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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문이 열리기 전, 나는 복도에 서서 몇 번이나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봤다. 이웃챗 앱에 떠 있는 주소가 맞는지 다시 확인했다. 12층, 1204호. 손끝이 자꾸 화면 위에서 미끄러졌다. 와도 되는 걸까. 이런 늦은 시간에, 익명으로만 몇 번 대화를 나눈 사람 집에 찾아온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인지 스스로도 확신이 없었다. 그래도 발이 먼저 여기까지 왔다. 채팅창에 마지막으로 남겨진 짧은 문장 때문이었다. -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어요. 그 한 줄을 보고 나서 나는 편의점으로 뛰어가 해열제와 이온음료를 사 들고 여기까지 달려왔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몰랐다. 초인종을 눌렀다. 한 번, 두 번.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혹시 잘못 온 건 아닐까, 아니면 이미 늦은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한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세 번째로 초인종을 누르려는 순간, 문 안쪽에서 무언가 부딪히는 듯한 둔한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도어락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삐빅. 문이 열리는 순간, 나는 숨을 참았다. 안에서 나타난 사람은 예상했던 모습과 전혀 달랐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얼굴 반쪽을 가리고 있었다. 볼은 열 때문에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입술은 하얗게 말라 있었다. 커다란 회색 후드를 걸치고 있었는데, 몸이 그 안에서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문틀을 짚고 있는 손끝이 하얗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을, 나는 알고 있었다. 이서윤이었다. 같은 반. 얼음꽃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아이. 입학하고 지금까지 고백을 열 번도 넘게 받았다는 소문이 도는데도 누구와도 사귀지 않는다는 그 아이. 교실에서 늘 혼자 창밖만 보고 있어서, 나는 그 애와 눈을 마주친 적조차 거의 없었다. 내 기억 속의 이서윤은 항상 등이 곧았다. 급식실에서도, 체육 시간에도, 심지어 선생님한테 혼날 때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다른 애들이 수군거려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다들 그 애를 어려워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애가, 지금 내 눈앞에서 문을 붙잡고 서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저기..."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서윤_09 님... 맞으세요?" 그녀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초점이 흐릿했다. 눈꺼풀이 무거운 듯 자꾸 아래로 처졌다. "...강하준?" 내 이름이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네, 저 강하준이에요." 나는 얼떨결에 답했다. 이웃챗에서는 그냥 익명으로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그녀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같은 반이니 당연한 거였는데도, 그 순간엔 이상하게 특별하게 느껴졌다. "진짜 왔네." 그녀가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안 올 줄 알았는데." 말끝이 힘없이 흩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두 손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어, 어어!" 생각보다 가벼운 무게가 내 팔에 실렸다. 후드 안쪽으로 느껴지는 체온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손바닥을 통해 그 열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괜찮아요?" 내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고개만 힘없이 끄덕였다. 이마에서 손을 대보지 않아도 열이 느껴졌다. 얼굴 전체가 뜨거운 김을 내뿜는 것 같았다. 숨을 쉴 때마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학교에서 봤던 얼음꽃과, 지금 내 팔에 매달려 있는 이 아이는 도무지 같은 사람 같지 않았다. 그 단단하던 등이 이렇게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게 낯설었다. "일단 들어가서 눕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부축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에서부터 거실까지, 집 안은 지나칠 정도로 조용했다. 불이 켜져 있는 곳은 거실 한쪽뿐이었고, 나머지는 어둑했다. 소파 위에는 담요와 물컵, 다 먹은 죽 그릇 대신 뜯지도 않은 죽 캔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체온계가 바닥에 떨어진 채 뒹굴고 있었다. 혼자 아프면서도 아무것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흔적이었다. 거실 통유리창 너머로 도시의 불빛이 화려하게 펼쳐져 있었다. 이렇게 높은 층에, 이렇게 넓은 집에 살면서도, 정작 그 안에는 사람 하나 챙겨줄 손길이 없었다는 게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내 방과 비슷한 공기였다. 넓고 좋은 아파트인데도, 사람이 사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춥게 느껴졌다. 공간이 큰 만큼 텅 빈 부분도 커 보였다. "방이 어디예요?" 내가 물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복도 끝을 가리켰다. 걸음을 옮기는 동안, 그녀의 몸이 자꾸 내게 기울었다. 무게가 실릴 때마다 나는 이상하게 긴장했다. 발끝이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한 그녀를 다시 붙잡아 세우면서, 나는 숨을 삼켰다. 복도 끝 방문을 열자 침대가 보였다. 커튼이 반쯕 걸쳐진 창문으로 가로등 불빛이 스며들어왔다. 방 안에도 사람의 흔적이 별로 없었다. 책상 위에 놓인 교과서와 몇 개의 필기구, 그것뿐이었다. 나는 그녀를 조심스레 눕혔다.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주는데, 손끝이 자꾸 어색하게 멈췄다. "물, 갖다드릴게요." 부엌으로 가서 물을 따르는 손이 떨렸다. 뭐라도 하고 있어야 진정이 될 것 같았다. 컵을 찾는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낯선 부엌, 낯선 찬장, 낯선 그릇들. 이 집에 있는 모든 것이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것들이었는데, 지금은 그 무엇 하나라도 서윤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손이 바빠졌다. 방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눈을 반쯤 뜬 채 천장을 보고 있었다. "물 여기 있어요."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힘없이 무너졌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녀의 등 뒤에 손을 대고 받쳤다. 어깨가 놀랄 만큼 작았다. 얇은 옷 위로 느껴지는 뼈의 감촉이 선명했다. 이렇게 마른 몸으로 그 단단한 표정을 지어왔던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녀가 물을 몇 모금 마시고 다시 베개에 머리를 뉘였다. 숨소리가 거칠었다. 마른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다시 다물렸다. "약은... 먹었어요?" 내가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먹어야 되는데... 손이 안 움직여서." 그 말이 이상하게 아프게 들렸다. 학교에서는 누구에게도 틈을 보이지 않던 아이가, 지금 이렇게 무력하게 누워 있었다. 그 흔한 약 하나조차 스스로 챙기지 못할 정도로. 나는 사온 해열제 봉지를 뜯었다. 알약 두 개를 꺼내 그녀 손바닥 위에 조심스레 올려주고, 물컵을 받쳐줬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그녀는 힘겹게 팔을 들어 약을 삼켰다. 목이 움직이는 게 유난히 느리게 느껴졌다. 그러고 나서 눈을 감았다. 숨소리가 조금씩 느려졌다. 잠든 걸까. 나는 이불을 다시 한 번 여며주고, 방 안을 둘러봤다. 창문을 조금 더 닫아 찬바람이 들어오지 않게 했다. 그러고는 조용히 방을 나가려다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손이 내 소매를 붙잡고 있었다. 작은 손끝이 옷자락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손톱 끝이 옷감 사이로 파고들 정도였다. "...가지 마." 잠꼬대처럼 흘러나온 말이었다. 그 순간,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방 안의 시계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창밖에서 새어드는 불빛이 그녀의 얼굴 위로 흐릿하게 번졌다. 나는 소매를 붙잡은 그 손을 내려다보다가,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이대로 서 있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이 손을 가만히 떼어내야 하는 걸까. 머릿속이 하얘진 채로, 나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그녀의 손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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