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나는,
그날 소희의 손목에 새겨진 붉은 자국을 보지 못했더라면, 지금도 아무것도 모른 채 그 애의 손을 잡고 하굣길을 걸었을 것이다.
독서실 옆 골목, 편의점 파라솔 아래에서 낯선 남자의 등에 팔을 두르고 웃고 있던 소희의 옆얼굴을, 나는 하필 그 순간 마주쳤고, 심장이 쿵 내려앉는 소리를 나만 들었다는 게 억울할 만큼 조용했다.
그날은 평범한 화요일이었다.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독서실로 넘어가는 길, 나는 소희에게 문자를 보낼까 말까 고민하며 걷고 있었다. [오늘 늦게 끝나?] 라고 쓰다가 지웠다. 며칠 전부터 소희가 이상하게 바빴고, 나는 그게 그저 학원 스케줄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골목을 지나던 참이었다.
소희는 나를 보지 못했다. 남자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웃음을 흘리고 있었고, 나는 그 웃음이 나에게 보여준 적 없는 종류라는 걸, 이상하게도 그 순간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소희가 나와 있을 때 짓는 웃음은 언제나 조금 수줍고, 조금 조심스러운 데가 있었다. 그런데 그 웃음엔 그런 게 없었다. 활짝, 아무 거리낌 없이,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에게 보이는 웃음이었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손끝이 차갑게 식으며 휴대폰을 쥔 손가락이 저절로 셔터를 눌렀고, 그 소리가 들릴까 봐 숨도 못 쉬며 골목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것 같았고, 다리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을까. 남자가 소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뭔가를 속삭였고, 소희는 그 말에 또 웃었다. 나는 그 웃음소리를 등 뒤로 들으며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한심했다, 이 상황에서도 들킬까 봐 두려워하는 내가.
왜 나는 그 순간 뛰어가서 소희의 팔을 붙잡지 못했을까. 왜 나는 남자의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나는 오래도록 찾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소희를 볼 때마다 그 편의점 파라솔의 그림자가 겹쳐 보였다. 손을 잡을 때도, 어깨에 기대올 때도, 웃으며 [오빠, 오늘 뭐 먹을까] 하고 물을 때도, 나는 그 목소리 뒤에 숨은 또 다른 목소리를 찾으려 했고 그럴수록 내 안의 무언가가 조용히 무너져 내렸다.
교실에서 소희를 마주칠 때면 나는 애써 시선을 돌렸다. 소희가 쉬는 시간마다 다가와 팔짱을 끼고 매점 이야기를 할 때도, 나는 웃는 얼굴로 대답하면서 속으로는 계속 그 골목을 떠올렸다. 소희의 손목에 있던 붉은 자국은 무엇이었을까. 그 남자가 세게 잡았던 흔적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걸까. 나는 그 자국을 발견한 순간부터 이미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한 주가 지났을 때, 나는 소희에게 물어보지 않기로 결심했다.
묻는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소희는 눈을 똑바로 보며 아니라고 할 것이고, 나는 또 그 말을 믿고 싶어질 것이고, 그러다 결국 아무것도 확인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갈 것이었다. 소희는 거짓말을 할 때도 눈빛이 흔들리지 않는 애였다. 그게 나를 더 무섭게 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선택을 했다. 증거를 모으는 쪽으로.
확인 대신 기록을. 추궁 대신 관찰을. 나는 그렇게 나 자신을 설득했다. 이건 복수가 아니라 확실함을 위한 절차라고,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라고. 하지만 그 논리 안에는 이미 균열이 가 있었다는 걸, 나는 그때는 몰랐다.
"서준아, 무슨 생각 해?" 소희가 내 팔을 흔들며 물었을 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냥, 시험 걱정"이라고 대답했다.
거짓말이 이렇게 쉬웠던가, 스스로에게 물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소희는 내 대답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고, 그 표정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얼마나 많은 순간을 이렇게 넘겨왔을까,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이 속아온 걸까.
소희는 그날 오후 내내 내 옆에 붙어 앉아 문제집을 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좋아하는 아이돌 이야기, 다음 주에 있을 시험 이야기, 겨울방학 계획까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 시늉을 했지만 머릿속엔 그 편의점 파라솔의 장면만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소희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고, 손끝은 여전히 내 손등을 툭툭 건드리며 장난을 쳤다. 그 다정함이 진짜인지, 아니면 그저 익숙해진 습관인지 나는 더 이상 구별할 수 없었다.
