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그날 이후로 나는 조금 더 조심스러워졌다.
학교에서는 여전히 아무 일도 없는 척했다. 복도에서 마주쳐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고, 급식실에서도 일부러 먼 자리에 앉았다. 누가 봐도 평범한 반 친구 사이처럼 보이도록.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계속 신경이 쓰였다.
수업 시간에 칠판을 보다가도 문득 어제 그녀의 표정이 떠올랐다. 필기를 하다가도 손이 멈췄다. 누군가 우리 둘을 눈여겨보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근거 없는 불안이었지만, 한 번 자리 잡은 생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발걸음은 어김없이 이서윤의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면 늘 같은 향이 났다. 은은한 섬유향과 그녀가 즐겨 마시는 차 냄새가 섞인, 낯설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냄새.
"오늘은 뭐 만들어줄 거야?"
그녀가 소파에 앉아 다리를 접고 물었다. 리모컨을 손끝으로 빙글빙글 돌리면서.
"오므라이스요."
내가 대답하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계란과 밥, 케첩 병이 눈에 들어왔다.
"또 태울 거잖아."
그녀가 픽 웃었다.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나를 보는 눈이 장난스럽게 휘어졌다.
"이번엔 안 태워요."
나는 자신 있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이미 불안했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계란을 풀 때부터 손이 어색하게 움직였다. 밥을 볶는 동안 그녀의 시선이 뒤통수에 꽂히는 게 느껴졌다.
결국 그날도 계란이 살짝 탔다. 프라이팬 가장자리가 갈색으로 눌어붙었고, 케첩으로 아무리 덮어도 그 자국은 감춰지지 않았다.
그녀는 별말 없이 다 먹었다. 숟가락으로 접시를 긁는 소리만 조용히 이어졌다.
"맛있어요?"
"응. 태운 맛도 나쁘지 않네."
그녀가 입가를 닦으며 대답했다. 그 무심한 말투에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그 사이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씩 더 익숙해졌다. 그녀는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기억했고, 나는 그녀가 매운 걸 잘 못 먹는다는 걸 알았다. 언젠가 청양고추를 넣은 볶음밥을 만들었다가 그녀가 물을 세 잔이나 들이켜는 걸 본 뒤로는, 고추를 넣기 전에 항상 한 번 더 생각하게 됐다.
그렇게 작은 것들이 쌓여갔다.
숟가락을 놓는 위치, 좋아하는 반찬의 순서,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는 습관 같은 것들이.
어느 날, 그녀가 서랍에서 낡은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줬다.
서랍이 열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안에는 오래된 편지 몇 장과 학생증, 그리고 색이 조금 바랜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이거 초등학교 때 사진이야."
그녀가 사진을 내밀며 말했다.
사진 속에는 지금과 전혀 다른, 활짝 웃는 어린 이서윤이 있었다. 이가 다 보이도록 웃는 모습이었다.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눈이 반쯤 감길 정도로 크게 웃고 있었다.
"이렇게도 웃었어요?"
내가 놀라서 사진을 다시 들여다봤다. 지금의 그녀와 겹쳐 보려 했지만 잘 겹쳐지지 않았다.
"그때는 그랬지."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손끝으로 사진의 모서리를 톡톡 두드리며.
"근데 고백을 하도 많이 받다 보니까... 웃으면 오해받는다는 걸 알게 됐어."
그녀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평온함이 오히려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얼음꽃이 된 거예요?"
"응."
그녀가 사진을 다시 서랍에 넣었다. 서랍을 닫는 소리가 톡, 하고 작게 울렸다.
"웃지 않으면 아무도 다가오지 않으니까. 편했어."
그 말이 아프게 들렸다.
나는 그 말 뒤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쌓여 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웃음을 지우기로 결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오해와 시선을 견뎌야 했을지.
"근데 요즘은..."
그녀가 나를 힐끗 보며 말을 이었다.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자꾸 웃게 돼."
