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전교 여신들의 배달왕

1화

밤 열한 시가 넘도록 골목을 오가는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서한동 주택가를 갈랐고, 이도현은 헬멧 안쪽으로 차오르는 자신의 숨소리를 들으며 배달 앱 화면에 뜬 다음 콜을 확인했다. 오늘 벌써 열아홉 번째 배달이었고, 시급을 계산할 필요도 없이 몸이 먼저 알았다. 다리 근육이 뻐근하게 당기는 감각과, 허리춤에 매달린 헬멧 걸이가 덜그럭거리는 소리, 그리고 편의점 김밥 하나로 버틴 위장이 자꾸만 신호를 보내는 것까지, 전부가 익숙해서 오히려 서글펐다. 겨울도 아닌데 밤바람은 유난히 차가웠고, 신호대기 중 정차한 오토바이 위에서 손끝이 시려올 때마다 그는 장갑을 다시 고쳐 끼며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되물었다. 몇 개만 더 돌면 오늘 목표치를 채울 수 있을까, 아니면 자정을 넘겨서라도 콜을 더 받아야 하나. 대답은 늘 같았다. 더 돌아야 했다. 그는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습관처럼 휴대폰 메신저를 열었고, 여동생 이서아가 보낸 짧은 메시지 하나를 읽었다. '오빠, 오늘도 늦어? 라면 끓여놨어.' 그 문장 아래 웃는 이모티콘 하나가 붙어 있었는데, 도현은 그것을 보다가 명치 어딘가가 꽉 막히는 기분이 들어 얼른 화면을 꺼버렸다. 서아는 이제 고작 중학생이었지만 이미 집안 형편의 무게를 정확히 저울질할 줄 아는 아이였고, 그 사실이 오빠인 그에게는 자랑이라기보다 죄책감으로 더 크게 다가왔다. 아버지가 떠난 지 삼 년, 그동안 서아가 라면을 끓여놓겠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아이로 자라는 사이, 도현은 자신이 아버지의 빈자리를 완전히 채우지 못하고 있다는 걸 매번 실감해야 했다. 대학 등록금이라는 단어를 서아 앞에서 꺼낼 때마다 그는 목이 메었고, 서아는 그런 오빠를 보며 괜찮다고, 자긴 아직 시간이 많다고 웃어넘겼는데, 그 웃음이 오히려 더 아팠다. 다음 콜은 서한동에서도 가장 부촌으로 꼽히는 언덕 위 빌라촌이었다. 오르막을 오르는 오토바이 엔진이 힘겹게 울어대는 소리를 들으며, 도현은 이 동네에 올 때마다 느끼는 이질감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대리석으로 마감된 로비, 자동으로 열리는 유리문, 엘리베이터 안쪽까지 은은하게 퍼지는 조명까지, 전부가 그가 사는 반지하 원룸과는 다른 세계의 문법을 쓰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그는 무심코 벽면에 붙은 거울을 보았고, 거기 비친 자신의 얼굴 — 땀에 젖은 앞머리와 피곤이 짙게 내려앉은 눈밑 — 이 이 건물의 조명 아래에서 유독 초라해 보인다는 사실에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벨을 누르고 몇 초를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배달 봉투 손잡이를 고쳐 잡으며 애써 무표정을 유지했는데, 그건 이 격차를 매번 마주할 때마다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익힌 습관이었다. 이 정도 격차는 이제 익숙해질 만도 한데, 하고 그는 생각했지만, 익숙해진다는 말과 아무렇지 않다는 말은 전혀 다른 뜻이라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도현은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안에서 향긋한 냄새와 함께 웃음소리가 왈칵 쏟아져 나왔고,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교복도 아닌 편안한 홈웨어 차림이었지만 도현은 그 얼굴을 알아보는 데 채 일 초도 걸리지 않았다. 서한고 전체가 다 아는 얼굴, 복도를 지나가면 저절로 시선이 따라붙는다는 그 얼굴, 박은서였다. 밝은 조명 아래서도 은서의 웃음은 유난히 환했고, 그 환함이 도현에게는 낯설게만 느껴졌다. "오, 왔다!" 은서가 반가운 티를 숨기지 않고 봉투를 받아 들며 뒤를 돌아 소리쳤다. "서윤아, 야식 왔어!" 그 목소리에 안쪽에서 걸어 나온 사람은 강서윤이었는데, 트레이닝복 차림임에도 조각처럼 정갈한 콧날과 서늘한 눈매는 여전했고, 도현을 발견한 순간 살짝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했다. 도현은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는 순간 심장이 덜컹,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학교 안에서 강서윤은 늘 먼 존재였다. 복도 저편에서 지나가는 것만 봐도 시선이 저절로 따라가는,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거리에 있는 인물이었는데,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배달 봉투를 사이에 두고 도현과 채 두 걸음도 되지 않는 곳에 서 있었다. "어? 같은 학교 아니야?" 서윤의 물음에 도현의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감각과 함께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대답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이름을 밝히면, 반을 밝히면, 그다음엔 뭐라고 말해야 하나.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건 아니었지만, 하필 이 세 사람 앞에서 그 사실이 드러나는 게 견딜 수 없이 창피했다. 그가 채 대답도 하지 못한 사이, 거실 소파에 늘어져 있던 윤채린이 하품을 씹으며 고개만 슬쩍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2반, 이도현." 채린이 무심하게 이름을 정확히 짚어내는 순간, 도현은 세 사람이 자신의 이름과 반까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이 순간이 자신의 배달 아르바이트와 학교라는 두 세계가 처음으로 겹쳐지는 지점이라는 걸 깨달으며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어떻게, 어떻게 저 애가 내 이름을 알고 있지. 같은 학교라 해도 말 한 번 섞어본 적 없는데. 도현의 머릿속이 순간 새하얘졌고, 그 짧은 침묵 속에서 은서와 서윤의 시선이 서로 부딪히는 것을, 그리고 그 시선 안에 담긴 무언가가 단순한 호기심 이상이라는 것을 도현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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