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다시 쓰는 벚꽃엔딩

5화

하은의 집 주소는 예전 유치원 동창 명단에서 어렵게 기억을 짜내야 했다. 핸드폰 메모장에 적어둔 이름들을 몇 번이나 훑었는지 모른다. 유치원 졸업 문집, 초등학교 반 편성표, 심지어 예전에 엄마들끼리 주고받던 단체 채팅방 캡처까지. 전생의 기억이라는 게 이럴 때는 참 얄궂다. 필요할 땐 뜨문뜨문 나고, 하필 지금 같은 순간엔 머릿속 서랍을 다 뒤집어놔야 겨우 하나씩 튀어나온다. 다행히 초등학교 때 몇 번 놀러 갔던 동네라 대충 위치가 떠올랐다. 문제는 '대충'이라는 두 글자였다. 골목을 두 번 잘못 들어서 반대편으로 갔다가 되돌아왔고, 아파트 단지 이름이 비슷비슷해서 세 군데를 헛짚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쯤, 익숙한 놀이터 미끄럼틀이 눈에 들어왔다. 숨을 헐떡이며 도착한 아파트 앞, 하은이 놀이터 벤치에 혼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다행이다, 진짜.' 순간 다리에서 힘이 다 빠졌다. 무릎을 짚고 서서 몇 번 숨을 몰아쉬었다. 최악의 상상을 몇 가지나 했는지 스스로도 셀 수 없었다. 그 상상들이 하나도 맞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동시에 '이게 무슨 청춘물 주인공 짓이냐' 싶은 자괴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하은아." 하은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벤치에 앉은 채로 몸을 반쯤 돌리는 동작이, 뭔가 도망칠 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 도윤이가 여긴 왜…" "SNS 보고 걱정돼서." 하은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 웃으려다가 실패한 표정이라고 해야 할까. 입꼬리는 올라갔는데 눈은 그대로였다. "그거… 그냥 짜증 나서 쓴 거야. 별 뜻 없어." '그 말을 믿으라고?' 믿을 만한 얼굴이 아니었다. 눈이 벌겋게 부어 있었고, 손끝은 여전히 핸드폰 케이스 모서리를 초조하게 문지르고 있었다. 나는 옆에 슬쩍 앉았다. 벤치가 차가웠다. "별 뜻 없다는 사람이 얼굴이 그런 표정을 하고 있진 않지." 하은이 잠깐 나를 빤히 보다가 웃었다. 힘없는 웃음이었다. "…너 원래 이렇게 눈치가 빨랐어?" "몰랐는데 요즘 좀 빨라졌어." '전생 자각한 지 며칠 만에 눈치가 좀 늘긴 했지.' 그도 그럴 것이, 게임 텍스트 창을 몇 백 번쯤 읽어봤던 사람이 이 정도 표정 하나 못 읽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다. 다만 이 얘길 하은에게 설명할 방법은 없으니, 그냥 조용히 옆에 앉아 있는 수밖에. 하은이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어깨가 살짝 떨렸다. "그냥… 다 힘들어서. 애들이 나 싫어하는 거 아는데, 그건 이제 그냥 그런가 보다 해. 근데 하준이까지 그렇게 되니까, 뭔가 다 무너지는 느낌이었어." 목소리가 무릎 사이로 묻혀서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들렸다. '이게 게임 지식으로는 절대 안 나오는 정보네.' 게임 속에서 하은의 호감도 수치는 텍스트로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 안에 진짜 어떤 마음이 담겨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숫자는 그냥 숫자였다. 80이면 80, 79면 79. 그 뒤에 어떤 표정이, 어떤 밤이 있었는지는 절대 표시되지 않는다. 이하준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리고 그게 얼마나 절박한 감정인지는 직접 마주 앉아 들어야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준이가 좋아?" "…그런 것 같아." 하은이 작게 대답했다. 목소리에 확신이 없었지만, 표정에는 확신이 있었다. 고개를 살짝 든 순간, 붉어진 눈가 위로 뭔가 결연한 게 스쳤다. '80퍼센트짜리 호감이라던 게 이런 느낌이구나.' 숫자로만 알던 걸 실제로 보니 뭔가 묘했다. 게임 화면 속 숫자 뒤에 진짜 사람이 있었다는 걸, 이제야 실감하는 기분이었다. 등에 식은땀이 살짝 배어 나왔다. "그럼 포기하지 마." "…뭘?" "하준이. 이번 한 번 삐끗했다고 끝난 거 아니야." 하은이 나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너 갑자기 왜 이래?" '나도 살아야 하니까.' 