그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신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귀 끝까지 열이 오르는 게 느껴져서, 나는 괜히 싱크대 쪽으로 몸을 돌려 설거지를 하는 척했다.
물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
다음 날, 학교 점심시간이었다.
나는 매점에서 빵을 사서 나오다가 이서윤과 마주쳤다. 손에는 아직 뜯지 않은 크림빵이 들려 있었다.
"강하준."
그녀가 먼저 불렀다.
평소라면 서로 모른 척하던 순간이었다. 눈이 마주쳐도 살짝 고개만 끄덕이고 지나가는 게 우리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자연스럽게 내 옆에 서서 걸었다.
"오늘 저녁에 뭐 해줄 거야?"
그녀가 작게 물었다. 복도를 지나는 다른 아이들 사이로,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맞추면서.
"생각해볼게요."
나는 웃으며 답했다.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그 순간, 그녀도 살짝 웃었다. 아주 짧은 웃음이었는데, 눈이 마주친 상태로 지어진 웃음이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금방 다시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갔지만, 그 짧은 순간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복도를 지나던 몇몇 아이들의 시선이 그 웃음에 멈췄다.
발걸음이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 누군가 소곤거리는 소리가 뒤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시선을 뒤늦게 느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서윤은 그런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듯, 아니면 신경 쓰지 않는 듯 태연하게 걸어갔다. 하지만 나는 그 뒤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수업 시간 내내 그 짧은 웃음의 잔상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
그날 밤, 나는 휴대폰을 확인하다가 반 단체 채팅방에 올라온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화면을 켠 순간, 알림이 수십 개 쌓여 있는 게 보였다. 손끝이 먼저 반응했다.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복도에서 나와 이서윤이 나란히 서서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누군가 몰래 찍어 올린 것이었다. 각도로 보아 뒤에서, 아마도 우리를 지나쳐 가던 누군가가 몰래 휴대폰을 든 게 분명했다.
사진 속 나는 웃고 있었고, 이서윤도 그 짧은 순간의 웃음이 그대로 찍혀 있었다.
사진 아래에는 이런 댓글이 달려 있었다.
[얼음꽃 녹았다 ㄷㄷ]
[강하준이랑 진짜 뭐 있는 거 아니냐]
[이거 이서윤 알면 난리날 듯]
[둘이 원래 아는 사이였어?]
[아니 근데 저 표정 봐 진짜 웃은 거 맞지]
순식간에 댓글이 스무 개 넘게 늘어났다. 화면을 내리는 손가락이 멈추지 않았다. 이름들이 뒤섞이고, 이모티콘들이 어지럽게 달려 있었다.
나는 손끝이 차갑게 식는 걸 느끼며 화면을 내려다봤다.
방 안은 조용했지만, 휴대폰 화면 속 세상은 소란스러웠다. 그 대비가 이상하게 숨을 막았다.
이서윤은 아직 이 사진을 못 본 것 같았다. 채팅방에는 그녀의 반응이 없었다. 그녀는 이 반 채팅방에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어쩌면 한동안 모를 수도 있었다.
내가 먼저 알려줘야 하나, 아니면 모른 척해야 하나.
휴대폰을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머릿속으로 몇 가지 문장을 만들어봤다가 지웠다. "그 사진 봤어요?" 너무 뻔했다. "별거 아닐 거예요." 확신도 없으면서 함부로 말할 순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새로운 알림이 울렸다.
딩.
[서윤_09] 나 방금 그 사진 봤어.
짧은 문장 하나가 화면에 떠 있었다.
그 뒤로는 아무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
화면이 그대로 멈춰 있었다. 말줄임표도, 다음 문장도 뜨지 않았다. 그녀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나는 답장을 쓰려다 몇 번이나 지웠다.
'괜찮아요?'라고 썼다가 지웠다. '신경 쓰지 말아요'라고 썼다가 또 지웠다. 어떤 말도 지금 이 상황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화면 위, 커서만 깜빡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