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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다리에 힘이 풀린 채로 나는 갈색 벌레떼가 밀려오는 광경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돌렸다. 저 규모라면 정면으로 부딪히는 순간 뼈도 못 추린다. 벌레라고 해봤자 하나하나는 손가락 두 개 크기밖에 안 됐지만, 저렇게 밀도 높게 뭉쳐서 움직이는 건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생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치 지구에 있을 때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메뚜기떼 영상이 눈앞에서 3D로 재생되는 느낌이었는데, 그때는 화면 너머로 보는 재미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 화면 안에 내가 갇혀 있다는 게 문제였다. 나는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무릎이 꺾여 다시 주저앉았는데, 각성의 대가라는 게 이런 근력 저하인가 싶어 짜증이 치솟았다. 이럴 거면 튜토리얼이라도 하나 던져주고 시작할 것 아닌가. 몸 상태 확인, 스킬 목록, 뭐 그런 거 하나 없이 다짜고짜 사지로 몰아넣는 게 이 세계의 운영 방침이라면 나는 진심으로 항의하고 싶었다. 일단 숨는 게 최우선이다. 나는 늪지 지형을 재빨리 훑어보며 몸을 숨길 만한 곳을 찾았다. 사방은 축축한 갈대와 썩은 나무뿌리로 뒤덮여 있었고, 발밑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질척거리며 신발을 붙잡았다. 오른쪽으로는 낮은 언덕이 이어져 있었는데, 그 아래로 뿌리가 뒤엉킨 굴 같은 구멍이 보였다. 크기가 애매하긴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크기를 재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나는 벌레떼의 웅웅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 걸 들으며 그쪽으로 기어가듯 몸을 움직였다. 손끝에 진흙이 잔뜩 묻어 미끄러웠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고, 나는 그저 살아야 한다는 본능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마치 수만 개의 작은 날개가 동시에 진동하는 것 같았는데, 그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 때마다 나는 이유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벌레 몇 마리 정도야 손으로 쳐내면 그만이지만, 저 정도 규모는 사람 하나를 통째로 삼키고도 뼈만 남길 놈들이었다. 언덕 아래 구멍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발밑의 흙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어어. 나는 균형을 잃고 몸이 뒤로 넘어가는 걸 느끼며 손을 뻗었지만, 이미 발밑의 땅이 통째로 꺼져버린 뒤였다. 몸이 아래로 쑥 빠져드는 감각과 함께 사방이 어두워졌고, 나는 등이 뭔가에 부딪히는 충격을 느끼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갈비뼈 근처에서 둔탁한 통증이 치솟았고, 숨을 쉴 때마다 옆구리가 찌르듯 아팠다. 잠깐이지만 이대로 갈비뼈가 부러진 채로 이 낯선 세계에서 죽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쳤는데, 그와 동시에 위쪽에서 벌레떼가 지나가는 소리가 멀어지는 걸 들으며 이상하게도 안도감이 밀려왔다. 웅웅거리는 소리는 점점 희미해지다가 완전히 사라졌고, 나는 그제야 숨을 크게 들이켰다. 추락해서 목숨을 건지다니, 인생 참 아이러니하다. 나는 낮게 헛웃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팔에 힘을 주고 상체를 세우자 갈비뼈 쪽에서 다시 통증이 울렸지만, 다행히 뼈가 부러진 정도는 아닌 듯했다. 그냥 죽지 않을 만큼 아픈 것, 그게 지금 내가 느끼는 감각의 정체였다. 통증을 참으며 주변을 둘러보니, 그곳은 지상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을 지하 공간이었다. 천장에서 스며드는 희미한 빛이 바닥에 자란 이끼를 비추고 있었는데, 그 이끼는 놀랍게도 은은한 청록색 빛을 스스로 뿜어내고 있었다.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이며 그 광경을 확인했다. 식물이 빛을 낸다고? 이거 완전 다른 세계 맞구나. 뒤늦게야 여기가 지구가 아니라는 사실이 실감으로 다가왔다. 지구에 있을 때는 야광 스티커나 형광펜 정도로만 봤던 빛이, 여기서는 살아있는 식물의 본성이라는 게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공간은 생각보다 넓었다. 벽면을 따라 낡은 돌기둥들이 세워져 있었고, 그 표면에는 알 수 없는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기둥은 대리석처럼 매끈한 재질이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도 표면의 광택이 거의 사라지지 않은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 문양들 중 몇 개가 각성 공간에서 봤던 문구들과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성진지력이니 공간법칙이니 하는 게 진짜 이 세계 어딘가에 뿌리를 두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이 지하 공간은 단순한 굴이 아니라 뭔가 더 오래된 흔적, 어쩌면 이 세계의 시스템이 실제로 작동하는 근원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벽면으로 다가갔고, 손끝으로 문양을 더듬으며 그것을 눈에 새겼다. 문양은 마치 나선형으로 뻗어나가는 뿌리 같은 형태였는데, 그 끝자락마다 작은 점들이 별처럼 흩어져 있었다. 그때였다. 손끝이 문양에 닿는 순간, 몸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는 감각이 다시 느껴졌다. 마치 각성 당시 느꼈던 그 낯선 힘이 반응하는 것 같았는데,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뗐지만 그 여파는 이미 온몸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팔뚝을 타고 뭔가 뜨거운 것이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 감각을 참아내려 했지만, 몸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반응하는 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 눈앞이 아득해지면서 시야 한구석에 흐릿한 문구가 떠올랐다. [성진지력의 미세한 파동이 감지되었습니다.] [사용 가능한 능력을 확인하려면 의지를 집중하십시오.] 사용 가능한 능력이라니, 이거 진짜 게임 인터페이스 아니냐. 나는 실소를 흘리면서도 손바닥을 펴고 그 위에 뭔가를 그려보는 듯한 상상을 했다.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는데 안 눌러볼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손끝에서 옅은 청백색 빛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 빛을 보며 심장이 쿵쾅거리는 걸 억누르지 못했다. 빛은 처음엔 실오라기처럼 가늘게 시작되더니 점점 굵어지며 손바닥 전체를 감싸듯 퍼져나갔다. 이건 분명 내 몸에서 나오는 힘이었다. 실제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증거가 눈앞에 있는 셈이었으니까. 나는 손을 뒤집어 보기도 하고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펴 보기도 하면서, 이 빛이 정확히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까지 통제 가능한지 가늠해보려 했다. 그 순간만큼은 벌레떼도, 통증도, 낯선 세계에 대한 불안도 잠시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그 흥분도 오래가지 못했다. 지하 공간 저편, 어둠에 잠겨 있던 통로 안쪽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돌바닥을 긁는 듯한 마찰음과 함께, 낮고 습한 숨소리가 통로를 따라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손끝의 빛을 황급히 갈무리하며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숨소리는 규칙적으로, 그러나 확실하게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벌레떼를 피해 숨어든 곳이 하필이면 또 다른 뭔가의 서식지였다는 사실이 이제야 실감으로 다가왔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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