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나는 교실을 뛰쳐나가 하은을 쫓았다.
의자가 뒤로 넘어가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반 애들 몇 명이 나를 쳐다봤던 것 같은데, 그런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복도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심장이 같이 뛰는 것 같았다.
'왜 뛰는 거지, 나.'
솔직히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몸이 먼저 움직였다. 하은의 등이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고, 그걸 보는 순간 다리가 알아서 튀어나갔다.
복도 끝, 계단 앞에서 하은을 붙잡았다.
"저기, 하은아."
하은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교복 재킷 위로 어깨선이 들썩거리는 게 보였다. 우는 건가, 싶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뭐라고 위로를 하나, 애초에 나랑 하은이 그런 사이도 아닌데.
그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 터졌다.
쾅.
눈앞이 하얘졌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나는 다른 걸 보고 있었다.
벚꽃이 지는 길. 교복을 입은 남자애가 웃고 있고, 그 옆에 여자애가 서 있다.
타이틀 화면. 『벚꽃 지는 계절 속에서』.
배경음악까지 들렸다. 피아노로 시작해서 현악기가 깔리는, 그 특유의 잔잔하면서도 어딘가 불안한 멜로디.
'아.'
숨이 턱 막혔다.
기억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나는, 전생에, 이 게임을 했다.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미소녀 연애물. 플레이 타임 40시간짜리 게임을, 나는 세 번이나 완주했다. 세이브 파일을 몇 개나 만들어놓고 히로인별로 루트를 돌렸던 것까지 기억났다.
주인공은 이하준. 히로인은 여럿이었고, 그중 가장 인기 많은 캐릭터가 유하은이었다.
유하은. 밝고 씩씩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늘 불안해하는 캐릭터. 공식 일러스트에서 항상 웃는 얼굴로 그려졌는데, 정작 스토리 안에서는 제일 위태로운 인물이었다.
'유하은… 파멸 히로인.'
공략 사이트에서 봤던 문구가 떠올랐다. '난이도 최상, 멘탈 갈림 주의'라고 적혀 있던 게 기억났다.
게임 속에서 유하은은 특정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배드엔드로 빠지는 캐릭터였다.
조건은 단순했다. 이하준의 호감도가 일정 수치를 넘기지 못하면, 하은은 3학년 봄, 자살로 이야기를 끝냈다.
이번 데이트 신청 이벤트는 게임 초반, 하은 루트의 첫 분기점이었다.
여기서 거절당하면 하은의 호감도는 급락하고, 이후 회복이 거의 불가능해진다.
호감도 창의 숫자까지 눈앞에 어렴풋이 떠올랐다. 초록색 게이지가 순식간에 붉게 바뀌는 그 UI가.
'그리고 나는…'
생각이 거기서 멈췄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이 게임의 캐릭터였다. 이름도 없는, 그냥 배경으로 지나가는 반 친구 1.
엑스트라 중에서도 엑스트라. 대사 한 줄 없는 존재.
교실 뒷자리에서 배경으로 스쳐 지나가는 몹, 복도에서 하준이랑 부딪치는 장면에 한 컷 등장하는 게 내 존재감의 최고치였다.
근데 이상하게도 이름은 나왔다. '강도윤'이라는 이름이 크레딧 어딘가에 조연으로 적혀 있었다.
하은 루트 배드엔드 씬에서 딱 한 번, 얼굴 없는 실루엣으로.
'설마.'
기억이 더 선명해졌다.
하은 루트의 진배드엔드. 옥상. 하은이 뛰어내리는 장면.
그 옆에 서 있던 게 나였다. 말리려다 같이 떨어지는, 이름 없는 반 친구.
씬 설명까지 기억났다. '무명의 동급생, 그녀를 붙잡으려다 함께 추락한다.' 그 한 줄로 끝나는 등장인물. 죽는 순간에도 이름이 안 나오는, 그런 캐릭터가 나였다.
'미친.'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몸이 얼어붙었다.
손끝이 떨렸다. 이게 진짜 웃긴 게, 몸은 얼어붙었는데 머릿속은 미친 듯이 빨리 돌아갔다. 이게 게임이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 스탯 창이 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하은이 그제야 나를 돌아봤다.
"도윤아? 왜 그래, 얼굴이 하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목소리가 떨렸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야, 이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잖아.'
