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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다음 날 아침, 교문 앞에서부터 한서은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공기가 유난히 서늘했다. 여름인데도 그랬다. 등굣길 아이들이 줄줄이 지나가는 사이로 서은이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교복 치마 끝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면서. "왔어?" "…왔다." 뭔가 각오한 표정이었다. 나도 모르게 걸음이 느려졌다. 발끝이 자꾸 땅에 붙는 느낌이었다. "어제 말한 거, 오늘 설명해줄게." "설명 안 해도 돼. 어제 대답 그대로야. 안 사귀어." "일단 들어봐." 서은이 내 팔을 붙잡고 옆 골목으로 끌었다. 손목에 닿는 체온이 생각보다 뜨거웠다. 등굣길 애들이 힐끗거렸다. 누가 봐도 궁금해할 만한 그림이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런 시선은 정말 싫었다. 소문이란 소문은 하루면 학교 전체를 돈다는 걸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짧게 말할게." "짧게 말해봐." "나 사실 진짜로 너랑 사귀고 싶은 건 아니야." "…뭐?" 어제와 정반대의 말이 튀어나왔다. 뭐가 진짜고 뭐가 가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순간 하얘졌다. "그럼 어제 그건 뭐였는데." "공식적으로는 사귀는 거 맞아. 근데 진짜로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니라는 거지." "말 좀 똑바로 해." 서은이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뭔가 각오를 다지는 얼굴이었다. 평소의 능글맞은 표정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게 오히려 더 불안했다. "나한테 절친이 있어. 정하윤이라고, 성혜여고 다녀." "그게 왜 지금 나와." "걔가 지금 다리를 다쳐서 여름방학 내내 요양 중이야." "…그런데?" "근데 걔가 지금 진짜 심심하고 외로워.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게, 너랑 나랑 사귀는 척하면서, 걔도 너랑 사귀는 척하는 거야." 순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었나 싶어서 되물었다. "…뭐라고?" "공인 이중 교제. 너는 나랑도 사귀고, 하윤이랑도 사귀는 거야. 물론 진짜는 아니고." "미친 소리 아니야?" "미친 소리 맞아. 근데 걔한테는 필요해." 서은의 목소리가 순간 낮아졌다. 장난기가 사라진 그 얼굴이 또 나왔다. 저 표정을 벌써 두 번째 보는 거였다. 그게 뭔가 심각하다는 뜻인 걸 이제는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두 명이랑 동시에 가짜 연애를 하라는 거야?" "어. 정확해." "싫어." "싫다는 대답은 이미 예상했어." "예상했으면 왜 이래." "그래도 물어봐야 하니까." 말이 겉돌았다. 서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골목 안으로 지나가던 고양이 한 마리가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보고 사라졌다. 저 고양이도 이 상황이 어이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해가 안 돼. 왜 그런 걸 나한테 시켜." "네가 제일 안전하니까." "그게 무슨 뜻이야." "너 소문 안 만들고, 뒤끝 없고, 약속 잘 지키잖아. 학교에서 다 아는 사실인데." 칭찬인지 이용인지 헷갈리는 말이었다. 기분이 나쁘면서도 묘하게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정말로 그런 애였으니까. "그럼 그 정하윤이라는 애도 이 계획 알아?" "아직 몰라." "뭐?" "내가 오늘 말해주려고." "너 진짜 대단하다." "고마워." "칭찬 아니야." 서은이 살짝 웃었다. 웃음 속에 미안함이 조금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더 마음에 걸렸다. 차라리 뻔뻔하게 웃었으면 이렇게까지 신경 쓰이지 않았을 텐데. "태오야, 딱 방학 한 달만이야. 그 뒤엔 자연스럽게 없어질 거야." "없어진다는 게 뭔데. 그냥 관계 정리하면 끝나는 거야?" "뭐, 그런 셈이지." 대충 넘기려는 말투가 거슬렸다.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았다. 서은의 시선이 살짝 옆으로 빠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히 봤다. "이거 진짜 걔 몰래 하는 거면, 나중에 다 밝혀지면 어떡해." "안 밝혀지게 잘하면 돼." "그게 제일 어려운 부분 아니야?" "그래서 너 필요한 거야. 너 잘하잖아, 뭐든 꼼꼼하게." 이건 설득인가 부추김인가. 둘 다인 것 같았다. 서은은 사람을 이렇게 몰아붙이는 재주가 있었다. 빠져나갈 구멍을 하나씩 다 막아놓고 마지막에 딱 한 마디를 던지는 식이었다. 수업 시작종이 울렸다. 서은이 재빠르게 손목을 놓았다. 손목에 남은 온기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오늘 점심에 옥상으로 와. 자세한 거 다 설명해줄게." "안 간다니까." "올 거야, 너." 확신에 찬 말투가 얄미웠다. 교실로 들어가는 내내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1교시 내내 칠판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선생님이 뭘 설명하는지도 모르겠고, 옆자리 애가 뭘 물어봐도 대답이 늦게 나갔다. 정하윤이라는 이름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얼굴도 모르는 애인데 왜 이렇게 신경 쓰이는지 나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진짜로, 나는 그날 점심 옥상에 서 있었다.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됐다. 왜 여기 왔지, 나. 분명히 안 간다고 했는데.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걸음이 유독 무겁게 느껴졌던 것만 기억났다. 바람이 옥상 위로 훅 불어왔다. 멀리서 체육 수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의 웃음소리, 호루라기 소리. 평범한 점심시간의 풍경 속에서 나 혼자만 다른 세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옥상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서은이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화면에 낯선 이름이 떠 있었다. 정하윤. 이름 세 글자를 보는 순간 손끝이 저절로 움직였다. 꾹, 눌렀다. 버릇처럼 나오는 행동이었다. "통화할 거야. 옆에서 들어봐." "내가 왜." "들어보라니까." 전화가 연결되기 직전, 문득 어제 서은이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혼자 하는 부탁 아니야. 이제야 그 말의 무게가 실감났다. 손끝이 다시 차가워졌다. 휴대폰 화면 속 통화 연결음이 유난히 길게 늘어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받을까, 안 받을까. 그 짧은 몇 초가 마치 몇 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네 번째 신호음 끝에, 딸깍, 연결음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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