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몸사리는 최강생존자

4화

숨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나는 손끝에 맺힌 빛을 황급히 거둬들이며 벽에 등을 붙였다. 등판에 닿는 돌벽의 냉기가 셔츠를 뚫고 살갗까지 스며들었는데, 그 서늘함이 오히려 정신을 붙잡아주는 느낌이었다. '이 좁은 공간에서 뭔가와 마주치면 도망칠 곳도 없는데.' 심장이 목젖까지 튀어 오르는 감각을 억누르며 나는 숨을 최대한 죽였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흙과 이끼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고, 그 냄새 사이로 뭔가 비릿한 것이 섞여 있다는 걸 눈치챘지만 지금은 냄새의 정체를 따질 여유가 없었다. 통로 안쪽에서 다시 마찰음이 들려왔다. 발톱이 돌바닥을 긁는 소리 같기도 했고, 두꺼운 무언가가 벽을 스치며 지나가는 소리 같기도 했다. 나는 그 소리의 리듬을 세어보려 애썼는데, 일정한 간격으로 끊기는 걸 보니 발이 여러 개 달린 것이 걷는 소리인 듯했다. '설마 저것도 벌레 계열이면 진짜 답 없는데.' 다행히 그 소리는 이내 멀어지는 방향으로 잦아들었다. 나는 한참을 그대로 서서 귀를 기울였고, 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판단한 뒤에야 어깨에 들어간 긴장을 풀었다. 어깨뿐 아니라 목덜미와 종아리까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저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마주치지 않은 게 다행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손바닥을 펼쳤다. 아까 느꼈던 그 청백색 빛을 다시 불러내려 했는데, 이번엔 좀 더 의식적으로 힘을 끌어올려 보고 싶었다. 처음 각성했을 때는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빛이었지만, 이번엔 내 의지로 얼마나 조절할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손끝에 온 신경을 집중하자, 다시 옅은 빛이 피어올랐고 그 빛이 점점 형태를 갖춰가며 작은 구체 모양으로 뭉쳐졌다. '이거 진짜 마법 같은 거 맞구나.' 나는 신기함에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봤는데, 구체는 손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공중에 남은 잔상처럼 따라왔다. 마치 손끝에 반딧불이를 매달아 놓은 것 같았고, 그 궤적이 허공에 잠깐 남았다가 서서히 흩어지는 모습이 묘하게 아름다웠다. 나는 손목을 크게 휘저어보기도 하고,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보며 빛의 반응을 살폈다. 손가락 끝마다 미세하게 다른 밝기로 반응한다는 걸 발견했을 때는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이거 완전 조명 장난감이네.' 그때 다시 눈앞에 문구가 떠올랐다. [성진지력 : 미약한 발광 및 열 방출 가능.] [공간법칙 : 짧은 거리의 공간 왜곡 감지 가능.] '공간 왜곡이라니, 이건 또 뭔 소린가.'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처음엔 그저 시스템이 던져주는 알아먹기 힘든 문구 중 하나겠거니 했는데, 곱씹어볼수록 뭔가 구체적인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벽 모서리 쪽 공기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아챘는데, 마치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보이는 신기루 같은 왜곡이었다. 처음엔 눈의 착각인가 싶어 몇 번이나 눈을 비볐지만, 그 흔들림은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계속 남아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쪽으로 다가가 손을 뻗었고, 손끝이 그 왜곡 지점에 닿는 순간 벽 너머의 공간이 순간적으로 겹쳐 보이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벽 너머로 또 다른 통로가, 아니 어쩌면 방이 얇게 겹쳐진 사진처럼 비쳤다가 이내 사라졌다. '이거 벽 너머를 보는 능력인가.'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몇 번이나 그 지점에 손을 대보았지만, 그 현상은 오래 지속되지 않고 곧 사라져버렸다. 두 번째 시도에서는 더 흐릿하게, 세 번째 시도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왜곡이 옅어졌는데, 아마 힘을 쓸 때마다 소모되는 뭔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이것도 무한정 쓸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거지.' 나는 조금 아쉬운 마음을 접고 손을 내렸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데.' 