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교문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이상하게 익숙했다.
벚나무가 늘어선 등굣길, 아침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뻔한 클래식, 신발장 앞에서 실내화를 갈아신는 애들의 웅성거림까지.
'이상하네. 나 여기 처음 온 건데.'
발밑에 깔린 벚꽃 잎사귀 색깔도, 신발장 손잡이의 위치도, 계단 난간의 삐걱거리는 소리까지 낯설지가 않았다.
입학한 지 보름도 안 됐는데 눈에 익은 풍경이라니, 그냥 학교란 다 비슷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뭐, 학교가 다 그렇지. 신발장 냄새도 다 똑같고.'
나는 강도윤이다. 열여섯 살, 평범한 남고생, 딱히 잘하는 것도 없고 딱히 못하는 것도 없는 그런 애다.
반 등수는 중간, 얼굴도 중간, 인기도 중간. 이런 애를 흔히 '있는 듯 없는 듯한 애'라고 부른다.
존재감 없는 게 서러울 때도 있지만 그만큼 편한 것도 사실이었다.
남 눈에 안 띄면 사고 칠 일도 없으니까.
담임이 출석을 부를 때도 내 이름은 늘 다섯 번째쯤이었고, 대답도 딱히 크지 않았다. '강도윤.' 하면 '네.' 하고 끝. 그거면 충분했다.
교실에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창가 쪽 자리에 앉은 유하은이 제일 먼저 보였다.
'저 앤 진짜 유치원 때부터 봤는데.'
하은과 나는 같은 유치원을 다녔다. 그때는 성이 '한'이었다. 한하은.
작년 겨울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성이 유씨로 바뀌었다는 얘기를 들은 건 입학식 날이었다. 반 애들끼리 수군거리는 소리를 우연히 들었던 거다. "쟤 성 바뀐 거 알아?" "아, 그 재혼했다는 애?" 그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그때부터였나. 반 애들 사이에서 하은을 대하는 온도가 묘하게 낮아졌다.
누가 대놓고 괴롭히는 것도 아닌데, 급식실에서 옆자리를 슬쩍 피하고, 조 편성할 때 은근히 마지막까지 남겨두는 식이었다.
체육 시간에 짝을 지을 때도 그랬다. 선생님이 "둘씩 짝지어."라고 하면 순식간에 다 짝이 맺어지고, 남는 건 늘 하은이었다. 그럼 선생님이 대충 "네가 여기 껴." 하고 아무 조에나 밀어 넣는 식.
그게 벌써 보름 가까이 반복되고 있었다.
"강도윤, 뭘 그렇게 봐?"
옆자리 짝꿍이 물었다.
"아니, 그냥."
나는 대충 대답하고 자리에 앉았다.
사실 하은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했다. 정확히 말하면 불안했다.
'왜 저 앨 보면 자꾸 조마조마하지.'
딱히 이유를 댈 순 없었다. 그냥 촉이었다. 아주 안 좋은 촉.
가슴 한쪽이 뻐근한 느낌. 마치 비 오기 전 날씨처럼, 아무 일도 없는데 미리부터 무겁게 가라앉는 그런 느낌이었다.
1교시 시작 전, 반의 시선이 한쪽으로 몰렸다.
이하준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준은 우리 반의 소위 '인싸' 포지션이었다. 키 크고 성격 좋고 운동도 잘하고, 여자애들 사이에서 은근히 인기가 많았다.
근데 이 자식이 좀 둔했다. 누가 봐도 호감 표시를 해도 못 알아채는 스타일.
지난주에도 옆 반 애가 초콜릿을 슬쩍 건넸는데 "이거 왜 나 줘?" 하고 진지하게 물어봐서 그 애가 울면서 도망간 일이 있었다. 그걸 목격한 나는 속으로 '와, 저건 진짜 재능이다.' 하고 감탄했다.
"어, 안녕."
하준이 지나가며 나한테 인사를 했다. 나도 대충 손을 들어줬다.
딱히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서먹한 사이도 아닌, 그냥 반 친구였다.
수업은 여느 때처럼 지루하게 흘러갔다. 국어 선생님이 뭔 시를 읽으라 시켰고, 나는 대충 눈으로만 훑으며 딴생각을 했다. 하은 자리 쪽으로 시선이 자꾸 갔다. 하은은 창밖만 보고 있었다.
'뭘 저렇게 보나.'
창밖에는 딱히 볼 것도 없었다. 그냥 운동장이랑 나무 몇 그루뿐인데.
점심시간, 나는 급식을 받으러 가다가 하은의 신발장 앞을 지나쳤다.
신발장 안에 뭔가 삐죽 나와 있었다.
종이였다. 접힌 채로 구겨진.
'저게 뭐야.'
주위를 살피고 슬쩍 펼쳐 봤다.
손끝이 살짝 떨렸다. 왜 떨리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떨렸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문장 하나.
