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회사 탕비실에서 막 내린 커피 냄새가 퍼지는가 싶더니, 윤지현 선배가 종이컵 하나를 슬쩍 내밀며 내 자리로 다가왔다. 나는 마침 결재 서류를 정리하던 중이었는데,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하마터면 서류 뭉치를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강서윤, 요즘 얼굴이 왜 그래? 뭐 좋은 일 있어, 나쁜 일 있어?"
지현 선배는 나보다 두 기수 위였고, 입사 동기는 아니었지만 부서 안에서 유능하다는 평가와 함께 사람 좋기로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문제는, 나는 그런 지현 선배 앞에서만큼은 유난히 감정을 숨기기가 어려웠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웃는 얼굴로 곧잘 넘기던 것들이, 이상하게도 선배의 눈빛 앞에서는 술술 새어 나가는 느낌이었다.
"동생이랑 같이 살게 돼서요."
겨우 그렇게만 대답했는데도, 지현 선배는 눈을 크게 뜨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 하나만으로도 나는 괜히 뒷목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동생? 몇 살인데?"
"열여덟이요."
"아이고, 예쁜 딸 키우는 느낌이겠네."
딸이라니. 그 말에 나는 순간 웃음이 났고, 그 웃음이 조금 씁쓸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딸이라기엔, 하은이를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저려오는 그 감정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말끝을 흐리는 나를 보며 지현 선배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대신 자기 얘기를 꺼냈다.
"나는 삼 년 동안 룸메랑 살았는데, 진짜 가족 같더라. 근데 서윤 씨는 삼 년 동안 왜 동생이랑 안 살았어? 아까 얼핏 들었는데."
그 질문에 나는 순간 손끝이 저려오는 걸 느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그냥.. 일 때문에요."
지현 선배는 더 파고들지 않고 그저 어깨를 한 번 두드려주며 자리로 돌아갔는데,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오랫동안 혼자 버텨온 시간들이 새삼스럽게 무겁게 느껴졌다. 지방에서 혼자 지내는 동안, 나는 회식 자리에서도 늘 일찍 자리를 떴고,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는 걸 은근히 피해왔다. 마음속 어딘가에 늘 하은이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누구를 향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모니터 화면 속 결재 문서를 다시 들여다보면서도, 나는 지현 선배의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예쁜 딸 키우는 느낌이겠네, 라는 그 말이 왜 이렇게 오래 남는 건지. 컴퓨터 화면에는 여전히 같은 문단이 떠 있었지만, 내 눈은 글자를 읽지 못하고 그저 하은이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커피는 어느새 반쯤 식어 있었다.
퇴근길,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면서도 나는 그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사람들 틈에 끼어 서 있는 동안, 스마트폰 화면을 켰다가 다시 끄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하은이에게 문자를 보낼까 하다가도, 딱히 할 말이 없어 그냥 화면만 껐다 켰다 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왔을 때, 현관문을 열자마자 부엌 쪽에서 도마 소리가 들렸다. 하은이는 부엌에서 서툰 칼질로 감자를 썰고 있었는데, 감자 껍질이 도마 위에 삐뚤빼뚤한 모양으로 쌓여 있는 걸 보니 벌써 몇 번이나 실패한 모양이었다.
"오늘 카레 해보려고 하는데, 레시피 봐도 감이 안 와."
하는 말에 나는 웃으며 옆으로 다가가 감자 써는 법을 알려주었다. 칼을 쥔 손목의 각도부터, 감자를 고정하는 손가락 모양까지 하나씩 짚어가며 설명하는 동안, 하은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손을 따라 움직이려 애썼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손이 겹쳐지는 순간이 생겼다.
하은이의 손등 위로 내 손이 잠깐 얹히는 그 짧은 순간, 나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걸 느끼며 재빨리 손을 뗐다.
탁.
칼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어? 언니 손 왜 이렇게 차가워."
하은이가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말하며 웃었을 때, 나는 그저 "회사가 추워서 그런가 보다" 하고 둘러댔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방금 스친 손끝의 온도가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아서 애꿎은 손을 몇 번이나 바지에 문질렀다.
저녁을 먹고 난 뒤, 하은이는 소파에 늘어져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언니, 이거 완전 웃기다, 봐봐!"
하며 내 팔을 잡아끌었고, 나는 마지못해 옆에 앉았지만 텔레비전보다 하은이의 웃는 옆얼굴을 보는 게 더 재밌었다. 화면 속 출연자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제대로 듣지 못한 채, 나는 그저 하은이가 웃을 때마다 따라 웃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소파 위에 늘어놓은 다리, 헐렁한 잠옷 소매 사이로 보이는 얇은 팔목, 웃을 때마다 살짝 접히는 눈매까지도.
그런 저녁이 쌓여갈수록, 우리 사이의 거리는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처음엔 한 뼘 정도 떨어져 앉던 것이 어느새 팔이 맞닿을 만큼 가까워졌고, 나는 그 거리를 의식하면서도 애써 모른 척했다.
주말이 되면 하은이는 나를 끌고 근처 카페며 서점을 돌아다녔는데, 어느 날은 서점에서 로맨스 소설 코너를 뒤적이다가 하은이가 문득 물었다.
"언니는 연애 안 해? 회사에 괜찮은 사람 없어?"
그 질문에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가 겨우 대답했다.
"바빠서 그럴 시간이 없어."
"에이, 언니 예쁜데 왜 아무도 없대. 나 같으면 벌써 대여섯 명은 만들었을 텐데."
장난스럽게 웃는 하은이를 보며 나는 억지웃음을 지어야 했다. 책장 사이로 스며드는 오후 햇살이 하은이의 머리카락 위에 반짝이는 걸 보면서도, 나는 그 질문에 대한 진짜 대답을 삼켜야 했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이미 다른 곳에 묶여 있어서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으니까.
그날 밤, 하은이가 먼저 씻고 나와 젖은 머리를 말리며 내 방문 앞을 지나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언니, 나 없었을 때 삼 년 동안 뭐 하고 지냈어? 진짜 궁금했었는데."
수건을 목에 걸친 채,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나를 바라보는 하은이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나는 그 질문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멈칫했고,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하은이의 눈빛이 조금씩 진지해지는 걸 느꼈다. 방문 손잡이를 쥔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다시 풀렸다.
"그냥.. 일하면서 지냈지."
겨우 그렇게 대답하는 나를 하은이는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조용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이상하게도 가슴이 서늘해졌다. 마치 하은이가 무언가를 알아채기 시작한 것 같은,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닫힌 방문을 바라보며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복도의 불빛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지는 밤이었고, 방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내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걸터앉았지만, 쉽게 잠들 수 없었다. 하은이의 눈빛이 자꾸만 떠올랐다. 궁금한 걸 참지 못하는 성격도 아니었으면서, 오늘은 왜 그렇게까지 캐물었던 걸까. 혹시 정말로 뭔가를 눈치챈 걸까.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채로, 나는 이불을 끌어당기며 애써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