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병원 로비는 조용했다.
밖으로 나오니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주머니를 뒤졌다. 지갑이 있었다. 카드 한 장, 현금 몇 만 원, 그리고 학생증.
서울고등학교, 2학년 3반, 이진태.
사진 속 얼굴이 지금 내 얼굴과 같은지 확인하려고 근처 유리창에 얼굴을 비춰봤다.
똑같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지갑을 뒤적이다 보니 영수증 몇 개가 나왔다. 편의점, 분식집, PC방.
평범했다.
평범해서 더 이상했다.
기억이 없는 사람의 지갑에서 나온 흔적들이 너무 평범하다는 게, 오히려 신경에 걸렸다.
집 주소도 학생증 뒤에 적혀 있었다. 원룸형 아파트, 혼자 산다고 되어 있었다.
부모님은... 아버지는 어디 계시지.
기억을 뒤져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얼굴도, 목소리도, 심지어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태어난 지 몇 시간밖에 안 된 것 같았다. 몸은 열여덟 먹은 몸인데.
그 순간, 누군가 뒤에서 이름을 불렀다.
"진태야!"
돌아봤다.
한 여자가 서 있었다.
키가 크고, 머리가 어깨 아래까지 내려왔고, 눈이 크고 또렷했다.
교복을 입고 있었다. 서울고등학교 교복이었다.
낯선 얼굴이었다.
분명히 낯선데, 왜인지 조금은 익숙한 것 같기도 했다.
혼란스러웠다.
"괜찮아? 병원에서 다 나았대?"
그녀가 내 팔을 잡았다. 다정한 손길이었다.
손이 차가웠다. 저녁 공기 때문인가 싶었는데, 그것보다 더 차가웠다. 사람 체온이 아니라 방금 냉장고에서 꺼낸 것 같은 느낌.
"저... 누구세요?"
순간 그녀의 표정이 흔들렸다. 아주 짧게.
너무 짧아서 착각인가 싶을 정도로.
"뭐야, 나 몰라?"
웃으며 말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서다인이야. 너 여자친구."
여자친구라는 말이 낯설었다.
기억이 없으니 당연히 낯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낯섦이었다.
뭔가... 억지스러운 느낌.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가 짧게 반응했다. 경보음 같은 것.
정체가 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위험하다는 느낌이었다.
이 감각은 또 뭐야.
"기억이 안 나요. 아무것도."
"의사가 그러더라. 기억상실이라고."
의사가 그녀에게 말했다고.
그렇다면 그녀는 이미 병원과 접촉한 적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왜 병실에는 오지 않았을까.
침대에 누워있던 시간 동안, 병실 문이 열린 적은 없었다. 간호사 두 명, 의사 한 명. 그게 전부였다.
"의사 선생님 아세요?"
"어? 아니, 그냥... 연락받았어."
말이 조금 빨라졌다.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거짓말할 때 사람이 보이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상한 확신이었다. 근거는 없었다. 그냥 알았다. 저건 거짓말이다.
"누구한테 연락받았어요?"
"그, 병원에서."
"병원에서 왜 저한테는 인수인 정보를 안 알려줬죠?"
그녀가 잠깐 말을 멈췄다.
침묵이 길었다. 대답을 준비하는 시간이라기보다, 뭔가를 계산하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집에 가자, 내가 데려다줄게."
화제를 돌리는 솜씨가 좋았다.
너무 좋았다.
걷는 동안 그녀는 계속 말을 걸었다.
우리가 사귄 지 얼마나 됐는지, 어디서 처음 만났는지, 데이트는 어디로 다녔는지.
이야기가 너무 구체적이었다.
"작년 봄에 벚꽃 축제에서 만났잖아. 기억 안 나?"
"...안 나요."
"에이, 그럴 리가."
그녀가 팔짱을 꼈다.
따뜻했다.
체온이 느껴졌다.
아까와는 달랐다. 아까는 분명 차가웠는데, 지금은 따뜻했다.
체온이 오르내리는 사람이 있나.
허깨비가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뭔가 어긋나 있었다.
말과 행동 사이에 미세한 시차가 있었다.
손을 잡을 때는 자연스러웠지만, 눈을 맞출 때는 계산하는 것 같았다.
계산이라니, 이 정도까지 눈치챌 이유가 뭐지.
기억이 없는 나에게 왜 이런 감각이 살아있는지도 이상했다.
