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 뻣뻣한 웃음을 마음에 담아둔 채로 며칠이 흘렀다. 소미는 여전히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지만,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 다정함을 예전처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물 밖으로 던져진 물고기처럼, 숨은 쉬고 있는데도 뭔가 계속 답답한 느낌이 가슴에 눌러앉아 있었다.
아침마다 소미가 웃으며 손을 흔들 때, 나는 반사적으로 따라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그 웃음의 결을 하나하나 뜯어보는 버릇이 생겼다. 눈은 웃고 있는데 정말 웃는 걸까, 입꼬리가 저렇게 올라간 건 진심일까 아니면 습관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스스로가 유치하고 못됐다는 자각이 들어서 고개를 흔들어 떨쳐내곤 했지만, 그 의심은 며칠이 지나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마음 한구석에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그날은 체육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하늘이 흐렸고, 강당으로 이동하는 복도에는 실내화 끄는 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여 울렸다. 나는 체육복으로 갈아입으면서도 소매 끝을 몇 번이나 다시 접었다가 풀었다가 하며 시간을 끌었는데, 딱히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몸이 자꾸 굼뜨게 움직였다.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는 게 싫어서였는지, 아니면 그냥 그 공간 자체가 부담스러워서였는지는 나도 잘 몰랐다.
강당 한복판에서 배구공이 이리저리 튀는 소리가 울렸고, 나는 늘 그렇듯 구석에서 조용히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벽에 등을 붙이고 서서 아이들이 서브를 넣고 받아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시간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며 시계 쪽으로 눈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 빠르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붕 떠올랐다. 등이 바닥에 부딪히며 숨이 턱 막혔다. 순간 천장의 조명이 시야 가득 들어왔고, 뒤통수가 얼얼했다.
"아, 미안!"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목소리는 반 전체가 다 아는, 5인의 재녀 중 한 명인 윤하늘의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숨이 차서 대답도 못 하고 눈만 깜빡였는데, 하늘은 내 팔을 잡아 일으키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진짜 미안해, 공 쫓다가 못 봤어." 그녀의 손은 크고 단단했는데, 그 손에 이끌려 몸을 일으키는 순간 나는 마치 아이처럼 작아진 기분이었다.
일어서면서도 다리가 살짝 후들거려서, 나는 몸을 지탱하려고 하늘의 팔뚝을 붙잡았다. 하늘은 그런 나를 보며 재빨리 다른 손으로 등을 받쳐주었는데, 그 손길이 어찌나 자연스럽던지 이게 처음 겪는 상황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어, 어. 괜찮아요." 겨우 그 말을 내뱉었을 때, 하늘 뒤편에서 걸어오는 또 다른 사람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겨울바람처럼 시리면서도 묵직한 공기가 먼저 다가왔고, 뒤이어 낮고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으세요?" 서지원이었다.
학교 최고 미녀이자 '빙의 여왕'이라 불리는 그 애가, 지금 내 눈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그 눈빛이었다. 흔들림 없이 고요한, 그러면서도 뭘 담고 있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눈. 그 아래로는 유난히 흰 목선이 드러났고, 체육복 소매를 걷어 올린 손목에는 옅게 남은 흉터 같은 자국이 하나 보였는데, 나는 그걸 오래 쳐다보지 못하고 얼른 시선을 거뒀다. 큰 키에서 뻗어 나오는 그림자가 나를 통째로 덮는 것 같아서,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목이 뻐근했다.
표정 하나 흐트러짐 없이, 마치 감정이 전부 다른 사람에게 옮겨간 것 같은 그 무표정함 때문에 붙은 별명이라는 걸 들었던 기억이 났다. 나는 그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떨궜다.
"네, 괜찮아요." 목소리가 떨렸다. 지원은 잠깐 나를 살펴보더니, 손을 뻗어 내 어깨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그 손이 어깨에 닿는 순간, 나는 숨을 잠깐 멈춘 채로 옴짝달싹 못 했다. 손끝이 스치는 감촉이 옷 위로도 서늘하게 느껴졌는데, 그 서늘함이 이상하게 불쾌하지 않았다. 그 손길이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그 무심함이 더 낯설게 느껴졌다. "조심해야지." 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 배려가 스며 있다는 걸 나는 그제야 눈치챘다.
지원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눈으로 따라가다가, 나는 문득 심장이 갓 잡은 활어처럼 펄떡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왜 이렇게 뛰는 거지. 놀라서 그런 거겠지, 하고 스스로에게 변명하듯 되뇌었지만 그 심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놀랐지? 지원이는 원래 저래. 표정이 별로 없어서 다들 처음엔 무서워하는데, 사실 되게 다정한 애야." 하늘이 옆에서 웃으며 속삭였다. 나는 그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체육 수업이 끝나고 강당을 나서는데, 하늘이 다시 다가와 물병을 하나 건넸다. "이거 마셔. 나 때문에 놀랐지?" 나는 얼떨결에 받아 들었는데, 손끝이 차가운 플라스틱의 감촉에 오히려 마음이 조금 놓이는 걸 느꼈다. 뚜껑을 열고 한 모금 마시자 목 안으로 넘어가는 물이 차갑게 식도를 타고 흘러내렸고, 그 감각에 그제야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괜찮아, 진짜. 나도 딴생각하다가 못 봤어."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하늘은 미안한 얼굴을 쉽게 풀지 않았다. "그래도 다음엔 조심할게. 너 다치면 안 되니까." 그 말이 왜인지 오래 마음에 남았다. 별거 아닌 인사치레일 수도 있는데, 나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속으로 되씹으며 복도를 걸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복도에서 지원과 마주칠 때마다 이상하게 시선이 먼저 갔다. 지원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가끔 아주 짧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건넸는데, 그 작은 몸짓 하나가 소미의 화려한 웃음보다 오히려 더 크게 마음에 남았다. 왜일까.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자꾸 되물었다. 수업 시간에 창밖을 보다가도, 급식실에서 줄을 서다가도, 불쑥 그 서늘한 눈빛이 떠올라서 나는 몇 번이나 혼자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그 무렵, 반 뒤편 창가에서 나를 조용히 지켜보는 또 다른 시선이 있었다. 한 달 전 전학 온 노은서였다. 그 애는 늘 무관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날만큼은 내 쪽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나는 뒤늦게야 알아챘다. 창문으로 스며드는 흐린 오후의 햇살 속에서, 은서의 눈동자는 유리처럼 투명하게 빛났는데, 그 안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는 도저히 읽어낼 수 없었다.
나는 그 시선을 눈치챈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오래도록 누군가에게 관찰당하고 있었다는 자각이 뒤늦게 몰려오면서, 소름이 서서히 팔뚝을 타고 올라왔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지.'
은서는 내가 눈치챈 걸 알아챘는지, 아주 천천히 시선을 거두고는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무심한 몸짓이 오히려 더 마음에 걸려서, 나는 그날 하루 종일 뒤통수가 따가운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