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네 약점, 나만 알아

1화

체육관의 형광등은 절반쯤 꺼져 있었고, 남은 절반의 불빛만이 코트 바닥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며 얼룩진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천장 배관을 타고 흐르는 바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밤이었고, 그 소리 아래로 한도윤의 발소리가 섞여 들었다. 그는 공 카트를 밀며 그 그림자 사이를 걸었는데, 발소리가 텅 빈 체육관 벽에 부딪혀 두 번씩 울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바퀴 하나가 살짝 삐걱거렸고, 그 소리마다 도윤은 무의식적으로 걸음의 속도를 조절했다. 강서은은 이미 코트 한가운데 서 있었다. 교복 재킷을 벗어 벤치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채 트레이닝복 반팔 차림으로, 팔짱을 낀 자세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낮에 강의실 창가에서 봤던 그 표정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낮의 그녀는 웃지 않았다. 지금도 웃지 않았지만, 눈빛의 온도가 달랐다. 낮의 눈빛은 유리 같았고, 지금의 눈빛은 그 유리가 살짝 녹아내린 자리 같았다. "늦었어." 그녀가 말했다. 짧고 건조한 어조였는데, 그 안에 원망보다는 안도가 더 짙게 배어 있다는 걸 도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공 정리하다가." 그는 대답 대신 카트를 코트 사이드에 세우며 공 하나를 꺼내 손끝으로 가볍게 튕겼다. 가죽 표면이 손바닥에 닿는 감촉이 익숙했고, 그 감촉만으로도 몸이 자동으로 반응하듯 어깨가 살짝 풀렸다. 그는 공을 두어 번 더 튕기며 서은 쪽을 향해 걸어갔고, 그 걸음마다 형광등 불빛이 그의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가 다시 짧게 줄였다. 서은은 대답 없이 자리를 잡았다. 네트 앞, 정확히 도윤이 토스를 올릴 그 지점에서 세 걸음 떨어진 위치였는데, 그 거리는 두 사람이 처음 이곳에서 만난 밤부터 한 번도 변하지 않은 약속 같은 것이었다. 신발 밑창이 코트 바닥에 끌리는 소리, 그 소리조차 두 사람 사이에서는 일종의 신호였다. "준비됐어?" 도윤이 물었다. "준비됐어." 서은이 답했다. 공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도윤의 손끝을 떠난 공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서은의 도약 지점을 정확히 예측한 궤적으로 날아갔고, 그녀는 그 궤적을 향해 몸을 던지듯 뛰어올랐다. 스파이크가 터지는 소리, 공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 그 두 소리가 겹쳐지는 순간에만 그녀의 얼굴에서 뭔가가 풀어지는 걸 도윤은 매번 목격했다. "좋아." 그가 짧게 말했다. 서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숨을 몰아쉬며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 시선에는 낮 동안 켜켜이 쌓아뒀던 무언가가 조금씩 새어 나오는 듯한 균열이 있었다. 도윤은 그 균열을 알았지만,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것이 두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 할 또 하나의 규칙이었으니까. 공을 몇 번 더 주고받았다. 서은의 스파이크는 매번 조금씩 달랐는데, 어떤 건 사납게 꽂혔고 어떤 건 힘없이 흘러내렸다. 도윤은 그 차이를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궤적을 미세하게 조절해, 그녀가 가장 편안하게 도약할 수 있는 지점으로만 공을 보냈다. *** 두 사람이 처음 이 관계를 시작한 건 지난 학기 초였다. 서은이 체육관 뒷문을 몰래 열고 들어와 홀로 스파이크 연습을 하던 밤, 도윤이 우연히 데이터 노트를 두고 갔다가 다시 가지러 온 게 그 시작이었다. "이 시간에 여긴 왜." 그가 물었을 때, 서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공을 던졌을 뿐이었다. 방향도 없이, 목적도 없이, 그저 팔이 아플 때까지. 그날 도윤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토스를 올려주었을 뿐이다. 서은이 그 공을 처음 내려찍었을 때, 그녀의 표정이 아주 잠깐 무너졌다가 다시 굳어지는 걸 도윤은 보았다. 그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 침묵이 서은에게는 어떤 말보다 필요했다는 사실을, 도윤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그때 깨달았더라면, 달라지는 게 있었을까. 도윤은 종종 그런 생각을 했지만, 답을 찾지는 못했다. *** "학교에서는." 서은이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모르는 사람처럼." "알아." 도윤이 답했다. "눈도 안 마주쳐." "마주치면." "안 돼." 그가 단정하게 잘랐다. "그건 규칙이야." 서은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 표정을 뭐라 설명해야 할지 도윤도 알 수 없었다. 서운함인지, 안도감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근데."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복도에서." 도윤의 손끝이 잠시 멈췄다. "3초." 서은이 말했다. "눈 마주친 거 3초였어." "그건." "셌어." 그녀가 짧게 웃었는데, 그 웃음이 낮의 완벽한 미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걸 도윤은 알았다. 서투르고, 어색하고, 그러면서도 조금은 안심한 웃음이었다. "규칙 어긴 거야." 도윤이 말했다. "규칙 정한 사람이 그러면." "내가 정한 거 아니야. 같이 정한 거지." "그럼 벌금 있어야지." "벌금이라니." 도윤이 미간을 좁혔다. "뭘로." "글쎄." 서은은 잠깐 생각하는 얼굴을 하고는, 다시 입꼬리를 삐죽 올렸다. "다음엔 5초 넘기지 말라는 경고 정도로." "그럼 오늘 건 봐준다는 거야?" "오늘만." 도윤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공을 들었다. 서은도 다시 자리를 잡았다. 세 걸음의 거리, 그 안에서만 허용되는 눈맞춤, 그 바깥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관계. 공이 다시 허공을 갈랐다. 이번에는 조금 더 높았고,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서은이 도약하며 손끝으로 공을 내려찍는 순간, 체육관 형광등 하나가 깜빡이며 잠깐 꺼졌다가 다시 켜졌는데, 그 짧은 암전 속에서 두 사람 모두 서로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 짧은 어둠 속에서 서은의 숨소리만 들렸다. 거칠고, 조금 떨리는. "괜찮아?" 도윤이 물었다. "괜찮아." 서은이 답했지만, 그 목소리는 스파이크를 내려찍을 때의 단호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내일." 서은이 다시 숨을 고르며 말했다. "경기 있어." "알아. 지역 예선." "이길 거야." "당연하지." 서은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어깨가 조금 더 굽어졌다는 걸, 그 미세한 변화를 도윤만이 알아차렸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윤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굽은 어깨의 곡선이, 평소의 서은에게서는 본 적 없는 종류의 무게를 담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서은아." 도윤이 부르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뭐." "별거 아니야." 도윤은 말을 삼켰다.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그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서은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코트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형광등 불빛이 그녀의 얼굴 반쪽만을 비추고 있었고, 나머지 반쪽은 그림자 속에 잠겨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내일 경기가 있다는 그 말 뒤에, 서은이 삼킨 다른 말이 있다는 걸 도윤은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그것이 무엇인지, 물어도 되는 것인지, 그는 판단할 수 없었다. 공을 다시 집어 든 도윤의 손끝이, 아주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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