『재혼충 꺼져』
등에 식은땀이 확 돋았다.
'이게 진짜네.'
소문으로만 듣던 게 아니라 진짜였구나.
머릿속으로 여러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이게 우리 반 애 짓일까, 아니면 다른 반 애가 몰래 넣어놓은 걸까. 필체만 봐서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아무렇게나 눌러쓴 글씨였다.
나는 종이를 도로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손이 먼저 움직였다.
하은한테 보여주기도 뭐하고, 그냥 버리기도 애매해서 일단 챙긴 거였다.
주머니 속 종이가 자꾸 신경 쓰였다. 밥을 먹는 내내 그 감촉이 허벅지에 닿았다.
급식실에서 하은은 혼자 앉아 있었다.
다른 여자애들은 저쪽 테이블에서 웃고 떠드는데, 하은 주변만 유독 조용했다.
하은의 표정은 딱히 슬퍼 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늘 그랬다는 듯 무표정했다.
'저게 더 무섭네.'
익숙해진 무표정. 그건 어떤 종류의 포기 같기도 했다.
밥을 먹는 속도도 일정했다.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그냥 기계처럼 숟가락을 움직이는 느낌. 옆에서 누가 뭐라 해도 안 들리는 사람처럼.
나는 괜히 반대편 테이블에 앉아서 하은 쪽을 자꾸 흘겨봤다. 짝꿍이 "뭐야, 너 왜 그렇게 힐끔대냐." 하고 물어서 "아니, 그냥." 하고 또 대충 넘겼다. 오늘 하루 종일 '그냥'이라는 말만 몇 번을 했는지 세어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날 오후, 청소 당번이라 늦게까지 교실에 남아 있었다.
하필이면 청소 당번 명단에 나랑 하은 둘만 걸렸다. 다른 애들은 벌써 짐 챙겨서 튀었고, 교실엔 딱 우리 둘뿐이었다.
창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고, 붉은 빛이 책상 사이사이로 길게 늘어졌다.
대걸레를 밀던 하은이 갑자기 나를 쳐다봤다.
"저기."
"응?"
심장이 괜히 쿵 했다. '왜, 왜 갑자기 부르는데.'
"우리… 유치원 같이 다녔지?"
"어, 맞아."
하은이 살짝 웃었다. 그 웃음이 왜인지 오래 눈에 남았다.
평소에 보던 무표정이랑 완전히 다른 웃음이었다.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고, 눈이 살짝 접히는. 아주 잠깐이었지만 분명히 봤다.
"기억해줘서 고마워."
"별거 아닌데 뭘."
대충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놀랐다.
'얘가 나한테 먼저 말 거네.'
보름 넘게 같은 반이었는데 하은이 먼저 말을 건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늘 내가 흘끔거리기만 했지, 대화라고 할 만한 걸 나눈 적은 없었으니까.
주머니 속 종이가 또 신경 쓰였다. 지금 꺼내서 물어봐야 하나, 아니면 그냥 모른 척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에 하은은 벌써 대걸레를 정리하고 있었다.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청소를 마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계속 그 종이쪽지를 만지고 있었다.
버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서랍 안에 넣어뒀다.
왜 버리지 않았는지는 그날 밤에도 알 수 없었다.
그냥, 뭔가 시작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좋은 방향으로는 절대 아닌.
저녁을 먹으면서도 엄마가 묻는 말에 대충 대답하다가 두 번이나 젓가락을 놓쳤다. "너 오늘 왜 이렇게 정신이 없어?" 하는 물음에 "그냥 좀 피곤해서요." 하고 넘겼다. 사실 피곤한 게 아니라 머릿속이 복잡했던 거였는데, 그걸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씻고 나와서도 서랍을 몇 번이나 열었다 닫았다 했다. 종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구겨진 채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잠들기 전, 나는 이상한 꿈을 꿨다.
벚꽃이 지는 길. 누군가의 뒷모습.
분명 처음 보는 풍경인데,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 같은.
'뭐야, 이거.'
꿈속에서 나는 그 뒷모습을 향해 뭐라고 말을 걸려고 했다. 근데 목소리가 안 나왔다. 손을 뻗어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그냥 벚꽃만 계속 흩날렸다.
꿈에서 깼을 때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고 있었다.
이마엔 땀이 살짝 배어 있었고, 손끝은 아직도 뭔가를 붙잡으려는 것처럼 어색하게 굽어 있었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고,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 순간엔 그게 그냥 이상한 꿈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눈을 감은 채로도 그 뒷모습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누구였을까. 분명 알던 사람 같았는데, 얼굴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옆에, 아주 잠깐, 하은의 웃는 얼굴이 겹쳐 보였다.
'설마.'
나는 그 생각을 애써 지워버리고 다시 잠을 청했다.
내일이면 아무렇지 않게 학교에 가고, 아무렇지 않게 하은을 보고, 아무렇지 않게 하루가 지나갈 거라고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