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눈을 떴다.
천장이 낯설었다.
아니, 천장이 있다는 사실부터가 낯설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장면은 절벽이었다. 발밑이 사라지고, 등 뒤에서 이자강 그 개자식이 웃고 있었고, 나는 허공에 붕 떠서 아, 나 여기서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 순간의 감각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바람 소리, 옷깃이 찢어지는 소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었던 이자강의 웃음소리. 그 웃음소리만큼은 죽어서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살았다.
정확히는 죽었다가 다시 눈을 뜬 것 같은데, 그 사이에 300년이 지나 있었다.
지구에서.
설명하자면 복잡한데,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절벽에서 떨어진 나는 이 세계와 지구 사이의 틈에 처박혔고, 거기서 300년을 수행했다. 처음엔 그게 수행인지도 몰랐다. 그냥 정신을 차려보니 서울 어느 반지하 원룸이었고, 옆방 사람이 새벽마다 통화하는 소리가 벽을 타고 넘어왔다. 그때는 이게 다 환각인 줄 알았다. 근데 환각이 300년 동안 이어지면 그건 그냥 인생이다.
그동안 지구에서는 편의점 알바도 해봤고, 헬스장도 다녔고, 인터넷 밈도 웬만큼 익혔다. 삼각김밥 유통기한을 확인하다가 손가락이 저절로 빨라지는 걸 느꼈을 때는 그냥 알바 숙련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헬스장에서 벤치프레스 봉이 휘어지는 걸 보고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무맥이었던 몸뚱이가 어느 순간부터 이상하게 튼튼해지더니, 나중에는 벽돌을 손으로 부수는 지경까지 갔다. 헬스장 관장님이 나를 보는 눈빛이 점점 이상해지길래 결국 회원권을 조용히 취소했다.
[사도행전 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비늘까진 아니고 그냥 몸이 근질거렸다.
그때는 그게 성장통인가, 혹은 오십견의 전조인가 싶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뭔가가 몸속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소리였던 것 같다.
지금 그 근질거림이 다시 시작됐다.
등줄기가 서늘했다.
뭔가가 내 몸속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설마.
또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려는 걸까.
제발 이번엔 좀 조용히 넘어가면 안 되나. 나도 이제 좀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관절에서 뚝뚝 소리가 났다. 300년치 각질이 벗겨지는 소리인가 싶었는데, 그냥 오랜만에 몸을 움직여서 나는 소리였다.
방은 허름했다. 흙벽에 나무 창틀, 냄새는 곰팡이와 흙냄새가 섞였다. 벽 한쪽에는 금이 가 있었고, 그 틈으로 아침 햇살이 얇게 새어 들어왔다.
원래 세계로 돌아온 게 확실했다.
지구에서 마지막으로 잔 곳은 서울 어느 원룸이었는데, 여긴 그냥 시골 오두막 수준이다. 벽지도 없고, 장판도 없고, 그냥 흙바닥에 낡은 이불 한 장 깔려 있는 게 전부였다. 임대차 계약서도 없고 보증금도 없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전세 사기 걱정 안 해도 되니까.
아니 이 와중에 그런 걸 걱정하는 내가 제일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창밖을 봤다.
산세가 눈에 익었다.
제련각의 뒷산이었다. 4년 전, 아니 300년 전이자 4년 전인 그날, 절벽에서 떨어졌던 바로 그 산.
소나무 몇 그루가 삐뚜름하게 서 있는 모습도, 능선의 굴곡도, 예전 그대로였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데도 산은 하나도 안 늙은 것 같아서 괜히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돌아왔다.
돌아왔구나.
코끝이 찡해졌다.
눈가도 살짝 뜨거워졌다. 300년이라는 시간이 실감 나면서 뭔가 벅찬 감정이 밀려왔다. 이자강 그 개자식한테 복수는 못 했지만, 적어도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하지만 지금 감동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었다.
몸속에서 뭔가가 다시 꿀렁거렸기 때문이다.
쿠구구궁...
소리가 없는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느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치 배 속에 두꺼비가 들어앉아서 트림을 참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럴 리가.
두꺼비는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다. 두꺼비였다면 진작 개골개골 소리라도 냈을 텐데, 이건 그것보다 훨씬 묵직하고 낮은 진동이었다. 마치 지하철이 지나가는 걸 몸으로 느끼는 것 같은, 그런 종류의 울림.
가슴을 문질렀다. 뜨거운 것도 아니고 차가운 것도 아닌, 애매한 열감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지구에 있을 때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아니, 있었나?
