로 했다

2화

나는, 게시판 앞으로 다가가면서도 다인이 왜 그렇게 목소리를 높였는지 알지 못한 채였다. 복도 끝, 조 편성표가 붙은 게시판 주위로 아이들이 몰려들어 저마다 이름을 확인하며 소란스러웠고, 나는 그 틈에서 다인의 뒷모습을 먼저 찾았다. 다인은 이미 명단을 다 확인한 듯 발끝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서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는데, 그 손짓이 어쩐지 다급해서 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아이들 틈을 비집고 명단을 확인하는데, 3조 항목 아래 내 이름과 다인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글자로만 존재하는 그 나란함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가슴을 두드리는 건지 나는 알지 못했다. "우리 같은 조야!" 다인이 내 팔을 붙잡고 흔들며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따뜻해서, 나는 순간적으로 이 우연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잊었다. 잊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한참 뒤였다. 주변에서 누군가 "3조 대박이다, 다인이랑 서연이랑" 하고 지나가듯 말했고, 다인은 그 말에 아무렇지 않게 "그렇지?" 하며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의 무게를 다인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 못내 서글프면서도 안심이 되었다. 알면 곤란하고, 모르면 서운한 이 마음을 나는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아직도 모른다. 같은 조가 된다는 게, 방과 후 시간을 더 많이 함께 보내야 한다는 뜻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간이 나에게 얼마나 벅찬 것이 될지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다인의 옆자리에 앉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저릿한데, 앞으로 몇 주를 이렇게 붙어 지내야 한다니. 나는 명단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척하며, 속으로는 이미 오늘 밤 걸려올 다인의 전화를 상상하고 있었다. *** 과제 첫 회의는 다인의 집에서 하기로 했다. 다인이 "우리 집이 학교에서 더 가까우니까" 하고 별생각 없이 정한 일이었는데, 나는 그 별생각 없음이 오히려 더 무섭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다인의 방은 늘 그렇듯 정리가 잘 되어 있었고, 책상 위에는 내가 준 그 실패작 장갑이 여전히 얌전하게 놓여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가슴이 버석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저 장갑을 그냥 서랍에 넣어두지 않고 눈에 보이는 자리에 두는 이유가 뭘까, 나는 궁금하면서도 물어볼 수 없었다. [별거 아니야, 그냥 손이 심심해서 짜본 거야.] 내가 건네며 했던 말이 귓가에 다시 울렸고, 다인은 그때 별말 없이 웃기만 했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알 길이 없었다. "여기 앉아." 다인이 방바닥에 앉으며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좁은 방, 좁은 책상, 자연히 붙어 앉아야 하는 거리였는데 다인은 아무렇지 않게 노트북을 켜고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옆에 앉아 어깨가 스치는 느낌을 온몸으로 느끼며 애써 노트를 펼쳤다. 손끝이 싸늘하게 식는 것 같으면서도 팔뚝이 닿은 부분은 이상하게 뜨거웠다. 이 온도 차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나는 알지 못했다. 다인의 샴푸 냄새인지 뭔지 모를 향이 옆에서 은은하게 풍겨 왔고, 나는 그 냄새를 맡지 않으려 애쓰다가 오히려 더 깊이 들이마시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한심했다. "자, 발표 자료는 이렇게 나누면 될 것 같은데." 다인이 화면을 내 쪽으로 기울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목소리가 귓가에 가깝게 닿아서, 나는 자료의 내용보다 그 목소리의 온도에 더 신경이 쓰였다. "이 부분은 네가 정리한 게 훨씬 나아." 다인이 내가 써놓은 문장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그 손가락이 노트 위를 지나 내 손등을 아주 잠깐 스쳤을 때, 나는 숨을 멈췄다. "고, 고마워." 나는 더듬거리며 대답했고, 다인은 그런 내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채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심했다, 손등에 잠깐 닿은 손가락 하나에 이렇게까지 흔들리는 내가. 다인에게는 그저 스치는 우연이었을 뿐인데, 나는 그 우연을 몇 번이고 되짚으며 손등에 남은 온기가 사라질 때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런 나를 다인이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상상만으로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렇게 두 시간쯤 자료를 정리하다가, 다인이 갑자기 목이 뻐근하다며 두 팔을 뻗어 스트레칭을 했다. 그 팔이 뻗어나가는 궤적 안에 내 어깨가 있었고, 다인의 손목이 내 목덜미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어, 미안." 다인이 웃으며 사과했지만 나는 그 짧은 접촉의 여운이 목덜미에 남아 있는 걸 지우지 못한 채 애매하게 웃어넘겼다. "괜찮아." 나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속으로는 괜찮지 않았다. 전혀. 다인은 스트레칭을 마치고 다시 노트북 앞으로 돌아가며 "우리 좀 쉬었다 할까? 목도 아프고" 하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쉬는 시간이 더 무서웠다. 아무 할 일 없이 다인과 같은 공간에 있는 시간이, 자료를 핑계 삼을 수 없는 시간이. 다인이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동안, 나는 괜히 노트를 다시 정리하는 척하며 옆눈으로 다인을 살폈다. 창밖으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다인의 옆얼굴에 얇게 걸려 있었고, 그 빛이 다인의 눈매를 유난히 부드럽게 만들고 있어서, 나는 잠깐 눈을 뗄 수 없었다. 다인이 문득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을 때 나는 황급히 노트로 눈을 내렸다.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었다. *** 다인의 엄마가 방문을 열고 간식을 내밀며 물었다. "둘이 저녁까지 있다 갈 거니?" 접시 위에는 과일과 쿠키가 소담하게 담겨 있었고, 다인의 엄마는 늘 그랬듯 나를 향해서도 다정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다정함이 고마우면서도, 나는 어쩐지 그 앞에서 죄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딸의 방에서 딸의 친구인 척 앉아 있으면서 속으로는 전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이, 이 온화한 시선을 받아도 되는 걸까. "네, 서연이는 우리 집에서 자고 갈지도 몰라요." 다인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몸속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자고 간다는 말이 이렇게까지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나는 처음 알았다. "어머, 그래? 그럼 서연이 엄마한테 미리 연락드려야겠다." 다인의 엄마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방을 나섰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엄마한테 연락은 해야 하는데." 나는 애써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이미 머릿속은 오늘 밤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온갖 상상으로 어지럽게 얽히고 있었다. 같은 방, 같은 어둠,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 그 상상이 너무 앞서 나가서, 나는 스스로에게 그만하라고 몇 번이나 되뇌어야 했다. 다인은 그런 내 속을 전혀 모른 채, 그저 나를 옆에 두고 자는 게 당연하다는 듯 이불을 두 채 꺼내 나란히 펴기 시작했다. 옷장 깊숙이서 꺼낸 여분의 이불에는 세제 냄새가 배어 있었고, 다인은 그걸 바닥에 툭 던지듯 펼치며 "이거 좀 낡았는데 괜찮지?" 하고 물었다. "괜찮아, 아무거나." 나는 대답하면서도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괜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해가 다 저물어 있었고, 방 안에는 노란 스탠드 불빛만이 은은하게 켜져 있었다. 그 이불 두 채가 나란히 놓이는 순간, 나는 오늘 밤이 얼마나 길어질지를 어렴풋이 예감했다. 다인은 정작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이불을 다 펴고는 "다 됐다" 하며 만족스럽게 웃었고, 나는 그 웃음을 마주 보지 못한 채 그저 목이 마르다는 핑계로 방을 나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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