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역전세계 호스트남

3화

서류는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소율이 아는 지인을 통해 만든 신분증과 편입 서류였다. '이도현, 24세.' 나이는 얼추 맞췄고, 이름은 그대로 썼다.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진 서류인지는 묻지 않는 게 나았다. 이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그 정도 융통성쯤은 받아들여야 했다. 서류를 받아 든 도현은 종이 위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원래 세계에서도, 이 세계에서도 이름은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그래도 나는 나구나.' 그렇게 되뇌었지만, 정작 손에 쥔 신분증 속 사진은 낯설었다. 언제 찍었는지도 모르는 사진이었다. 대학 첫날, 도현은 강의실 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안에서 여학생들의 웃음소리가 왁자하게 들려왔다. 남학생들은 구석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여기서도 저 구도구나.' 도현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 빈자리를 찾았다. 강의실은 계단식으로 되어 있었는데, 앞쪽 자리는 이미 다 찼고 뒤쪽 자리만 듬성듬성 비어 있었다. 도현은 발걸음을 죽이며 뒷줄로 향했다. "거기 앉아도 돼요." 누군가 옆자리를 툭 두드렸다. 애시브라운 숏컷에, 귀에는 작은 피어싱이 세 개나 달려 있는 여학생이었다. "고맙습니다." 도현이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한서은이에요."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신입생?" "이도현입니다. 네, 신입생이에요." "어머, 얼굴 진짜 잘생겼다." 한서은은 스스럼없이 말했다. 도현은 그 말에 얼굴이 살짝 붉어졌지만, 서은은 개의치 않고 계속 떠들었다. "이따 밥 같이 먹을래요? 학식 별로 안 좋은데 그래도 사람이랑 먹어야 맛있잖아." '이 세계에서는 이런 게 자연스러운 건가.' 도현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이 시작되자 서은은 태도를 바꿔 노트를 펴고 필기에 집중했다. 조금 전까지 떠들썩했던 사람이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진 모습이 신기했다. 도현은 옆에서 그 낙차를 지켜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수업이 끝난 뒤, 서은은 정말로 도현을 데리고 학생식당으로 향했다. 식판을 받아 든 서은은 계속 학교 이야기며 교수 평판이며 이런저런 잡담을 늘어놓았다. 도현은 대부분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맞춰주는 것만으로도 대화는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이런 식으로 사람 사귀는 게, 아직도 익숙하지 않네.' 도현은 밥을 먹으며 생각했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 그날 저녁, 도현은 소율의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으며 대학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친구도 사귓네요." 소율이 미소를 지었다. "네. 그런데 등록금이랑 생활비를 생각하면……" 도현이 말을 흐렸다. "저도 이제 뭔가 벌어야 할 것 같아요." 소율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꽤 길게 이어져서, 도현은 괜히 국그릇을 뒤적였다. "우리 가게에서 일해볼래요?" "가게요?" "호스트바요. 내가 경영하는 곳이에요." 소율이 담담하게 말했다. "손님 접대만 잘하면 되는 일이에요. 얼굴도 되고, 말도 잘하잖아요." 도현은 순간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 '호스트바라니.' 원래 세계에서도 그런 업종이 있긴 했지만, 자신이 그 안에 들어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해본 일이었다. 하지만 신원도 불명확한 그를 채용해줄 곳이 어디 또 있을까. 게다가 소율의 가게라면 최소한의 안전은 보장될 것이었다. "급여는 시급이 아니라 손님한테 받는 팁이랑 매출 비율로 계산돼요." 소율이 덧붙였다. "처음엔 적을 수도 있지만, 손님 몇 명만 확보하면 대학 등록금은 충분히 나와요."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도현이 되물었다. "잘생긴 얼굴에, 예의도 있고, 말도 곱게 하잖아요. 그거면 반은 먹고 들어가는 일이에요." 소율이 픽 웃었다. "해보겠습니다." 도현이 대답했다. *** 다음 날 저녁, 도현은 소율을 따라 가게로 향했다. 간판에는 은은한 조명 아래 'Salon SOL'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간판 아래 작은 화분들이 나란히 놓여 있는 게, 술집이라기엔 어딘가 아기자기한 느낌이었다. 계단을 내려가자 어두운 조명과 낮게 깔린 음악이 먼저 도현을 맞았다. 벽지는 짙은 와인색이었고, 테이블마다 놓인 스탠드 조명이 은은하게 실내를 물들이고 있었다. '이런 색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도 놀랍네.' 도현은 속으로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한 남자가 웨이터복을 입고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었다. 서른쯤 되어 보이는, 웃음이 헤픈 인상의 남자였다. "어, 신입이에요?" 그가 반갑게 다가왔다. "저는 유성이라고 불러요. 본명은 아니지만, 여기선 다 그렇게 부르니까." "이도현입니다." "잘 왔어요. 여기 일이 별건 없어요. 손님이 원하는 대로 웃어주고, 술 따라주고, 대화 상대 해주면 끝이에요." 유성이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설명했다. "단,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게 세 가지 있어요." "세 가지요?" "하나, 손님한테 먼저 스킨십하지 말 것. 둘, 손님 사생활 캐묻지 말 것. 셋, 어떤 손님이든 함부로 무시하지 말 것." 유성이 손을 탁 접었다. "이 셋만 지키면 여기서 오래 버틸 수 있어요."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규칙은 어디서든 비슷했다. "참, 옷은 사장님이 미리 준비해뒀어요. 사이즈 맞나 한번 입어봐요." 유성이 뒤편 옷걸이를 가리켰다. 검은 셔츠와 조끼가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도현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유성이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이야, 이 정도면 사장님이 왜 픽했는지 알겠네." 유성이 낄낄거렸다. "여기 손님들 눈이 좀 높아서, 얼굴 안 되면 명함도 못 돌려요." "그, 그런가요." 도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하나 더." 유성이 목소리를 낮췄다. "진짜 위험한 손님을 만나면 무조건 도망쳐요. 알겠죠?" "위험한 손님이요?" "가끔 있어요. 술 들어가면 딴사람 되는 사람들. 그런 손님은 소율 사장님도 어쩔 수가 없어요." 유성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몇 달에 한 번 정도예요. 근데 한 번 걸리면 좀 골치 아파요. 그러니까 그런 느낌이 들면, 무조건 자리 피해요. 알겠죠?" "어떤 느낌인지 어떻게 알아요?" "그건... 딱 오면 알아요." 유성이 애매하게 웃었다. "설명하기가 좀 그런데, 만나보면 압니다." 도현은 그 말을 그저 흘려들었다. 아직은 그게 무슨 뜻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말이 며칠 뒤 그의 삶을 통째로 흔들어놓을 예고편이었다는 걸, 그때의 도현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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