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유리 어항 속 금붕어처럼, 나는 늘 하은이라는 좁은 세계 안에서만 진짜로 숨을 쉬었던 것 같다.]
하은이가 태어난 해, 나는 다섯 살이었다. 부모님이 병원에서 갓 태어난 동생을 처음 안겨주었을 때, 손바닥만 한 얇은 담요에 싸인 그 작은 몸뚱이가 어찌나 가볍던지, 나는 혹시라도 놓칠까 봐 두 팔을 힘껏 굽혀 끌어안았던 기억이 있다. 조그맣고 붉은 얼굴을 들여다보며 이상하게도 눈물이 났던 것도, 그 순간이었다.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아기가 옹알거리는 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조막만 한 손가락이 내 손가락을 꽉 쥐었고, 그때 나는 다섯 살짜리 머리로도 분명하게 어떤 결심을 했다. '이 아이는 내가 지켜야 해.'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우습기도 한 다짐이지만, 그때부터 나는 하은이의 모든 걸 나만이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 마음은 시간이 지나도 옅어지지 않은 채로 오히려 이상한 방향으로 짙어져만 갔다.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 반 친구들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아이돌 오빠들 이야기로 떠들썩할 때 나는 그 틈에 끼어 맞장구를 치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얼른 집에 가서 하은이의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방문을 살짝 열고 들어가 하은이의 이불을 다시 덮어주고, 뒤척이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넘겨주는 그 짧은 순간이 하루 중 가장 편안했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하은이가 놀이터에서 또래 남자아이에게 웃어주는 모습을 창문 너머로 본 날, 나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저녁 내내 하은이에게 심술을 부린 적이 있었다. "왜 그렇게 밖에서 웃고 다녀?" 하고 쏘아붙이자 하은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언니 왜 그래?" 하고 되물었을 뿐인데, 나는 그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고등학생 때는 하은이가 짧은 치마를 입고 나가는 걸 보고는 이유 없이 화를 낸 적도 있었다. "그거 입고 나갈 거야?" 하는 내 말투가 얼마나 날카로웠는지, 하은이는 옷을 갈아입으러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가 결국 긴 바지를 입고 나왔다. 그때마다 엄마는 "언니가 유난스럽다"며 웃어넘겼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건 그냥 유난이 아니라는 걸. 유난이라는 말로 덮을 수 있는 감정이었다면, 애초에 이렇게 오래 나를 괴롭히지도 않았을 테니까.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던 스무 살 겨울, 나는 처음으로 그 감정에 이름을 붙여야 하는 순간과 마주쳤다. 하은이가 잠든 방문 앞에 서서, 아무 이유 없이 문고리를 잡은 채로 한참을 서 있던 그날 밤이었다. 복도는 어두웠고, 문고리의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에 닿는데도 나는 손을 떼지 못한 채로, 그저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서 있었다. '나 지금 뭐 하는 거야..'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대답 대신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었고,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취업 준비를 핑계로 서울에 방을 얻었다. 부모님은 "굳이 서울까지 갈 필요가 있느냐"며 만류했지만, 나는 서류를 챙기며 애써 시선을 피했다. 취업이 되고 나서도 굳이 지방 근무를 자원했을 때는, 인사팀 담당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본가가 이쪽이신데, 굳이요?" 하고 물었을 정도였다. 나는 그저 웃으며 "새로운 환경에서 시작해보고 싶어서요"라고 둘러댔지만, 속내는 훨씬 단순했다. 하은이와 멀어지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삼 년을 버텼다. 명절에 잠깐 얼굴을 비추는 것 외에는 전화 통화도 일부러 짧게 끝냈고, 하은이가 보낸 메시지에도 하루씩 늦게 답장을 보내며 거리를 만들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캐리어를 끌고 서 있던 하은이를 다시 마주한 날, 하늘은 유난히 맑았고 정류장 표지판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 아이는 훌쩍 커버린 채로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언니!" 하는 소리에 나는 순간 숨이 턱 막혔고,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애써 감추며 어색하게 웃었다. "많이 컸네." 겨우 그 말 한마디를 건넸을 때, 하은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언니는 그대로네? 나 진짜 보고 싶었는데, 왜 삼 년 동안 한 번도 안 왔어?" 그 질문에 나는 그저 짐을 대신 들며 화제를 돌렸다. 캐리어 손잡이가 뜨끈하게 데워져 있는 게 손바닥에 느껴졌는데, 그게 하은이가 그동안 이걸 붙잡고 얼마나 먼 길을 왔는지를 말해주는 것 같아서, 나는 괜히 목이 메었다.
동거를 시작한 첫 주는 정신없이 지나갔다. 좁은 원룸에 이인용 침대를 새로 들이고, 부엌 살림을 나누어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다 갔다. 하은이는 서울 물가에 놀라 마트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며 "언니, 이거 부산이었으면 반값인데?" 하고 투덜거렸고, 나는 그런 하은이를 보며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계산대 앞에서 두 손으로 계산기를 들고 진지하게 숫자를 두드리는 옆얼굴을 보고 있으니, 삼 년 동안 애써 눌러왔던 감정이 아무렇지 않게 다시 차오르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그걸 애정이라는 말로 서둘러 덮어버렸다.
이삿짐을 정리하다 하은이의 어릴 적 사진첩이 나왔을 때는, 둘이서 바닥에 나란히 앉아 사진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옛날 얘기를 했다. 유치원 발표회 때 찍은 사진, 초등학교 운동회 때 넘어져서 무릎에 밴드를 붙인 사진, 그리고 내가 하은이를 업고 마당을 뛰어다니던 사진까지. "이거 언니가 나 업어주다가 자빠진 거지?" "야, 그건 네가 갑자기 몸부림쳐서 그런 거잖아." 하은이가 사진 속 자신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며 깔깔 웃을 때마다, 나는 그 웃음소리가 방 안에 가득 차는 게 좋아서, 사진첩을 덮을 시간을 자꾸만 미루었다. 그렇게 웃고 떠드는 시간이 쌓여가면서 나는 잠시 내 안의 그 이상한 감정을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밤이 되면 어김없이 그 감정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하은이가 샤워를 마치고 젖은 머리로 거실을 지나갈 때,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머리끝에서 물방울이 톡, 하고 어깨로 떨어지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숨을 죽였다. 티셔츠 자락이 살짝 들려 허리께가 드러날 때, 나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하던 일에 몰두하는 척했지만, 심장은 이미 제멋대로 뛰고 있었다. '이건 그냥 언니로서의 애정이야..' 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밤이 늘어갈수록, 나는 그 말을 믿는 척하는 데에도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는 척하며 실은 아무 글자도 읽지 못한 채로 몇 분씩 흘려보내는 밤이 반복됐다.
하은이가 대학 오티에 다녀온 첫날, 늦은 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하은이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로 살짝 취해 있었다. 신발을 벗다가 휘청거리는 걸 내가 얼른 붙잡아 부축했는데, 그 순간 훅 끼치는 술 냄새와 함께 낯선 향수 냄새까지 섞여 났다. "언니이~ 나 오티에서 인기 많았다? 선배들이 번호도 달라고 하고~" 하는 말을 들으며 나는 웃음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속으로는 알 수 없는 불쾌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걸 느꼈다. 손이 저절로 하은이의 팔을 쥔 힘이 세지는 걸 깨닫고서야 나는 황급히 손을 풀었다. "씻고 자, 감기 걸려." 애써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날 밤 나는 오랫동안 잠들지 못한 채로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하은이의 규칙적인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 낯선 향수 냄새가 대체 누구의 것이었을지 자꾸만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