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종례가 끝나고 박준혁과 함께 정문을 나섰다.
교문을 나설 때부터 다리가 무거웠다. 하루 종일 서다인 생각만 하다가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던 탓이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뭘 물었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봤어? 아까 운동장에서?"
"뭘."
"서다인이 손 뻗었는데 뭔가 반짝였어."
박준혁이 걸음을 멈췄다.
멈춘 자리가 딱 편의점 앞이었다. 삼각김밥 진열대 옆에서 걸음을 멈추니까 그림이 좀 웃겼다.
"진짜? 나 못 봤는데."
"순간이었어. 눈 깜빡이니까 사라졌어."
"환각 아니야?"
"모르겠어. 근데 그 여자, 확실히 사람 같지 않아."
박준혁이 팔짱을 꼈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게, 진지하게 생각할 때 나오는 버릇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봐온 버릇이라 낯설지가 않았다.
"귀신이냐?"
"몰라. 근데 걸음걸이도 이상해. 몸이 안 무거운 것처럼 걸어."
"와, 무섭게 말하지 마."
그렇게 말하면서도 박준혁의 표정은 진지했다.
"진태야, 이거 그냥 넘길 문제 아닌 것 같아. 경찰에 말해볼까?"
"뭐라고 말해. 여자친구라고 주장하는 애가 학교에 존재하지 않고 손에서 뭔가 반짝였다고?"
"...말이 안 되긴 하네."
둘 다 잠깐 말이 없었다.
편의점 앞 파라솔 밑에서 누가 라면을 먹고 있었다. 냄새가 훅 풍겼다. 배가 고팠다. 이 시국에 배가 고프다는 게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지만, 사람 몸이라는 게 그렇게 편리하게 안 굴러갔다.
"일단 오늘은 조심해. 뭔가 이상하면 바로 연락해."
"어."
박준혁과 헤어지고 집으로 걸었다.
걷는 동안 머릿속이 복잡했다.
목에 남은 상처.
병원의 침묵.
존재하지 않는 여자친구.
낯선 단어들.
허공에서 반짝이던 것.
조각들이 하나씩 늘어났지만 여전히 그림은 완성되지 않았다.
다만 방향은 조금씩 보였다.
이건 단순한 기억상실이 아니다.
뭔가 더 큰 것과 연결되어 있다.
내 목의 상처가 그 시작점일 수도 있었다.
걸음이 자꾸 느려졌다. 생각이 많으면 다리가 저절로 무거워진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신호등 앞에서 파란불이 두 번이나 바뀌는 걸 그냥 보고만 있었다.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 골목 어귀에서 낯선 남자를 봤다.
검은 옷을 입고, 선글라스를 쓴 남자였다.
해가 다 저물어가는데 선글라스라니.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정상적인 행인이 아니라는 게 티가 났다.
그는 내 집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순간, 그가 몸을 돌려서 걸어갔다.
너무 자연스러운 걸음이었다. 하지만 뭔가 어색했다.
방금까지 이쪽을 보고 있었는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걸음걸이가 이상했다. 서다인이 걸을 때랑 비슷한 느낌이었다. 몸이 지면에 완전히 붙어 있지 않은 것 같은, 그 미묘한 부유감.
미행당하고 있나.
등에 소름이 돋았다.
집에 들어와서 문을 잠그고 창문 커튼까지 쳤다.
문 잠그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딸깍, 하는 소리 하나에 심장이 같이 뛰었다.
핸드폰을 꺼내서 검색을 다시 시도했다.
[입체기동 장치]
[초경질 블레이드]
여전히 결과가 없었다.
검색창에 커서만 깜빡였다. 마치 세상이 이 두 단어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검색해봤다.
[목에 상처 + 기억상실 + 병원]
뉴스 몇 개가 떴다.
손가락이 빨라졌다. 최근 몇 달간, 원인 불명의 목 상처를 가진 청소년들이 병원에 실려 왔다가 이례적으로 빠르게 퇴원했다는 짤막한 기사였다.
