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두 번째 여자친구 선언

5화

감정이 조금씩 쌓여가던 날들이었다. 다은은 준호가 알지 못하는 사이 그의 편으로 조용히 진영을 넓혀갔다. 배구부 부원들, 몇몇 반 친구들. 처음엔 그저 지나가는 말처럼, 준호가 서아에게 어떤 대우를 받는지를 슬쩍 흘렸다. 그러다 점심시간, 체육관 뒤, 매점 앞 자판기 앞에서 서아가 준호에게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처음엔 다들 별일 아니라는 듯 웃어넘겼지만, 같은 장면이 반복되자 표정이 달라졌다. — 야, 저거 좀 심한 거 아니야? — 준호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작은 속삭임들이 모여 점점 또렷한 목소리가 되었다. 학교 안의 시선도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복도에서 서아를 바라보는 눈빛에 예전 같은 동경 대신 미묘한 거리감이 섞였고, 준호를 향한 시선에는 알 듯 모를 듯한 동정과 응원이 담겼다. 그럼에도 준호는 여전히 서아를 놓지 못했다. 그는 매일 인사를 건넸고, 매일 무시당했다. 아침마다 신발장 앞에서, 급식실 줄에서, 체육 수업이 끝난 뒤 땀에 젖은 얼굴로. 준호는 서아가 지나갈 때마다 어김없이 손을 들어 보였고, 서아는 어김없이 시선을 피했다. 손을 뻗었다가 거둬들이는 일이 반복됐다. 심장은 매번 다시 상처를 입었지만, 그는 그 상처를 굳이 들여다보지 않으려 했다. 마치 상처를 못 본 척하면 아프지 않은 것처럼, 그는 매일 새로운 상처 위에 또 다른 상처를 덧대며 걸었다. 친구들은 그런 준호를 볼 때마다 한마디씩 던졌다. — 준호야, 너 그만해도 돼. 아무도 너한테 뭐라 안 해. — 그만하는 게 이기는 거야, 이 자식아. 그러나 준호는 그 말들을 들을 때마다 그저 웃었다. 옅고 힘없는 웃음이었다.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게 아니라는 걸. 하지만 손을 놓는 순간 정말로 모든 게 끝나버릴 것 같아서, 그는 그 끝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오후, 준호는 옥상 계단 앞에서 서아와 우연히 마주쳤다. 6교시가 끝난 직후였다. 계단 특유의 서늘한 공기가 감돌았고, 창문으로 스며드는 오후 햇살이 먼지 낀 계단참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 서아야. 서아가 걸음을 멈췄다. 눈빛에는 여느 때처럼 짜증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준호를 위아래로 훑었다. — 또 뭐. 준호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오늘은 그냥 넘기지 않겠다고, 등굣길부터 몇 번이나 다짐하고 온 참이었다. — 너 진짜 나 좋아하긴 하냐. 서아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 뭐? — 매번 이런 식이잖아. 손 한 번 잡는 것도 혐오스러워하고, 사람들 앞에서 나를 그렇게 밀쳐내고. 좋아한다는 애가 이럴 수 있어? 서아는 잠시 침묵했다. 계단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그녀의 옆얼굴을 스쳤다. 그러다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 너 지금 나한테 따지는 거야? — 묻는 거야. — 웃기네. 니가 뭘 안다고. 준호의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졌다. 그동안 눌러왔던 말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 나 일 년 넘게 너 좋아했어. 근데 넌 나한테 고백까지 받아준 다음에도 매번 이런 식이야. 이게 정상이야? 남들 앞에서는 나 없는 사람 취급하고, 둘이 있을 때만 잠깐 웃어주고. 나 그거 하나 붙잡고 여기까지 왔어. — 그럼 그만두던지. 짧고 차가운 대답이었다. 준호는 순간 말을 잃었다. 목 안이 바짝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서아는 그를 지나쳐 계단을 내려가려 했다. 발걸음에는 조금의 미련도 없었다. 그 순간 준호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 대답해. 나 진짜 알아야겠어. 서아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팔을 붙잡은 준호의 손을 내려다보는 시선에 경멸이 섞여 있었다. — 놔. — 서아야. — 놓으라고. 팽팽한 정적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옥상으로 오르는 계단 위, 바람이 두 사람의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준호의 손끝은 여전히 서아의 팔을 붙잡고 있었고, 그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붙잡고 있는 것은 팔이 아니라, 이제는 놓쳐서는 안 될 것 같은 마지막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그때, 계단 아래에서 다은이 뛰어 올라왔다. 숨이 가빴는지 어깨가 크게 오르내렸다. — 야, 뭐 하는 거야! 다은이 준호의 손을 강제로 떼어냈다. 손아귀에 힘이 얼마나 들어가 있었는지, 떼어내는 손끝에도 저항이 느껴졌다. 준호는 그제야 자신이 서아의 팔을 얼마나 세게 붙잡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서아의 팔에는 손가락 모양의 붉은 흔적이 옅게 남아 있었다. 서아는 팔을 문지르며 다은을 흘겨보았다. 짜증과 불쾌함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 너네 둘 다 왜 이래.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계단 아래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준호는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준호는 그 자리에 주저앉듯 벽에 등을 기댔다. 숨이 가빴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손끝이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다은은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안타까움과 답답함, 그리고 그보다 더 복잡한 무언가가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 따라와. — 어디로. — 옥상. 준호는 별다른 저항 없이 그녀에게 끌려갔다. 두 사람은 계단을 올라 옥상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 오후의 햇빛과 바람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바람이 세게 불었다. 옥상 바닥에 깔린 낡은 매트가 바람에 살짝 들썩였고, 멀리서 운동장의 함성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다은은 난간에 기대선 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운동장 너머 어딘가를 향해 있었지만, 실제로 무엇을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는 아직도 옅은 떨림이 남아 있었다. — 다은아, 나 진짜 이제 모르겠어.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건지. 다은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그녀는 그것을 숨기려 고개를 살짝 돌렸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지나갔다. — 준호야. — 응. — 나 이제 더는 못 보겠어. 준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다은의 표정은 이전과 달랐다. 흔들림 없이, 무언가를 완전히 결심한 얼굴이었다. 평소 그가 알던 다은의 얼굴과는 다른, 처음 보는 종류의 단단함이 그 안에 있었다. — 무슨 말이야? 다은은 입술을 깨물었다. 오랫동안 삼켜온 말이 목 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몇 번이나 삼켰다가 다시 올라오는 말이었다. —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지금까지 아무한테도 안 한 말인데... 바람이 두 사람 사이로 세차게 지나갔다. 다은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준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결연함이 담겨 있었다. — 오늘 나, 너한테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이 있어. 준호는 그녀의 눈빛에서 처음 보는 종류의 긴장을 느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방금 전 서아와의 일 때문인지, 아니면 지금 이 순간의 다은 때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 다은아, 왜 그래... 다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 걸음, 그에게 더 다가섰다. 그녀의 그림자가 준호의 발끝에 닿을 만큼,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바람이 다시 한 번 두 사람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고, 옥상의 정적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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