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다음 날 아침, 명계 전역에 심상치 않은 공기가 감돌았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그 공기를 느꼈다.
평소라면 고요했을 새벽의 기운이, 오늘은 어딘가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목덜미가 서늘했다.
나는 평소처럼 절벽으로 향하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경계 지역을 순찰하는 귀신병사들의 수가 평소보다 세 배는 늘어 있었다.
줄지어 선 병사들의 갑주가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철컥, 철컥.
그 소리마저도 오늘따라 날카롭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지?"
지나가던 병사를 붙잡고 물었다.
병사는 창을 고쳐 쥐며 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모르겠습니다. 어젯밤부터 총사령관님께서 전군 비상경계령을 내리셨습니다."
"비상경계령…"
"예. 저희도 자세한 내막은 듣지 못했습니다."
병사의 목소리에는 긴장이 배어 있었다.
삼백 년 동안 그런 명령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명계는 언제나 정체된 시간 속에 잠겨 있었고, 그 정체는 곧 안정이었다.
그런데 그 안정이 하룻밤 사이에 깨진 것이다.
(뭔가 크게 잘못됐다.)
나는 서준과 태오를 데리고 곧장 사령부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서준은 말이 없었고, 태오는 평소와 달리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셋 다 같은 불안을 공유하고 있다는 걸,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령부 앞마당에는 이미 상급 지휘관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낮은 목소리들이 겹쳐지며 알 수 없는 소음을 만들어냈다.
그 사이로 박현성의 모습이 보였다.
박현성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굳어 있었다.
평소라면 여유롭게 웃으며 나를 맞았을 그가, 오늘은 표정 하나 풀지 않고 서 있었다.
"총사령관님."
내가 다가서자 그가 고개를 돌렸다.
눈매가 깊게 패어 있었다.
밤을 새운 흔적이었다.
눈 밑에 짙게 내려앉은 그림자가,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이도현이냐."
"예. 어젯밤 이상한 진동을 느꼈습니다. 산맥 저편에서 빛도 보았고요."
박현성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의 시선이 잠깐 먼 하늘로 향했다가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그러다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도 느꼈구나."
그 한마디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박현성이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삼백 년을 곁에서 지켜봐 온 사람이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무거운 낯빛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박현성은 대답 대신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지휘관들의 웅성거림이 잦아들자, 그제야 다시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명계 경계 바깥, 십만세계라 불리는 영역이 있다."
박현성이 손을 들어 먼 하늘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하늘일 뿐이었다.
"우리 명계는 그중 아주 작은 한 조각에 불과하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나는 명계가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해왔다.
삼백 년을 살아오면서도, 그 바깥에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땅이 있고 하늘이 있듯, 명계는 그저 세상 그 자체였다.
"그 십만세계 중에는, 우리로서는 감히 가늠할 수도 없는 강자들이 존재한다."
박현성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고계(高界)의 대능자들이라 불리는 자들이다."
고계.
대능자.
처음 듣는 단어인데도, 그 무게가 온몸으로 전해졌다.
"그들이 왜…"
"모른다. 다만 어젯밤의 진동은, 그들 중 둘이 충돌한 여파일 가능성이 크다."
정서준이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꿀꺽.
강태오는 평소답지 않게 표정이 굳어 있었다.
평소라면 시답잖은 농담이라도 던졌을 그가, 오늘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명계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라면…"
내가 말끝을 흐리자 박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의 존재들이라는 뜻이다."
정적이 흘렀다.
앞마당에 모인 지휘관들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바람 소리만이 그 침묵 사이를 메웠다.
"당분간 외곽 경계를 이중으로 강화한다."
박현성이 명을 내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여유가 사라지고, 오직 단호함만이 남아 있었다.
"모든 병력은 대기 상태를 유지하라. 특히 화신경 이상의 전력은 언제든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
"예!"
지휘관들이 일제히 답했다.
그 목소리가 앞마당을 울리며 흩어졌다.
나와 서준, 태오도 각자의 위치로 흩어졌다.
헤어지기 전, 서준이 나를 향해 짧게 말했다.