집에 돌아온 밤, 나는 침대에 앉아 그날 찍은 사진을 다시 열어보았다.
화질이 흐릿했지만 소희의 옆얼굴과 남자의 어깨는 분명했고, 나는 그 사진을 삭제하지 않고 폴더 깊숙이 숨겨두었다. 폴더 이름은 아무 의미 없는 숫자로 바꾸었다. 누군가 우연히 열어봐도 알아볼 수 없도록.
[사랑해, 서준아.] 며칠 전 소희가 침대맡에서 속삭이던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았고, 나는 그 말과 이 사진 사이의 거리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같은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사진 속 웃음과 그날 밤의 속삭임 중, 어느 쪽이 진짜 소희인지 나는 판단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둘 다 진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더 끔찍했다.
분노보다 먼저 온 건 절망이었다. 손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질 만큼 휴대폰을 움켜쥐면서도, 나는 소희를 미워하는 것보다 나 자신을 미워하는 게 더 쉬웠다.
왜 하필 나였을까, 왜 이런 걸 목격해야 했을까,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들은 하나같이 답이 없는 채로 방 안의 어둠 속에 흩어졌다.
나는 사진을 다시 한번 확대해서 남자의 얼굴을 살펴보려 했지만, 화질이 나빠 윤곽만 겨우 보일 뿐이었다. 나이가 나보다 훨씬 많아 보였다는 것, 체격이 크고 옷차림이 소희의 또래와는 확실히 달랐다는 것. 그것만이 내가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정보였다. 그 사실이 오히려 나를 더 참혹하게 만들었다. 나이가 많다는 것, 그건 이 관계가 단순한 실수나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날 밤 나는 결심했다. 소희와의 관계를 끝내겠다고.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한 달, 정확히 한 달의 시간을 나에게 주기로 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완벽하게 연기할 것이었다. 평온한 커플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친구처럼.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나는 조용히 소희의 거짓을 하나씩 모아둘 것이었다.
빈틈없이 어리석은 계획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상황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계획은 이랬다. 소희의 일정을 몰래 확인하고, 학원이 끝나는 시간과 실제로 집에 도착하는 시간의 차이를 기록하고, 이상한 점이 보이면 사진이든 메모든 남겨둘 것. 유치하고 비겁한 방법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 순간의 나에게는 그것이 유일하게 붙잡을 수 있는 끈이었다.
창밖으로 늦가을 바람이 낙엽을 흩날리고 있었고, 나는 그 흔들림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잠들지 못했다. 낙엽 하나가 가로등 아래로 떨어지는 걸 보며, 나는 저것도 언젠가는 다시 나무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소희와 나 사이도 그런 걸까. 이미 떨어져버린 뒤에는, 다시 붙일 방법이 없는 걸까.
다음 날 아침,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소희를 만나기로 한 카페 앞에 서 있었다.
소희가 멀리서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모습을 보며, 나는 입가에 웃음을 만들어냈다. 아주 자연스럽게, 아주 익숙하게.
거리를 좁혀오는 소희의 얼굴엔 아무런 그늘도 없었다. 밝은 웜톤의 니트를 입고, 머리를 하나로 묶은 채 숨을 몰아쉬며 다가오는 그 모습이 너무도 평소와 같아서, 나는 잠시 어제의 그 사진이 정말 소희였는지조차 의심스러워졌다. 하지만 폴더 깊은 곳에 숨겨진 그 흐릿한 이미지가, 결코 착각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많이 기다렸어?" 소희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고, 나는 "아니, 방금 왔어"라고 대답하며 손을 내밀었다.
소희의 손을 잡는 순간, 나는 그 손이 며칠 전 다른 남자의 등에 두르고 있던 손이라는 걸 떠올렸고, 그 사실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온기와 뒤섞이며 이상한 감각을 만들어냈다.
따뜻했지만, 차가웠다.
소희는 아무것도 모른 채 내 팔에 자기 팔을 걸며 오늘 뭐 먹을지, 주말엔 뭘 할지 재잘거렸다. 나는 그 말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으면서도, 동시에 그 말들 뒤에 숨겨진 다른 시간표를 상상하고 있었다. 소희가 나에게 말하지 않은 시간들, 나에게 보여주지 않은 얼굴들.
그리고 나는, 그 이중적인 감각을 안은 채로 걷기 시작했다. 이 거짓된 평온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나는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