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짝사랑 왕따, 여왕의 공범

3화

학교에서 소미와 마주치는 순간마다 나는 그 짧은 웃음의 기억을 자꾸 곱씹었다. 복도에서 스쳐 지나갈 때, 급식실 줄에서 몇 발자국 떨어져 서 있을 때, 심지어 수업 시간에 칠판만 바라보고 있어야 할 때조차도, 그날 소미가 나를 향해 지어 보였던 그 웃음이 눈앞에 자꾸 겹쳐 떠올랐다. 착각일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이미 확인하고 싶다는 충동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 충동은 처음엔 손톱만큼 작았는데, 며칠이 지나자 가슴 한복판을 꽉 채울 만큼 커져 있었다. 밤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서도 그 생각만 했다. 이불 속은 후텁지근했고, 숨을 쉴 때마다 내 숨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소미가 나를 보고 웃은 게 정말 나를 향한 웃음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지나가다 시선이 겹친 것뿐이었을까. 그 답 없는 물음을 몇 번이고 되뇌다가 결국 나는 결심했다. 확인해야겠다고. 그래서 어느 오후, 나는 처음으로 먼저 소미에게 다가갔다. 사물함이 늘어선 복도 끝, 오후 햇살이 창문으로 비스듬히 들어와 바닥에 긴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소미는 사물함 문을 열어놓고 책을 꺼내는 중이었는데, 그 뒷모습만 보고도 나는 발걸음을 떼기까지 한참을 머뭇거려야 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났다. 옷자락을 두어 번 움켜쥐었다가 놓았다가, 그러고도 모자라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서야 겨우 입을 뗄 수 있었다. "저기, 소미야." 목소리가 떨렸다. 소미가 사물함 앞에서 뒤를 돌아보자 심장이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후들거렸다. 그 짧은 순간이 유독 길게 느껴졌는데, 소미의 눈동자가 나를 향해 완전히 돌아오기까지의 그 몇 초가 마치 슬로모션처럼 늘어졌다. "오늘 같이 하교할래?" 말을 뱉고 나서야 손끝이 차갑게 식는 걸 느꼈다. 이렇게 먼저 말을 건넨 게 얼마 만인지,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 초등학교 이후로, 아니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나는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걸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소미는 잠깐 나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그 웃음이 정말 내가 기억하던 그 웃음과 똑같아서,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래, 좋아." 짧은 대답이었지만 나는 그 순간 세상이 조금 환해진 것 같았다. 창문으로 들어오던 햇살이 갑자기 더 밝아진 것 같기도 했고, 복도를 지나가는 아이들의 소음도 멀게만 느껴졌다. 콧잔등이 시큰거리는 걸 참으며,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사물함을 정리했다. 손이 떨려서 책 한 권을 두 번이나 놓칠 뻔했다. 하교길, 우리는 나란히 걸었다. 교문을 나서자마자 소미는 가방끈을 한 번 고쳐 메며 걸음을 맞췄고, 나는 그 옆에서 반 발짝 뒤처지지 않으려 애쓰며 걸었다. 초여름이라 바람이 제법 선선했는데, 그 바람에 소미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걸 나는 곁눈으로 훔쳐보고 있었다. 소미는 평소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제 본 드라마 이야기, 담임 선생님이 낸 숙제가 너무 많다는 불만, 편의점에서 새로 나온 아이스크림이 맛있다는 얘기까지. 나는 그 이야기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대답은 짧게 짧게 했지만, 속으로는 소미의 말투와 표정, 웃을 때 살짝 접히는 눈매까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눈에 새기고 있었다. 문득 소미가 물었다. "태오야, 너는 왜 그렇게 조용해?" 그 질문에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가로수 그늘이 도로 위에 얼룩덜룩한 무늬를 그리고 있었고, 그 무늬를 밟으며 걷던 발걸음이 순간 멈칫했다. "그냥, 원래 그래." 대답을 얼버무리자 소미는 별다른 반응 없이 화제를 돌렸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더 캐묻지 않아서. 그 순간, 나는 문득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시절, 반 아이들과 함께 놀던 어느 오후, 갑자기 걸려온 전화 한 통에 어머니가 학교로 뛰어오던 모습이었다. 운동장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어머니의 등, 그 등이 이상하게 작아 보였던 기억. 나는 그때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다가 멀리서 뛰어오는 어머니를 보고 처음엔 반가웠는데, 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순간 반가움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세상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의 사고 소식을 들은 게 그날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게 무서웠다. 가까워진 만큼, 잃을 때 더 아프다는 걸 몸으로 배웠으니까. 그런데 지금, 소미와 나란히 걷고 있는 이 순간이 그 두려움을 잠시 잊게 해주고 있었다. 발끝에 닿는 보도블록의 감촉, 옆에서 들려오는 소미의 목소리, 가끔 스치는 어깨. 그 모든 게 낯설면서도 따뜻했다. 죽을 것 같아. 좋다는 감정이 이렇게도 무섭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심장이 갓 잡은 활어처럼 펄떡였고, 그 박동이 목까지 올라와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소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미야, 나… 너 좋아하는 것 같아." 말이 입 밖으로 나가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귀까지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소미는 잠시 멈춰 서더니, 살짝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고,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다시 다물어졌다. "어… 그래?" 짧은 대답 뒤에 이어진 웃음은 평소보다 어딘가 뻣뻣했다.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눈은 웃지 않는, 그런 웃음이었다. "고마워, 근데 지금은… 아직 잘 모르겠어." 소미의 시선이 순간 내 눈을 피해 저 멀리 어딘가로 향했다. 그 시선이 가 닿은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나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그 순간, 나는 뭔가가 어긋났다는 걸 느꼈다. 손끝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는데, 그게 설렘 때문인지 불안 때문인지조차 구분이 되지 않았다.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몇 초간의 침묵이 몇 분처럼 길게 늘어졌다. "아, 그렇구나." 나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지만, 목소리가 갈라지는 걸 숨길 수 없었다. 소미는 그 어색함을 눈치챈 듯 괜히 가방끈을 만지작거렸고, 우리는 남은 길을 어정쩡한 침묵 속에서 걸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채워졌을 그 거리가, 그날은 유난히 멀고 무겁게 느껴졌다. 집 앞 골목에서 소미와 헤어질 때, 소미는 손을 흔들며 "내일 보자"라고 말했지만 그 말투에도 미묘한 거리감이 배어 있었다. 나는 그 뒷모습이 골목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소미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몸을 돌려 집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나는 소미가 지어 보인 그 뻣뻣한 웃음을 계속 떠올렸다. 방 안에 불을 끄고 누워서도, 천장의 어둠 속에서도 그 웃음만 자꾸 되풀이해서 나타났다. 좋아하는 마음과 함께, 알 수 없는 서늘함이 가슴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도 그 서늘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신뢰와 불안이 뒤섞인 그 감정을, 나는 그때까지도 제대로 이름 붙이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소미의 그 시선이 향했던 곳, 그 어딘가에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무언가가 곧 나를 향해 다가올 거라는 예감이, 잠들기 직전까지도 가슴 한구석을 서늘하게 긁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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