"조심해, 도현아."
"너도."
태오는 아무 말 없이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그 손길에서 평소와는 다른 무게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날 하루 종일, 나는 평소처럼 절벽에 오르지 못했다.
대신 경계선 근처를 순찰하며 하늘을 살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선은 자꾸만 산맥 저편으로 향했다.
오전 내내 별다른 일은 없었다.
병사들은 평소보다 곱절은 긴장한 얼굴로 경계를 서고 있었고, 그 사이를 오가는 전령들의 발걸음도 빨라져 있었다.
나는 그 사이를 오가며 별다른 이상 징후가 없는지 확인했다.
오후가 되자 산맥 저편 하늘빛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원래의 붉은 노을빛 위로, 이질적인 자줏빛 기운이 스며들고 있었다.
마치 물감이 물에 번지듯,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자줏빛은 처음에는 옅게, 그러다가 조금씩 짙어지며 하늘 한쪽을 잠식해갔다.
"저게 뭐지."
서준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도 나와 같은 방향을 향해 있었다.
"모르겠다. 하지만 좋은 징조는 아닌 것 같아."
나뭇잎 하나 없는 명계의 산맥에서도, 바람은 불었다.
그런데 그 바람 소리가 오늘따라 삐걱거리는 듯 들렸다.
마치 오래된 문짝이 억지로 열리는 소리처럼.
평소라면 그저 스쳐 지나갔을 그 소리가, 오늘은 유독 신경을 긁었다.
(단순히 기분 탓일까.)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지만, 가슴 한구석의 불안은 가라앉지 않았다.
심장이 미세하게 빠르게 뛰는 것이, 몸이 먼저 위험을 감지하고 있는 듯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줏빛은 더욱 짙어졌다.
경계를 서던 병사들 사이에서도 낮은 웅성거림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무도 그 빛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그저 본능적으로, 그것이 좋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만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저녁 무렵, 박현성이 직접 경계선을 순시하러 나왔다.
그의 얼굴은 낮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다.
걸음걸이마저 평소보다 무거워 보였다.
"총사령관님,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
박현성이 내 말을 끊고 대답했다.
"고계의 충돌이 잦아들기는커녕, 점점 격화되고 있어."
그의 시선이 산맥 저편, 자줏빛으로 물든 하늘을 향했다.
그 눈빛에는 오랜 세월 쌓아온 경험으로도 가늠할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이 스며 있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습니까."
"없다."
단호한 대답이었다.
"그들의 싸움에 우리가 낄 자리는 없다. 그저 여파가 이곳까지 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 말을 하는 박현성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확신 대신 옅은 체념이 섞여 있었다.
삼백 년 동안 명계를 지켜온 그였다.
그런 그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그의 옆에 서서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줏빛은 이제 노을빛을 거의 잠식한 상태였다.
그 경계가 뒤섞이는 모습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산맥 저편 하늘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마치 태양이 두 개가 된 것처럼 눈부신 빛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빛은 점점 강해지더니, 이내 시야 전체를 하얗게 뒤덮었다.
그리고 곧이어, 귀를 찢는 듯한 굉음이 명계 전체를 뒤흔들었다.
콰아앙.
땅이 흔들렸다.
발밑에서부터 전해지는 진동이 온몸을 타고 올라왔다.
주변에 서 있던 병사들이 비틀거리며 서로를 붙잡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빛이 잦아든 후, 눈을 다시 떴을 때, 산맥 저편 하늘에 거대한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마치 유리가 깨지듯, 세계의 경계 자체가 금이 가고 있었다.
그 균열은 처음에는 가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 폭을 넓혀갔다.
균열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은 이제껏 본 적 없는 색이었다.
자줏빛도, 붉은빛도 아닌, 그 모든 것이 뒤섞인 듯한 기괴한 색채였다.
"저건…"
박현성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떨렸다.
"명계의 경계가 뚫리고 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균열 너머에서 낯선 파문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 파문을 느끼는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삼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이질감이었다.
(이건… 대체 뭐지.)
균열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크게, 더 빠르게 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