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회사 로비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미 오늘 하루가 순탄치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는데,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팀장님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게 굳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늘 아침마다 "강서윤 씨, 오늘도 일찍 왔네" 하고 가볍게 인사를 건네던 사람이었는데, 오늘은 시선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않은 채 서류 파일을 옆구리에 낀 채로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강서윤 씨, 오전에 잠깐 얘기 좀." 그 말 한마디에 나는 속으로 아, 하는 짧은 탄식을 삼키며 애써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켜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느끼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옆자리 대리님이 "무슨 일이래요?" 하고 소곤거렸지만 나는 그저 어깨를 한 번 들어 올리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브랜드 전략팀 전체가 구조조정 대상이라는 소문이 두 달 전부터 사내에 돌고 있었고, 나는 그 소문의 중심에 내 이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억지로 밀어내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오전 내내 회의실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들과, 팀장님이 나올 때마다 흘끗거리는 팀원들의 시선 속에서 나는 애써 모니터만 들여다보며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서 움직였지만, 정작 무슨 글자를 썼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결국 오전 미팅은 다음 주로 미뤄졌다는 짧은 메시지가 팀 채팅방에 올라왔을 때, 나는 안도와 불안이 동시에 밀려드는 걸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세면대 물을 틀어놓고 손을 씻는 동안, 거울 속 내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회사 걱정이 아니라,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하은이의 얼굴이었다. 스무 정거장을 넘게 서서 오는 동안에도 나는 오늘 하은이가 저녁으로 무얼 먹고 싶다고 했는지, 새로 산 이불 커버가 하은이 취향에 맞을지, 그런 생각들로 머릿속을 채우면서도 정작 회사에서 있었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였다. 손잡이를 붙잡고 흔들리는 몸을 지탱하면서, 나는 오늘 아침 하은이가 냉장고 문에 붙여놓은 메모지를 떠올렸다. '언니, 나 오늘 시험 끝나면 떡볶이 먹고 싶어ㅠㅠ' 하는 삐뚤빼뚤한 글씨체가 눈앞에 그려지자 나도 모르게 입가가 슬며시 올라갔다. '이상하지.. 회사가 없어질지도 모르는데 왜 이런 게 더 신경 쓰이는 거지..' 하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에도 나는 이미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이 웃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흠칫 놀라 표정을 지워야 했다.
역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가는 십 분 남짓한 길에서도 나는 편의점 앞을 지나며 하은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 있는지 괜히 들여다보다가, 결국 아무것도 사지 않은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오피스텔 현관문을 열자 안에서부터 된장찌개 냄새가 훅 끼쳐왔고, 부엌 쪽에서 앞치마를 두른 채 냄비를 젓고 있는 하은이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깨까지 오는 머리를 아무렇게나 묶어 올린 채로, 헐렁한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으로 서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하루의 피로가 순식간에 씻겨 내려가는 걸 느꼈고, 동시에 어떤 낯선 온기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슬며시 올라오는 걸 느껴야 했다. "언니, 왔어?" 하은이가 뒤도 안 돌아보고 그렇게 물었을 때, 나는 대답 대신 그저 물끄러미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어, 왔어" 하고 짧게 답했다.
"오늘 시험 어땠어?" 나는 넥타이를 풀며 물었고, 하은이는 국자를 흔들며 "말도 마, 완전 폭망했어. 근데 그거보다 배고파 죽는 줄 알았잖아. 언니 늦게 온다고 해서 나 혼자 찌개 끓였어, 짜증나게~" 하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면서도 눈은 웃고 있었다. 나는 그런 하은이를 보며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들어갔고, 문을 닫는 순간에도 부엌에서 들려오는 냄비 뚜껑 부딪는 소리와 하은이의 콧노래 소리가 계속 귓가에 남아 있었다.
서울 소재 대학에 하은이가 입학하면서 우리는 삼 년 만에 다시 한집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그 삼 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지방 근무를 자원해가면서까지 하은이와의 거리를 만들어냈고, 그 이유를 하은이는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아니, 몰라야 했다. 부모님은 여전히 부산에 계셨고, 하은이가 상경한 뒤로 우리 둘이서만 이 오피스텔에서 지내게 된 지 이제 겨우 두 달이 지났을 뿐이었는데도, 나는 매일 밤 하은이가 씻고 방에 들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알 수 없는 긴장을 삼켜야 했다. 저녁을 먹는 내내 하은이는 대학 친구들 이야기며, 조별 과제에서 자기만 일을 다 했다는 불만이며, 새로 생긴 카페 이야기를 쉬지 않고 쏟아냈고,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찌개를 떠먹으면서도 하은이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날 밤도 다르지 않았다. 하은이가 방문을 닫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내 방에 들어가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는데, 어둠 속에서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낮에 지하철에서 떠올렸던 하은이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떠올랐고, 그 순간 나는 스스로도 소름이 끼칠 만큼 낯선 열기가 배 아래쪽에서부터 차오르는 걸 느껴야 했다. 벽 너머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물소리, 하은이가 이불을 뒤척이는 작은 기척, 그런 것들 하나하나가 이상하게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이건 아니야.. 이러면 안 돼..'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이미 손을 뻗고 있었고, 그 순간의 감정과 행위를 나조차도 설명할 수 없는 채로, 오래된 죄책감과 짧은 해방감이 뒤섞인 이상한 밤을 홀로 견뎌내고 있었다. 숨을 죽이려 해도 자꾸만 목 끝에서 새어나오는 소리를 틀어막으며, 나는 몇 번이고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파묻었다.
[내가 하은이를 처음 안았던 순간, 그 아이는 태어난 지 겨우 사흘째였다. 조그맣고 붉은 얼굴로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내 팔 안에서 꼼지락거리던 그 감촉을, 나는 아직도 손끝에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감정이 언젠가 나를 무너뜨리게 될 거라는 걸.]
다음 날 아침, 식탁에 앉아 토스트를 먹으면서 하은이가 문득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언니, 어제 밤에 무슨 소리 났어? 꿈꿨나 했는데." 그 말에 나는 순간 목이 턱 막히는 걸 느끼며 손에 쥐고 있던 컵을 살짝 떨었고, 애써 웃으며 "그냥 티브이 소리였을걸" 하고 둘러댔지만, 하은이의 눈빛이 잠깐 이상하게 가늘어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걸 나는 놓치지 않고 봐버렸다. 하은이는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시리얼을 뒤적이며 "그런가" 하고 짧게 대답했지만, 그 짧은 대답 뒤에 남은 정적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식탁 위로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와 하은이의 옆얼굴을 비추고 있었고, 나는 그 얕은 그림자 아래에서 미묘하게 굳어 있던 표정의 흔적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다가도, 정작 아무 말도 더 하지 못한 채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는 것으로 도망쳤다.
뭔가... 들은 걸까.
그 생각이 머릿속에 박히는 순간, 나는 토스트를 씹는 것도 잊고 하은이의 옆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하은이는 아무렇지 않게 물컵을 들어 올리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지만, 나는 그 무심한 옆얼굴 너머에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 것만 같아서, 심장이 자꾸만 엇박으로 뛰는 걸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