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 순간이었다.
쩌엉!
귀청을 찢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은백색 빛의 벽이 솟아올랐다.
자줏빛 폭풍이 그 벽에 부딪혀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파앗-
빛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허공에 잔상을 남겼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결계였다.
그것도 내가 지금껏 본 적 없는 규모의, 압도적인 결계였다.
발밑의 땅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그 진동은 마치 대지 전체가 숨을 죽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도현!"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박현성이었다.
그가 양손을 앞으로 뻗은 채 결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목덜미를 타고 흐른 땀방울이 턱 끝에서 뚝, 떨어졌다.
"물러서라, 어서!"
나는 신참 병사들을 데리고 안전지대까지 뒷걸음질쳤다.
아이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창백했다.
그중 한 명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고, 나는 그 팔을 붙잡아 억지로 끌고 갔다.
"정신 차려. 여기서 멈추면 죽어."
내 목소리가 스스로도 낯설게 들렸다.
평소보다 훨씬 낮고, 훨씬 단단했다.
박현성이 만든 결계가 폭풍의 확산을 막아내고 있었지만, 결계 표면이 파도치듯 일렁이며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 표면 위로 자줏빛 균열이 실핏줄처럼 번졌다가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버틸 수 있으신 겁니까!"
내가 외치자 박현성이 이를 악문 채 대답했다.
"오래는 못 버틴다. 이건... 신급 존재들의 전쟁 여파다."
신급.
그 단어가 가슴을 짓눌렀다.
"길어야 며칠이다."
박현성이 낮게 중얼거렸다.
"이 결계로 벌 수 있는 시간은 그게 전부야."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결계 너머 폭풍을 바라보았다.
자줏빛 소용돌이 속에서, 아주 잠깐 두 개의 거대한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형체를 온전히 가늠할 수 없었지만, 그 크기만으로도 압도적이었다.
하늘 전체를 뒤덮을 듯한 크기였다.
아니, 어쩌면 하늘이라는 개념 자체가 저 존재들 앞에서는 무의미한 것일지도 몰랐다.
(저것들이... 그 대능자라는 존재들인가.)
손끝이 저절로 떨렸다.
삼백 년간 쌓아온 나의 모든 것이, 저 존재들 앞에서는 먼지 한 톨만도 못한 것처럼 느껴졌다.
바람이 스산하게 불어왔다.
평소라면 그저 산맥을 스치는 바람이었을 텐데, 지금은 그 바람 속에 낯선 파문이 섞여 있었다.
마치 대기 자체가 삐걱거리는 듯한 느낌.
결계가 다시 한번 크게 출렁였다.
박현성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총사령관님, 무리하지 마십시오!"
서준이 어느새 달려와 소리쳤다.
그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검이 무슨 소용이 있을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
"결계가 버티지 못하면 우리도 끝입니다!"
"안다."
박현성은 짧게 대답할 뿐 손을 거두지 않았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신부경의 경지에 오른 명계 최강자조차, 저 자줏빛 폭풍 앞에서는 온몸의 힘을 쏟아부어야만 겨우 버틸 수 있었다.
박현성의 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눈에 보일 정도로 짙었다.
그것이 결계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나는 숨죽인 채 지켜보았다.
(나는...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삼백 년 동안 절벽 위에서 검을 휘둘렀다.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화신경에 올랐다고, 그것만으로 자부심을 가졌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작은 것이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결계 표면에 균열이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박현성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그의 두 다리가 미세하게 후들거리는 것이 보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마치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주변의 신참 병사들도 숨죽인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정적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때, 폭풍의 기세가 아주 조금 잦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저 멀리서 무언가가 균형을 되찾은 것처럼.
나는 그 미묘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숨을 삼키며 결계 너머를 응시했다.
박현성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결계에 마지막 기운을 밀어 넣었다.
쩌어엉.
결계가 한 번 크게 진동하더니, 서서히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자줏빛 폭풍도 조금씩 물러나는 듯 보였다.
박현성이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나는 황급히 그를 부축했다.
그의 몸은 물에 흠뻑 젖은 듯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숨소리가 거칠고 얕았다.
"총사령관님!"
"괜찮다."
박현성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일시적으로 밀어낸 것뿐이다. 완전히 끝난 게 아니야."
나는 그의 몸을 부축한 채 결계 너머를 바라보았다.
자줏빛 안개가 여전히 산맥 저편에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마치 언제든 다시 몰아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안개 속에서 이따금씩 번쩍이는 섬광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두려움과는 다른, 하지만 그와 맞닿아 있는 무언가였다.
(나도... 저런 힘을 가질 수 있었다면.)
부끄러운 생각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명계 전체가 위기에 처해 있는데, 나는 나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열등감을 곱씹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박현성의 뒷모습을 볼수록, 그 결의에 찬 등을 볼수록 더 선명해졌다.
박현성은 신부경에 이른 존재였다.
명계 역사상 손에 꼽히는 강자.
그런 그조차 저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서준을 비롯한 다른 병사들의 얼굴에도 나와 비슷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경외와 두려움, 그리고 그 밑에 깔린 무력감.
아무도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지만, 모두가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평생을 바쳐도, 저 경지에 닿을 수 있을까.)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이었다.
박현성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나는 그를 부축한 팔에 힘을 주었다.
"천천히 일어나십시오."
"...고맙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피로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도현."
박현성이 나를 불렀다.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킨 그의 눈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예."
"오늘 네가 신참들을 지킨 것, 잘했다."
그 말에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동시에, 그 칭찬이 씁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고작 그 정도로는 아무것도 막을 수 없었는데.)
내가 한 것이라곤 병사들을 뒤로 물러서게 한 것뿐이었다.
정작 목숨을 걸고 저 폭풍을 막아낸 것은 박현성이었다.
그 격차가 너무나도 선명해서, 칭찬을 듣는 것조차 부끄러웠다.
박현성은 내 표정을 읽은 듯, 잠시 나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평소의 단정하고 확고한 눈빛과는 다른, 무언가 망설임이 섞인 눈빛이었다.
"…네게 할 말이 있다. 다만 지금은 아니다."
그 말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박현성의 눈빛에는 평소와 다른 무언가가, 뭔가를 깊이 감춘 듯한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물으려 했지만, 박현성은 이미 몸을 일으켜 결계 쪽으로 시선을 돌린 뒤였다.
그 등에는 여전히 지치고 흔들리는 기색이 남아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다시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산맥 저편에서, 자줏빛 안개가 서서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치 잠시 물러났던 것이 다시 돌아오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