제목이 이상하리만치 건조했다.
[서울 시내 종합병원, 청소년 응급환자 잇따라 조기 퇴원... 병원 측 "특이사항 없음"]
기사를 클릭했다. 본문은 세 문단짜리였고, 그마저도 알맹이가 없었다. "관계 당국은 정확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는 문장으로 끝났다. 조사는 무슨. 조사할 생각이 있으면 이런 기사가 이렇게 짧게 나올 리가 없었다.
기사 아래 댓글이 몇 개 있었다.
"우리 조카도 이런 일 있었는데, 갑자기 기억 이상해졌다고 하더라"
"이거 뭔가 이상한데, 병원에서 뭔가 숨기는 거 아냐?"
"저도 비슷한 케이스 알아요. 애가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말투가 바뀌었대요."
손이 떨렸다.
나만의 일이 아니었다.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들이 더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병원의 침묵과 이어졌다.
의사가 인수인 정보를 숨긴 것도, 이 패턴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있었다.
누군가 조직적으로 이런 일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서다인은, 그 조직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입체기동 장치, 초경질 블레이드.
이 단어들은 어쩌면 이 조직이 쓰는 특수한 도구나 무기의 이름일 수도 있었다.
허공에서 반짝이던 것.
어쩌면 그 도구를 소환하는 장면이었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나는 이 사건의 피해자인가, 아니면 이 사건의 일부인가.
질문을 던져놓고 나니까 갑자기 무서워졌다. 답을 알고 싶으면서도 알고 나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느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서다인은 나를 이용하려고 접근했다.
그 목적이 뭔지는 몰라도, 그녀는 뭔가를 감추고 있다.
그리고 병원과 의사, 그 조직적인 침묵.
그리고 방금 골목에서 본 그 남자.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창밖을 다시 확인했다.
골목은 조용했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조용하다는 게 오히려 더 불안했다. 원래 저녁 이 시간이면 옆집 개가 짖거나 배달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야 했다. 오늘은 그런 소리조차 없었다. 마치 골목 전체가 숨을 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박준혁에게 문자를 보냈다.
[야, 나 이상한 뉴스 찾았어. 나 같은 일 겪은 애들이 더 있대. 내일 학교에서 얘기하자.]
답장이 바로 왔다.
[뭐야, 진짜? 알았어, 내일 아침에 일찍 보자.]
핸드폰을 내려놓고 창밖을 다시 봤다.
조용했다. 너무 조용했다.
뭔가 결심이 섰다.
더 이상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 않겠다.
서다인이 뭘 감추고 있는지, 병원이 왜 그렇게 서둘러 나를 내보냈는지, 목에 남은 이 상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부 알아낼 것이다.
그것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결심이라는 게 이렇게 심장 박동만 빨라지게 만드는 거였나 싶었다.
창문 밖에서 다시 그 낮은 금속음이 들렸다.
이번에는 훨씬 가까이서.
숨이 턱 막혔다. 그 소리, 병원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계속 귓가에 남아있던 그 소리였다. 목에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가던 감각과 함께 각인된 소리.
나는 커튼 사이로 조심스럽게 밖을 내다봤다.
손가락 끝으로 커튼 한 자락만 살짝 걷었다. 눈만 겨우 내놓고 골목을 살폈다.
골목 끝에, 아까 봤던 검은 옷의 남자가 다시 서 있었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 또 한 사람, 그리고 그 뒤로 하나 더.
세 명이 내 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셔츠 목덜미로 소름이 쭉 올라왔다. 손에 든 핸드폰 화면이 아직도 밝게 켜져 있었다. 박준혁의 답장이 그 위에 그대로 떠 있었다.
[알았어, 내일 아침에 일찍 보자.]
내일 아침이 오기 전에, 오늘 밤 뭔가 벌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내 방 창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죽이고, 나는 그들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