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역전세계 호스트남

5화

다음 금요일이 되기 전까지, 도현에게는 숨 돌릴 틈이 몇 번 있었다. 그중 하나가 공원의 농구코트였다. *** "오빠, 왜 이렇게 늦게 와." 박유나가 팔짱을 낀 채 볼을 부풀렸다. 흑발 숏컷 위로 파란 꽃 헤어핀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저 헤어핀, 지난번에도 봤던 것 같은데 색이 조금 바뀐 것 같기도 했다. 도현은 굳이 묻지 않았다. 물었다가 삼십 분짜리 강의를 들을 자신이 없었다. "일 때문에." 도현이 웃으며 공을 튕겼다. "일이 뭔데." 유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중학생답게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 그리고 그 호기심은 상대가 얼버무릴수록 배가되는 종류였다. "그냥, 서비스업." 도현은 얼버무렸다. 굳이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손목이 잡히고 눈이 붉어지는 손님을 상대한다고 말했다간, 이 아이는 아마 다음 날부터 가게 앞에서 잠복을 시작할 것이다. 유나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대신 공을 뺏듯 낚아채더니 골대를 향해 뛰었다. "오늘도 나 이길 자신 있어?" "글쎄." 도현이 짧게 웃고는 뒤따랐다. 둘의 승부는 늘 팽팽했다. 유나는 키는 작았지만 순발력이 좋았고, 도현은 신체 조건은 나았지만 이 세계 특유의 감각이 여전히 어색했다. 공을 튕기는 손끝의 무게감이라든가, 발바닥에 걸리는 아스팔트의 마찰력 같은 것들이 원래 살던 세계와는 미묘하게 달랐다. 그 차이를 몸으로 익히는 데만 몇 달이 걸렸다. "야, 그거 파울이잖아!" 유나가 소리쳤다. "어디가." 도현이 시치미를 뗐다. "팔로 밀었잖아, 방금!" "기분 탓이야." "기분 탓이 아니라 물리적 접촉이었거든?" 말투는 야무진데, 정작 몸으로 부딪힐 때마다 유나의 얼굴이 붉어지곤 했다. 그게 승부욕 때문인지 다른 이유인지 도현으로선 알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조금 짐작이 갔지만 모르는 척하는 게 서로에게 편할 것 같았다. "오늘은 내가 이겼어!" 유나가 마지막 슛을 성공시키고는 두 팔을 번쩍 들었다. 골 그물이 흔들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인정." 도현이 손을 뻗어 하이파이브를 청했다. 유나의 손이 도현의 손바닥에 닿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아, 아니 그냥 우연이야!" 유나가 황급히 손을 빼며 딴청을 부렸다. 저만치 떨어진 벤치를 보며 괜히 신발끈을 다시 묶는 시늉을 했는데, 끈은 애초에 풀려 있지도 않았다. 도현은 그 반응이 재밌어서 웃음을 참았다. '귀엽네.' 짧은 감상이었지만,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일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저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아무 계산 없이 웃을 수 있는 시간이라고만 생각했다. 세라의 손목 힘도, 소율의 서늘한 눈빛도 없는 시간. 그런데 그 평화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 그날 밤, 가게로 돌아온 도현은 소율에게 세라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카운터 위에 앞치마를 벗어 놓으며 담담하게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생각보다 딱딱하게 나왔다. "손목을 잡았다고?" 소율이 눈매를 좁혔다. 평소의 담담한 표정 밑으로 뭔가 날카로운 것이 스쳐 지나갔다. 도현은 그 표정을 처음 봤다. 지금껏 소율이 감정을 드러내는 걸 본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네. 취기가 오르면 갑자기 성격이 변하는 것 같았어요." 도현이 손목을 문지르며 말했다. 아직도 그때의 압력이 남아있는 듯했다. 붉게 남은 자국은 벌써 사라졌는데도, 손목 안쪽이 계속 뻐근한 느낌이었다. "세게 잡혔어?" "세다는 말로는 부족해요. 그냥 사람 힘이 아닌 것 같았어요." "유성한테 물어봤어?" "평판은 좋대요. 그것만 이상해요. 다른 사람들한텐 안 그러는 건지, 저한테만 그런 건지." 도현은 그 말을 하며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느꼈다. 왜 나한테만. 이 세계에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한테 왜. 소율은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평소보다 길게 느껴졌다. 그러고는 가게 안쪽, 사무실로도 쓰이는 작은 방으로 도현을 데려갔다. *** 그 방은 도현이 처음 보는 공간이었다. 책상 하나와 낡은 캐비닛, 그리고 벽 한쪽에 걸린 오래된 사진 몇 장이 전부였지만, 어딘가 다른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도현은 이유 없이 어깨가 굳는 걸 느꼈다. "여긴 뭐예요?" 도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내 공간." 소율이 짧게 답했다. "손님도, 직원도 잘 안 들어와." "그럼 저는 왜 데려오신 거예요?" "알아야 할 게 있으니까." 소율은 열쇠를 꺼내 캐비닛을 열었다. 열쇠 구멍에 맞춰 넣는 손끝이 평소보다 느렸다. 캐비닛 안에는 낯선 서류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손님 명단, 그리고 그 옆에 적힌 짧은 메모들. '주의', '단독 대응 금지' 같은 단어들이 눈에 띄었다. 어떤 이름 옆에는 붉은 밑줄이 두 번 그어져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도현이 눈을 크게 떴다. "위험한 손님들 기록." 소율이 캐비닛을 닫으며 말했다. "장세라 이름도 있을 거야. 아직 확인은 못 했지만." "확인이 안 됐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명단에 없다는 거예요, 아니면 못 찾았다는 거예요?" "둘 다일 수도 있어." 소율이 캐비닛에 손을 얹은 채 말했다. "이 명단이 다가 아니거든." 도현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세라가 그저 '집착이 좀 강한 손님' 수준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붉은 밑줄 두 개가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저,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돼요?" "확인해볼게." 소율이 낮게 말했다. "당분간 세라 씨 응대는 최대한 조심해. 혼자 두지 마. 누구든 옆에 붙여." "만약에요, 진짜로 위험한 사람이면요?" 소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캐비닛 문을 다시 한번 확인하듯 손으로 눌러 잠갔다. 그 침묵이 어떤 대답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다짐이 지켜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는 걸 두 사람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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