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환생했더니 최강 신수라니

1화

명계의 하늘은 언제나 붉었다. 피처럼 짙은 노을이 하루 종일 걸려 있고, 그 아래로 회색빛 산맥이 끝없이 이어졌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도 그 노을빛만은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하늘 전체가 오래된 상처처럼 아물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듯했다. 나는 그 산맥 한가운데,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검을 뽑았다. 스릉. 칼날이 붉은 하늘빛을 받아 어두운 광택을 냈다. 쇠붙이 특유의 서늘한 기운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삼백 년 동안 매일 느껴온 감각이기도 했다. 오늘도 같은 자세, 같은 호흡, 같은 동작이었다. 발끝의 각도, 손목의 꺾임, 숨을 들이마시는 타이밍까지. 일 년이고 십 년이고 백 년이고, 나는 이 절벽 위에서 같은 검로를 반복했다. (오늘은 좀 다를까.) 괜히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결과는 늘 같았다. 바람이 절벽 아래에서 위로 불어 올라왔다. 그 바람에 겉옷 자락이 펄럭였다. 검을 내려베었다. 손목을 틀었다. 발끝으로 지면을 밀어냈다. 한 호흡, 한 동작, 한 걸음. 스물다섯 번째 초식. 스물아홉 번째 초식. 서른한 번째 초식. 서른두 번째 초식까지 이어졌을 때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라온 듯했다.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그래도 나는 다음 동작을 그려냈다. 서른세 번째 초식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의 틈. 쿵.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또 여기까지였다. 서른세 번째 초식은, 언제나 문턱 앞에서 막혔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그곳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손을 뻗어도 만져지지 않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벽. "대장님, 오늘도 그 자리네요."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정서준이었다. 검은 머리를 아무렇게나 묶은 채, 마른 몸으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반쯤 웃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웃음 아래 뭔가가 가라앉아 있는 것도 같았다. "놀리지 마라." 나는 숨을 고르며 몸을 일으켰다. 땀도 흐르지 않는 몸인데, 숨은 왜 이렇게 가쁜 건지 모를 일이었다. "놀리는 거 아닙니다. 그냥... 대단하다고요. 몇백 년째 저 초식만 붙잡고 계시니." 그 말에는 뼈가 있었다. 하지만 서준의 눈빛에는 비웃음이 없었다. 그저 안타까움 비슷한 것이 스쳤을 뿐이었다. 정서준은 나를 오래 지켜본 부하였다. 아니, 부하라기보다는 전우에 가까웠다. 나는 명계의 귀신병사였다. 죽어서도 자신의 의지를 잃지 않은 존재들, 그중에서도 병사의 신분을 얻어 명계의 질서를 지키는 임무를 맡은 자들. 귀신병사에게는 경지가 있었다. 혼백을 다듬어 형체를 이루는 취형경(聚形境), 그 형체에 검을 담는 검혼경(劍魂境), 그리고 신에 가까운 기운으로 화하는 화신경(化神境). 나는 삼백 년 전, 남들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화신경에 올랐다. 그리고 그 후로 삼백 년 동안,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세 개의 경지, 그 마지막 벽 앞에서 나는 늘 무릎을 꿇었다. "강태오는?" "저기서 자고 있습니다." 서준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건장한 체격의 사내 하나가 바위에 등을 기댄 채 코를 골고 있었다. 입가에는 침이 살짝 흘러 있었고, 팔짱을 낀 자세 그대로 고개만 떨군 채였다. 둔한 인상에 어울리지 않게 정이 많은 녀석이었다. 나는 피식 웃음이 났다. "태오야." 부르는 소리에 태오가 눈을 번쩍 떴다. "헉, 대장님! 아니, 이건 잠깐 눈만 감고 있었던 거지 자는 게 아니..." "됐다, 됐어." 태오는 억울한 얼굴로 벌떡 일어나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었다. 그 모습이 우스워서 서준이 픽 웃음을 흘렸다.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이 두 사람과 함께 있을 때만큼은 삼백 년이라는 시간의 무게가 잠시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하루가 또 지나갔다. 그날 저녁, 나는 정서준과 강태오를 데리고 명계 중심부로 향했다. 총사령관 박현성 님을 뵙기 위해서였다. 산맥을 벗어나 중심부로 다가갈수록 붉은 하늘의 색이 조금씩 짙어졌다. 마치 노을이 그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처럼. 명계에서 박현성이라는 이름은 절대적이었다. 명계 전체를 다스리는 최고 권력자이자, 신부경(神府境)의 경계에 도달했다고 알려진 유일한 존재. 신부경은 화신경 위의 경지로, 명계 역사상 그 경지에 오른 이가 손에 꼽을 정도라 했다. 그 이름 앞에서는 어떤 귀신병사도 고개를 숙였다. 거대한 전각의 문이 열렸다. 서준과 태오는 문 앞에 남고, 나 홀로 안으로 들어섰다. "왔느냐."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나를 맞았다. 박현성은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은백색 머리칼과 깊게 파인 눈매, 그 안에 담긴 눈동자는 오래된 별처럼 고요했다. 전각 안의 공기마저 그 존재감 앞에서는 조용히 가라앉는 듯했다. "오늘도 서른세 번째 초식에서 막혔습니다." 나는 솔직하게 보고했다. 박현성은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언제나 안쓰러움이 섞여 있었다. "조급해하지 마라. 너는 이미 남들보다 훨씬 앞서 있다." "압니다. 하지만..."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앞서 있으면 뭘 합니까. 벽 앞에서 멈춰 있는데.) 그 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박현성 앞에서 그런 나약한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물러가서 쉬어라. 내일도 수련이 있을 테니." "예." 짧은 대답을 남기고 몸을 돌렸다. 문을 나서기 직전, 등 뒤로 박현성의 시선이 여전히 나에게 머물러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 시선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물러나 처소로 돌아왔다. 밤이 깊어지고, 정서준과 강태오도 각자의 거처로 돌아갔다. "내일 뵙겠습니다, 대장님." 서준이 짧게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고, 태오는 하품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홀로 창가에 앉아 붉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벌레 우는 소리 비슷한 것이 들렸다. 명계에 벌레가 있을 리 없었지만, 그런 착각이 들 만큼 고요한 밤이었다. 오늘도 별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그때였다. 두웅. 낮고 무거운 진동이 발밑을 타고 올라왔다. 지진과는 달랐다. 땅이 흔들리는 게 아니라, 공기 자체가 울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창문 유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찻잔에 담긴 물의 표면이 삐걱거리는 듯한 파문을 그렸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산맥 저편, 명계의 가장 바깥쪽 경계 부근에서 희미한 빛이 번쩍였다 사라졌다. 마치 아주 멀리서 벼락이 친 것처럼. 하지만 명계에는 벼락이 없었다. (뭐지, 방금 그건.) 손끝이 저릿했다. 삼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낯선 파문이었다. 심장이 이유 없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마치 몸이 먼저 위험을 감지한 것처럼.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산맥 저편을 바라보았다. 진동은 다시 잦아들었지만, 가슴 한구석에 남은 이상한 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붉은 하늘 아래, 경계 너머의 어둠이 조금 전보다 더 짙어 보이는 것은 착각이었을까. 나는 오랫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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