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버려진 정혼자, 최강귀환

4화

지팡이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톡, 톡, 톡. 일정한 박자로 땅을 찍는 소리였다. 관중들의 관심이 옮겨가는 그 짧은 틈이 유일한 기회였다. [도주 경로 계산 완료. 골목 왼쪽으로 12보, 우회전 후 언덕길로 진입 시 추적 확률 8%까지 하락합니다.] 8퍼센트면 거의 성공이라는 뜻인데, 몸이 왜 안 움직이는 걸까. 수능 만점자도 8퍼센트짜리 확률이면 인생 걸고 베팅할 텐데, 나는 지금 발이 땅에 붙은 것처럼 꼼짝도 안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300년 동안 별의별 사선을 넘으면서 익힌 도주 본능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완전히 작동을 멈춘 것이다. 지팡이를 짚고 걸어오는 노인의 걸음걸이가 낯익었다. 허리는 굽었지만 걸음에 흔들림이 없었다. 한 발짝, 한 발짝, 마치 걸음 하나에도 예의를 갖추는 듯한 그 특유의 리듬. 주름진 얼굴에 익숙한 눈매. 마춘삼이었다. 4년 전, 아니 지구 시간으로는 300년 전이겠지만, 그때도 저 사람은 이미 나이가 많았다. 그런데 지금도 저렇게 걸어 다니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인간의 시간과 이계의 시간이 얼마나 다르게 흐르는지, 나는 여전히 정확히 계산할 수가 없었다. 그저 마춘삼이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뭔가 뭉클해졌다. "강도윤 도련님." 마춘삼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살아... 살아 계셨습니까." 그 한마디에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수십 개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꽂히는 게 느껴졌다.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마춘삼이 나를 알아본다는 사실 자체가 소문에 무게를 더했다. 이제 이 마을에 도는 소문은 단순한 헛소리가 아니라 공식 인증을 받은 셈이었다. [욥기 19: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구속자는 아니고 그냥 손자인데, 뭘 그렇게 성경까지 꺼내오냐. 성경이 이렇게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오지랖을 부릴 줄은 몰랐다. 나는 마춘삼에게 다가가 무릎을 낮추며 손을 잡았다. 손이 얇고 차가웠다. 예전보다 훨씬 더. 살집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뼈마디가 그대로 만져지는 손이었다. 4년이라는 시간이 이 사람의 몸에서 대체 무엇을 앗아간 걸까. "마춘삼 어르신,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라니요, 도련님. 사람들이 다 죽었다 하는데 이렇게..." 말끝이 흐려졌다. 마춘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울지 말라고 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괜찮아요, 저 원래 좀 잘 안 죽는 체질입니다" 같은 말을 하면 분위기가 어떻게 될지 상상만 해도 등줄기가 서늘했다. 그래서 그냥 손을 좀 더 세게 잡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할아버님은 어디 계십니까." 내가 묻자 마춘삼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방금까지 눈물을 흘리던 얼굴이, 마치 스위치가 꺼진 것처럼 무표정하게 변했다. 뭐지, 저 표정은. 좋은 소식은 아닌 게 분명했다. 배달 앱 리뷰란에 "사장님이 뭔가 숨기시는 것 같아요" 라고 쓰인 걸 볼 때 느끼는 그 불안감이랑 똑같았다. "그... 그건 조용한 곳에서 말씀드리는 게 낫겠습니다." 마춘삼이 주변을 힐끔거렸다. 마을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몇몇은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구경할 태세였다. 이게 무슨 장터의 판소리 공연도 아니고, 사람 목숨 걸린 얘기를 이렇게 관객 앞에서 할 수는 없었다. 쓰러진 전대구는 아직 정신을 못 차린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숨은 쉬고 있는 것 같았다. 일단은 다행이라고 해두자. "일단 여기서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춘삼이 지팡이로 방향을 가리켰다. [도주 경로 재활용 가능. 추적 확률 8%에서 재산정 필요.] 필요 없다, 이미 지팡이 짚은 노인이 안내해주는데 뭐가 더 필요하냐. 시스템이 이렇게 뒷북을 치는 것도 이젠 익숙해졌다. 나는 마춘삼을 따라 마을 뒤편 오솔길로 향했다. 걸으면서도 등 뒤로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마치 등에 레이더가 달린 것 같았다. "저 사람들, 이제 소문 낼 텐데요." "낼 겁니다. 확실히요." 마춘삼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태연함이 더 무서웠다. 이 정도 마을 규모면 소문이 도는 데 반나절도 안 걸릴 텐데,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확언하는 걸 보면 진짜 뭔가 큰 그림이 있다는 소리였다. "어차피 숨겨지지 않을 일이었습니다. 도련님이 나타나신 순간부터요." 무슨 뜻인지 되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다른 게 더 급했다. 오솔길로 접어들자 마을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바람이 나무 사이로 스치며 내는 소리만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할아버지는요." "...제련각 뒷마을에 계십니다. 제가 모시고 있습니다." "모시고 있다는 말이 왜 이렇게 불안하게 들리는지 모르겠네요." 