마치 누군가를 관찰하고, 그 사람의 진심과 거짓을 구분하는 훈련을 받은 것처럼.
시선이 그녀의 목덜미, 손끝, 발걸음 하나하나를 자동으로 훑고 있었다. 내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몸이 알아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집이 이쪽이지?"
그녀가 앞장서서 걸었다.
내 집 주소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학생증을 보여준 적도 없는데.
"제 주소 어떻게 알아요?"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당연히 알지, 우리 사귀는데."
대답이 너무 늦게 나왔다.
"..."
"왜 그렇게 봐?"
"아뇨."
거짓말이 아니라고 하기엔, 저 대답 사이의 공백이 너무 길었다. 사귀는 사람이라면 그 정도 질문에는 즉답이 나와야 정상이었다.
정상이 아니었다.
대문 앞에 도착했다.
원룸형 건물이었다. 3층. 302호.
"들어가서 쉬어. 내일 학교 갈 수 있겠어?"
"학교요?"
"응, 너 원래 학교 잘 안 빠지잖아."
원래, 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들렸다.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인지, 나조차 모르는데.
"내일 데리러 올게."
그녀가 웃었다. 예뻤다. 정말로 예뻤다.
그런데 그 웃음 뒤에 뭔가가 숨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웃음이 얼굴에 붙어 있는 것 같았다. 표정과 감정이 따로 움직이는, 어색한 인형처럼.
그녀가 돌아서서 걸어갔다.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그녀의 걸음걸이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너무 가벼웠다. 체중이 거의 안 느껴지는 것처럼, 발끝이 땅에 닿는 시간이 짧았다.
보통 사람 같지 않았다.
가로등 밑을 지날 때, 그녀의 그림자가 한순간 두 개로 갈라지는 걸 본 것 같았다.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어야 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봤을 때는 이미 그녀가 골목 끝으로 사라진 뒤였다.
집에 들어와서 문을 잠그고, 거울 앞에 섰다.
목의 상처를 다시 봤다.
상처는 여전히 붉었다. 사고로 생겼다기엔 너무 정교했다. 마치 누군가 정확한 지점을 노려 그은 것 같은 상처.
의사는 그걸 보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것도 이상했다.
서다인.
그 이름을 입 밖으로 소리 내봤다.
낯설었다.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는 이름 같았다.
그런데 여자친구라니.
뭔가 맞지 않았다.
조각이 어긋난 퍼즐처럼, 겉으로는 맞아 보이는데 안쪽은 전혀 다른 그림이었다.
오늘 알아낸 사실을 정리해봤다.
하나, 목에 오래된 상처가 있다. 사고와 무관해 보인다.
둘, 병원은 나를 서둘러 내보냈다.
셋, 의사는 인수인 정보를 숨겼다.
넷, 서다인이라는 여자가 나타나서 여자친구라 주장한다. 거짓말하는 것 같다.
다섯, 그녀의 체온은 일정하지 않다.
여섯, 그녀의 걸음걸이는 사람 같지 않다.
여섯 개나 됐다.
하루 만에.
네 가지 사실이 하나로 이어지지 않았다.
연결되지 않는 조각들이 그냥 흩어져 있었다.
내일 학교에 가면 뭔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친구는 있을 테니까.
친구가 있다면, 적어도 이진태라는 사람이 어떤 인간이었는지는 알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침대에 누웠다.
몸은 낯선데 이상하게 침대는 익숙했다. 매트리스의 굴곡, 이불의 무게, 벽에 걸린 시계 소리까지.
몸의 기억이 남아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우연일까.
잠들기 직전, 창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금속이 부딪히는 것 같은, 낮고 짧은 소리.
일어나서 창밖을 봤다.
아무도 없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골목은 텅 비어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하나 없었다.
착각이었나.
다시 누웠지만 쉽게 잠들지 못했다.
서다인의 걸음걸이가 계속 눈에 밟혔다.
그리고 그 그림자.
두 개로 갈라졌던 그 순간이, 눈을 감아도 사라지지 않았다.
혹시 내가 뭔가 잘못 본 게 아니라, 원래 저런 존재라면.
그럼 나는 대체 뭐랑 사귀고 있었던 거지.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렀을 때, 몸이 저절로 굳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긴장이었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창문 쪽이 아니었다. 방 안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아무도 없어야 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분명히 뭔가 있었다는 확신이 목덜미에 남아 있었다.
그 상처 부위가, 서늘하게 당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