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두 번째 여자친구 선언

1화

이준호는 새벽부터 눈이 떠졌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이었다. 창밖은 아직 푸르스름한 어둠이었다. 그는 천장을 한참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오늘, 윤서아와 두 번째로 단둘이 만난다. 그는 침대 끝에 앉아 휴대폰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시계는 새벽 다섯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약속은 열두 시. 아직 여섯 시간이나 남았는데도 심장은 벌써부터 뛰기 시작했다. 그는 옷장을 세 번이나 뒤집었다. 셔츠를 걸쳤다가 벗고, 다시 걸쳤다. 흰 셔츠는 너무 딱딱해 보였고, 회색 니트는 나이가 들어 보였다. 결국 처음 골랐던 셔츠로 돌아왔다.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정리하는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몇 번이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가, 다시 흐트러뜨렸다가, 결국 물을 묻혀 겨우 정리했다. '괜찮아. 오늘은 다를 거야.' 낫표 안의 목소리는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었지만, 심장은 그 말을 믿지 못하고 계속 뛰었다. 그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눈 밑이 살짝 어두웠다. 어젯밤에도 잠을 설쳤던 탓이었다. 1학년 봄, 복도 끝에서 처음 본 서아의 옆모습을 그는 아직도 기억했다. 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그녀의 뺨을 스칠 때, 세상이 잠깐 멈춘 것 같았다. 교복 치마 아래로 드러난 발목, 바람에 살짝 흔들리던 단발머리, 책을 넘기던 손끝의 움직임까지도 그는 전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부터 그는 일 년 넘게 그녀만 바라보았다. 매일 아침 교문에서 인사를 건넸고, 매번 무시당했다. 어느 날은 대답조차 없이 지나쳤고, 어느 날은 짧게 고개만 까딱였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들고 그녀의 반 앞에서 기다렸고, 생일이면 몰래 책상 위에 초콜릿을 두고 왔다. 돌아오는 반응은 늘 무심했지만, 그는 그것마저도 소중히 여겼다. 그리고 지난주, 서아가 먼저 고백을 해왔다. 교실 뒤편, 아이들이 모두 나간 뒤였다. 그녀는 아무 표정 없이 다가와 "우리 사귈래?"라고 말했다. 준호는 그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되물었는지 모른다. "진짜야? 나랑?" 서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 순간을 아직도 믿기 힘들었다. 꿈같았다. 며칠이 지난 지금도 그는 문득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벅차오르곤 했다. 그래서 오늘, 그는 두 시간 전부터 약속 장소인 공원 벤치 근처에서 서성거렸다. 손에는 미리 사둔 음료 두 캔이 들려 있었다. 하나는 서아가 좋아한다던 딸기 맛, 하나는 자신이 마실 것이었다. 벤치 주변을 몇 번이나 서성이며 그는 시계를 확인했다. 열한 시 오십 분, 오십오 분, 열두 시 정각. 그는 벤치에 앉았다가 다시 일어났다가, 나무 그늘 아래를 걷다가 다시 벤치로 돌아왔다. 서아는 정확히 오 분 늦게 나타났다. 멀리서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준호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손에 쥔 음료 캔이 살짝 미끄러웠다. 땀이 난 탓이었다. 그녀는 인사도 없이 벤치에 앉았다. 눈빛이 차가웠다. 준호는 애써 웃으며 다가갔다. — 오늘 예쁘다, 서아야. 그는 준비해온 음료 캔을 내밀었다. 서아는 그것을 받지 않았다. 서아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시선이 발끝에서 멈췄다. — 너 오늘 그 신발 신고 온 거야? 준호는 순간 말이 막혔다. 손에 든 음료 캔이 갑자기 무거워진 것 같았다. — 어, 어제 새로 산 건데... — 촌스러워. 진짜. 짧은 문장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냉기는 준호의 가슴 한복판을 그대로 찌르고 지나갔다. 그는 애써 웃음을 유지했다.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갔다. — 미안, 다음엔 다른 걸로 신고 올게. — 아니, 됐어. 그냥 오늘 만나기로 한 게 후회돼서 하는 말이야. 정적이 흘렀다. 바람이 벤치 위로 지나갔다. 준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손에 든 음료 캔을 벤치 옆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딸기 맛 음료는 결국 건네지도 못한 채였다. 그는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 위로, 아주 천천히. '이번엔 괜찮을 거야.'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손끝이 그녀의 손에 닿기 직전,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하지만 서아는 손을 확 빼며 몸을 뒤로 물렸다. 얼굴에는 순간적으로 혐오의 표정이 스쳤다. — 뭐 하는 거야?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 그냥... 손이라도 잡고 싶어서. — 그런 거 하려면 미리 물어봐야지. 너 진짜 예의 없다. 준호는 손을 다시 무릎 위로 내려놓았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귓속까지 들렸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벤치 아래 땅바닥만 내려다보았다. — 미안해... — 됐어.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나 갈게. 서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벤치 옆에 놓인 음료 캔은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준호는 벤치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방금까지 그녀의 손을 잡으려던 손이었다. 손끝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는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 마른 잎 몇 개가 벤치 위로 굴러왔다. 그는 옆에 놓인 음료 캔을 집어 들었다. 아직 차가웠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두고, 뗄 수 없는 마음처럼 오래도록 만지작거렸다. '다음엔... 다음엔 다를 거야.' 그는 그렇게 되뇌었다. 하지만 그 말이 자신의 귀에도 공허하게 들렸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나무 그늘 아래, 누군가 이 모든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그림자는 벤치 쪽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준호가 손을 뻗는 순간부터, 서아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순간까지, 단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그 그늘 속 인영의 손에는 이미 다 마셔버린 음료 캔이 아그작 소리를 내며 구겨지고 있었다. 캔은 완전히 형태를 잃을 때까지 구겨졌다. 그 소리는 공원의 정적 속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하지만 준호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무릎 위에 놓인 음료 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늘 속 인영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구겨진 캔이 발밑으로 툭 떨어졌다. 그리고 조용히, 벤치와는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