헬스장에서 벤치프레스 봉을 휘게 만들었을 때, 그때도 이런 열감이 잠깐 스쳤던 것 같기도 하다. 그때는 그냥 근육통인 줄 알았지.
300년 수행 끝에 몸에 뭔가 심어놨나?
아무도 나한테 동의를 구한 적 없는데.
그때 눈앞에 글자가 떴다.
진짜 글자가.
허공에.
[SYSTEM ACTIVATION IN PROGRESS...]
뭐지?
게임이야?
나 지금 이세계 전생물 주인공 된 거야?
근데 나는 이미 이세계에 있었잖아. 이세계에서 이세계 전생물을 찍는 건 무슨 경우인지 모르겠다. 메타적으로 너무 복잡하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의 글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마치 폭이 안 맞는 자막처럼 허공에 둥둥 떠서, 내가 눈을 깜빡여도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강도윤, 각성 조건 충족. 천공 시스템, 기동 준비 87%...]
천공?
그게 뭔데.
이름부터가 너무 거창하다. 무슨 대기업 계열사 이름 같기도 하고, 아니면 어디 프리미엄 아파트 브랜드 같기도 하고.
설마 나한테 청약 당첨 알려주는 시스템은 아니겠지.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가슴 한복판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촤아아아악!
방 안이 새벽처럼 밝아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눈꺼풀 안쪽까지 빛이 뚫고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눈을 감아도 밝기가 그대로 느껴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욥기 38: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지금 그거 나한테 시비 거는 거지.
어디 있었냐니, 나 지구에서 300년 뺑이 쳤거든.
땅의 기초는 몰라도 편의점 삼각김밥 진열 기초는 잘 알고 있다고. 그것도 나름의 노동이었다.
빛이 점점 커지면서 방 전체를 가득 채웠다. 흙벽 틈으로 빛이 새어 나가는 게 보였다. 밖에서 보면 이 오두막이 무슨 UFO라도 착륙한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뭔가 거대한 게 내 안에서 태어나려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이 너무 생생해서,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도교수님 좆됐다, 라는 표현을 여기서도 쓸 수 있을까.
아니, 나 지금 지도교수도 없잖아.
대신 뭔가 훨씬 더 골치 아픈 게 생기려는 참이었다.
가슴 속에서 열감이 점점 더 강해졌다. 마치 누군가 내 안에다 뜨거운 물을 붓는 느낌. 그런데 아프진 않았다. 이상하게 익숙했다. 300년 동안 조금씩 쌓아온 뭔가가 마침내 형태를 갖추려는 것 같았다.
빛이 눈앞에서 사람 형태처럼 뭉치기 시작했다.
아니, 사람은 아니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격자무늬 같은 것으로 이루어진 실루엣이었다. 마치 홀로그램 광고판이 오작동해서 사람 모양으로 깨진 것 같은, 그런 이질적인 형체였다.
그 실루엣이 입을 열었다.
"...GANG-DO-YOON."
내 이름을 불렀다.
등줄기가 다시 서늘해졌다.
저거 발음 되게 딱딱하게 하네. 무슨 콜센터 자동응답기 같기도 하고.
"YOU ARE... THE CHOSEN."
선택받았다고?
뭘 선택받았다는 건데.
로또도 아니고.
설마 이거 다단계는 아니겠지. 선택받았다고 하고서 뒤에서 뭐 팔려는 거 아니야.
빛이 더 밝아졌다.
창밖에서 새들이 놀라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퍼드득거리는 날갯짓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저 새들은 아침부터 무슨 봉변인가 싶겠지.
뭔가 엄청난 게 시작되려는 느낌이 방 안 가득 차올랐다.
공기가 무거워졌다. 숨을 쉬는데도 폐 안쪽까지 뭔가 눌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눈앞의 빛덩어리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도망칠 생각도 못 했다. 아니, 정확히는 도망칠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었다. 몸이 마치 접착제로 바닥에 붙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거, 도망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격자무늬 실루엣이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방 안의 열감이 목젖까지 차올랐다. 300년 전 절벽에서 떨어질 때 느꼈던 그 무력감이 다시 스쳐 지나갔다. 그때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번에는 등 뒤에 이자강이 없다는 게 유일한 차이점이었다.
빛덩어리가 한 번 더 진동했다.
쿠구구구궁!
그리고 그 안에서, 뭔가 형체가 더 뚜렷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