방금 내 인생 목표가 하나 새로 생겼다고, 목숨 부지하는 거라고, 그런 말을 어떻게 지금 여기서 하냐고.
하은이 계단을 내려가고, 나는 그 자리에 남아 벽에 등을 기댔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차가운 계단 타일이 엉덩이에 닿는 감각이 그제야 느껴졌다. 교복 바지 너머로 냉기가 스며들었다.
'이게 게임이라고. 내가 그 게임 안에 들어와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방금 본 기억들이 너무 생생했다.
타이틀 화면의 폰트, 배경음악, 하은의 캐릭터 소개 창에 적힌 스탯 수치까지.
성격: 밝음(표면), 불안정(내면). 취미: 베이킹, 사진 찍기. 좋아하는 것: 벚꽃, 라떼. 싫어하는 것: 거절당하는 것.
싫어하는 것 항목까지 정확히 기억나는 게 소름 돋았다. 그리고 오늘, 나는 정확히 그걸 저질렀다. 아니, 이하준이 저질렀나. 헷갈렸다.
그건 상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종류의 기억이 아니었다.
나는 원래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이름도, 얼굴도, 그때의 기억도 어렴풋하지만 남아 있었다.
다만 지금은 그게 다 흐릿해서, 오히려 이 게임의 기억이 더 선명했다.
'죽었나, 나. 그리고 여기로 온 건가.'
전생의 마지막 기억을 더듬어보려 했는데, 뭔가 뿌옇기만 했다. 방 안이었던 것 같고, 화면이 켜져 있었던 것 같고. 그 이상은 안 떠올랐다.
확실한 건 하나였다.
이 세계는 게임이고, 나는 그 게임 속에서 이름 없는 조연이며, 하은이 파멸하는 루트에서는 나 역시 죽는다는 것.
'와, 진짜.'
헛웃음이 나왔다.
남의 연애사 뒤에서 죽어야 하는 캐릭터라니, 이렇게 재수 없는 설정이 어디 있나.
이하준 저 자식은 대체 뭘 했다고 히로인이 몇 명씩 붙고, 나는 뭘 했다고 걔들 배드엔드에 끼어서 같이 죽어야 하나. 세상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지금 그런 거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근데 웃을 상황이 아니었다.
이미 오늘, 하은은 거절당했다.
루트가 이미 안 좋은 방향으로 틀어졌다는 뜻이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
날짜, 요일,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화요일이었다.
평범한 화요일에, 내 목숨이 걸린 스토리가 이미 시작돼 있었다.
화면 상단에 뜬 배터리 잔량이랑 시간까지 눈에 들어왔다. 3시 47분. 이 시간에 내 인생 전체가 게임 속 서브 이벤트라는 걸 알게 되다니, 참 어이없는 타이밍이었다.
'이거, 정말로 어떻게 하지.'
지금 당장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애초에 이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게임이라면 세이브 로드가 되나? 아니, 그럴 리가. 여기는 현실이고 나는 살아있는 몸이었다. 죽으면 그냥 끝인 거다.
계단 아래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하은이 다시 올라오는 소리였다.
나는 얼른 표정을 정리했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손바닥에 밴 땀을 교복 바지에 슥 문질러 닦았다.
하은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기, 아까는… 고마워. 신경 써줘서."
나는 그 얼굴을 보면서 다른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엔딩 씬에서 하은이 지었던 마지막 표정과, 지금 이 표정이 어이없을 정도로 닮아 있었다는 걸.
옥상 씬.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눈은 웃고 있는데 눈물이 흐르는, 그 모순된 표정. 게임에서는 그게 명장면으로 불렸다. 플레이어들이 스크린샷 찍어서 올리고, 커뮤니티에서 몇 번이나 화제가 됐던 씬이었다.
근데 지금 그 표정을 실물로 보고 있으니까, 명장면이 아니라 그냥 무서웠다.
'저 표정, 나 알아. 저거 나쁜 신호야.'
하은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방금 거절당한 애답지 않게 담담한 얼굴로.
근데 나는 안다. 저게 진짜 담담한 게 아니라는 걸. 게임에서 몇 번이나 본, 무너지기 직전의 얼굴이라는 걸.
내 목숨이 저 웃음 뒤에 걸려 있다는 걸 알아버린 이상, 저 웃음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