나는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이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얼마나 오래 쓸 수 있는지, 그리고 이걸로 저 바깥의 표범괴물이나 벌레떼를 상대할 수 있을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빛 좀 만들고 벽 너머가 살짝 비치는 정도로 그 괴물들을 상대한다는 건 상상만 해도 헛웃음이 나오는 일이었다. 인적 하나 없는 이 지하 공간에서 나는 오롯이 혼자였고, 내가 가진 힘이 진짜인지 착각인지조차 검증할 방법이 없었다. 학부 시절엔 논문 하나 쓰려면 선배들한테 물어보고 학회에 나가 발표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그럴 상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완전 독학이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다시 통로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대로 여기 계속 머물 수는 없었다. 벌레떼가 지상을 지나갔다면 이제 다시 올라가도 안전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반대로 이 지하 통로 안쪽에 뭐가 더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까 들었던 마찰음의 정체도 여전히 모르는 채였고, 그것이 이 통로 안쪽 어딘가에 서식하고 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기왕 여기까지 온 이상 조금만 더 안쪽을 살펴보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지상은 벌레 지옥일 텐데, 여기서 뭐라도 건지는 게 낫지.' 나는 벽면의 청록색 이끼를 조금 뜯어내 손에 쥐고, 그 빛에 의지해 통로 안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끼에서 나는 은은한 빛은 손전등만큼 밝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발밑의 돌부리 정도는 피할 수 있을 만큼은 되었다. 통로는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서 나는 작은 마찰음이 유독 크게 울렸고, 그 소리가 나 혼자만 있다는 사실을 계속 상기시켜주는 것 같아 묘하게 신경이 곤두섰다. 벽면의 문양은 안쪽으로 갈수록 더 복잡하고 정교해졌는데, 나는 그 문양들 중 일부가 사람의 형상, 혹은 별자리를 형상화한 모양이라는 걸 알아챘다. 어떤 문양은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사람의 형상 같았고, 그 주위를 작은 점들이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모양은 분명 별자리를 형상화한 것이었다. '이거 완전 고대 유적 아니냐.' 대학 시절 고문헌 연구를 하며 배웠던 감각이 되살아났는데, 이 문양들의 배치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뭔가 체계적인 기록에 가까워 보였다. 반복되는 간격, 일정한 크기, 그리고 문양 사이사이에 새겨진 작은 선들까지도 우연으로 보기엔 지나치게 규칙적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문양들을 눈으로 따라가며 통로 끝까지 걸어갔고, 그 끝에서 거대한 석문을 발견했다. 석문은 내 키의 세 배는 될 법한 크기로, 표면 전체가 짙은 회색 대리석질의 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위로 습기 때문인지 옅은 물기가 배어 있었고, 손을 대면 서늘한 감촉이 느껴질 것 같았다. 석문에는 손바닥 모양의 홈이 파여 있었는데, 그 주위로 각성의 제단에서 봤던 것과 유사한 청록빛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 문양은 은은하게 스스로 빛을 내고 있었는데,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잠들어 있던 것이 누군가의 접근을 감지하고 서서히 눈을 뜨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 홈에 손을 가져다 대야 할지 망설였다. '또 뭔가 정신 잃고 알아서 각성하는 거면 상관없는데, 만약 함정이면 어떡하지.' 각성의 제단에서 겪었던 그 알 수 없는 감각을 다시 겪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동시에 이번엔 그게 축복이 아니라 재앙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자꾸 발목을 잡았다. 그런 갈등 속에서 손을 뻗으려는 순간, 석문 너머에서 낮고 무거운 진동이 전해져 왔고, 뒤이어 무언가 거대한 것이 그 안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벽을 타고 울려왔다. 그 진동은 발바닥을 통해 온몸으로 퍼져 올라왔고, 나는 손을 내밀다 만 채로 그대로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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