마춘삼이 걸음을 멈췄다. 한참 침묵이 이어졌다. 지팡이 끝이 땅을 짓누르는 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전도서 3:4, 슬퍼할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지금은 확실히 슬퍼할 때인 것 같은데, 시스템도 알고 있나 보다. 이런 순간에 눈치 없는 알람 하나 안 뜨는 걸 보면, 얘도 나름 배려란 걸 아는 모양이다. "도련님이 떨어지신 그날, 이자강 소각주가 태겸 어르신을 찾아왔습니다." "...찾아와서요." "어르신을 협박했습니다. 손자를 잃은 값을 치르라고요." 협박이라는 단어에서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값을 치르라니, 마치 대출 이자 독촉하는 사채업자 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르신의 두 다리를... 자르라고 명했습니다."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귓속이 멍했다. 바람 소리도, 새 소리도, 심지어 내 심장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강도윤의 심박수 급상승 감지.] [진뢰 반응 대기 상태로 전환됩니다.] 진뢰가 뭔지 아직도 정확히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 몸속 어딘가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뭐지, 이 감각. 분노인지 힘인지 구분이 안 됐다. 마치 탄산음료를 세게 흔든 뒤 뚜껑을 살짝 열었을 때처럼, 안에서 뭔가가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발버둥 치는 느낌이었다. "그럴 리가." 입 밖으로 나온 말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말이 겨우 이거밖에 없다니. "사실입니다, 도련님. 어르신은 지금 양다리를 못 쓰십니다." 마춘삼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가 지난 4년 동안 매일 어르신을 업어서 씻기고, 앉혀드리고..." 말을 잇지 못했다. 주름진 손이 지팡이를 꽉 쥐고 있었다. 손등에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세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300년을 다른 세계에서 보내며 별의별 걸 다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소식 앞에서는 그 시간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강함이라는 게 대체 뭘까. 몬스터를 썰고 던전을 부수고 시스템 창을 이리저리 조작하는 능력이, 정작 가장 지켜야 했던 사람 하나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 앞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냥 손자였다. 할아버지가 다리를 잃은 걸 모른 채 강해지기만 했던 손자. [욥기 6:2, 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재앙을 함께 저울 위에 놓아 보인다면] 저울이 있다면 지금 이 감정의 무게를 좀 재보고 싶었다. 아마 저울이 부서질 것 같았다. "이자강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내 목소리가 이렇게 차갑게 나올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마치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빌려온 것 같았다. 마춘삼이 고개를 저었다. "소각주는 지금 왕궁에 계십니다. 마을에서는 뵐 수 없습니다." 왕궁. 선화, 라는 이름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지금은 그 생각을 밀어냈다. 지금 왕궁까지 쳐들어갈 생각을 할 만큼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먼저 할아버지를 봐야 했다. 무엇보다 먼저. "안내해 주십시오." 마춘삼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뒷마을로 가는 길은 좁고 구불구불했다. 발밑으로 자갈이 밟히는 소리가 났다. 걸으면서도 속에서 뭔가 계속 부글거렸다. [진뢰 에너지 축적률 상승 중. 현재 34%.] 34퍼센트가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왠지 좋은 신호는 아닌 것 같았다. 마치 전기밥솥 압력 게이지가 빨간 눈금을 향해 서서히 올라가는 걸 보는 기분이었다. 지금 폭발하면 안 되는데. 일단 할아버지를 만나기 전까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감정을 억눌러야 했다. 오솔길 끝, 낡은 초가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지붕은 여기저기 이엉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고, 벽에는 세월의 흔적이 검게 그어져 있었다. 마춘삼의 걸음이 그 앞에서 멈췄다. "여깁니다." 문 앞에 서니 안에서 낮은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소리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기침이 이어질 때마다 내 심장도 같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손이 떨리는 걸 억지로 참으며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 문 하나를 여는 게, 몬스터 웨이브 한복판에 뛰어드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섭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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