솔직히 이 말이 제일 먼저 튀어나오려 했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두 사람이 잘 되어야 원작 흐름이 크게 어긋나지 않고, 그래야 나도 이 세계에서 조연으로 조용히 묻혀 살 확률이 올라간다. 아주 실용적인 이유였다. "그냥, 억울하잖아. 너 잘못한 것도 없는데." 하은이 잠깐 말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그 말이 생각보다 무겁게 들려서, 나는 잠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벤치 아래로 발을 까딱거리며 침묵을 채웠다. 나는 그 순간 마음속으로 작게 다짐했다. 하준이 둔감한 건 어쩔 수 없지만, 최소한 옆에서 계속 부딧치게 만들면 된다. 원작에서도 결국 이하준은 여러 이벤트를 거치며 서서히 하은을 인식하게 되는 캐릭터였으니까. 처음부터 눈치 빠른 남주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눈치 없는 남주도 아니었다. 다음 날, 나는 하준을 슬쩍 찾아갔다. 쉬는 시간, 복도 창가에 기대서 있는 하준의 뒤통수를 보며 잠깐 뭐라고 운을 뗄지 고민했다. 너무 노골적이면 의심을 살 테고, 너무 에두르면 못 알아들을 게 뻔했다. 결국 직진이 답이었다. "야, 하준아." "어, 뭐." "그날 하은이 도서관 얘기했을 때 말이야." "어… 그거? 왜." "진짜 그냥 물어본 거 아니고, 나름 용기 낸 거였어." 하준이 눈을 끔뻑였다.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슬며시 내리는 게 보였다. "그런 거였어?" "어. 다시 한번 기회 주면 안 되냐." 하준은 잠깐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팔짱을 끼고 몇 초쯤 생각하는 시늉을 했지만, 결론은 빨랐다. "그럼 이번 주말에 시간 되면 같이 가자고 할까." '오, 생각보다 쉽게 넘어오네.' 이렇게 쉬울 거였으면 왜 진작 안 됐나 싶다가도, 곧 답이 나왔다. 하준한테 필요했던 건 그냥 '누군가 대신 말해주는 것'이었다. 원작에서도 하준은 늘 그런 식이었으니까. 작은 성공이었다. 아주 작지만 분명한 성공.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복도를 걸어가며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며칠간의 피로가 조금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날 점심, 급식실에서 서지은이 내 앞을 막아섰다. 식판을 들고 자리를 찾던 참이었다. 서지은은 팔짱을 낀 채 정확히 내가 걸어가는 길목 한가운데 서 있었다. 뒤로는 늘 붙어 다니는 무리 두세 명이 눈을 반짝이며 상황을 구경하고 있었다. "강도윤, 요즘 유하은이랑 되게 붙어 다니네?" 목소리가 곱지 않았다. "그냥 반 친구잖아." "그래? 근데 이하준이랑도 뭐 자꾸 이상한 얘기 하고 다니던데." 서지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이 눈까지 닿지는 않았다. "너 뭐 하는 거야, 뒤에서." '와, 눈치는 또 빠르네.' 이쪽 세계 사람들은 다 이렇게 감이 좋은 건가, 아니면 서지은이 유독 예민한 건가. 어느 쪽이든 나한테는 안 좋은 소식이었다. 나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뭘 하긴, 그냥 친구들끼리 얘기하는 거지." 서지은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이상하게 서늘했다. 식판 위에 놓인 국그릇에서 올라오는 김이 그 웃음과 대비되어 더 서늘하게 느껴졌다. "두고 봐. 유하은이 뭐가 그렇게 특별한지, 내가 직접 보여줄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 서지은은 무리를 몰고 자리를 떠났다. 또각또각, 실내화 소리가 멀어지는 걸 들으면서 나는 그 자리에 잠깐 그대로 서 있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목이 마른 것을 느꼈다. 식판을 든 손에 괜히 힘이 들어갔다. '이거, 진짜 골치 아프게 됐다.' 작은 성공 뒤에 더 큰 벽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나는 그 순간 확실하게 깨달았다. 식판을 내려놓을 자리를 찾으며, 나는 서지은의 마지막 말을 몇 번이나 곱씹었다. '보여줄 테니까'라는 말이 유독 마음에 걸렸다. 원작 스토리 어디에도 서지은이 저렇게까지 나오는 장면은 없었는데. '설마, 내가 이미 뭔가 바꿔놓은 건가.'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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